한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진진삼매입니까?” “바리때 속의 밥, 물통 속의 물이다.” 이에 설두 스님이 송했다. “바리때 속의 밥, 물통 속의 물. 말 많은 스님이라도 주둥이를 떼기 어려우리라. 북두성·남극성은 있을 자리에 있는데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흰 물결은 평지에서 일어난다. 헤아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할 것인가. 속옷도 없는 장자의 아들이로다.“
Q : 좌선을 하면 망상이 많아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앉아서 호흡을 보려고 하면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망상을 없애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A : 망상은 평소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망상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고 ‘지금 망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에 속하며 법은 경원의 대상이 아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선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을 하고 살아 온 것이 망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알아차리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무엇이나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고 없애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좋거나 싫거나에 상관없이 무엇이나 나타난 대상을 분리해서 주시하면 됩니다. 수행 중에 바라는
고봉 스님은 호방하기 짝이 없는 스님으로 잘 알려졌다. 곡차도 사양하는 법이 없었고. 흥이 났다 하면 두주불사였다. 어느 해 여름. 고봉 스님은 그날도 곡차를 많이 하시고 크게 취하여 절로 돌아와서는 마루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시자를 불렀다. “이것 보아라, 어서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내 발을 좀 씻겨다오.” “예, 스님.” 시자가 스님의 분부를 받고 돌아서는데 다른 스님 한 분이 시자를 불러 세웠다. “이봐라. 고봉 스님이 너에게 발을 씻기라고 하시더냐?” “예, 그러셨습니다” “이 녀석아, 고봉 스님께서 발을 씻어라 하셨으면 그 땐 네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하는게야.” “뭘 어떻게 물어보라는 말씀이신지요?” “스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합니까?’이
운문 스님이 대중설법을 했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사이에, 그 가운데 보배 하나가 있는데 형산(形山)에 감춰져 있다.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하고, 삼문(三門)을 갖고 등롱 위로 왔노라.” 그 보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고인들은 말했다. “모든 부처님이 마음에 있는데 미혹한 사람들은 바깥에서 구하느라고, 자신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가 간직되어 있는데, 일생 쉴 줄을 모른다.” “불성은 뚜렷이 나타나 있지만 모양에 머무는 중생은 보기 어렵다. 중생 그 자체가 무아라는 사실을 안다면 나의 얼굴이 어찌 부처의 얼굴과 다르겠는가.”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며, 얼굴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얼굴이로다. 겁석(劫石)은 옮길 수 있어도 가운데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Q :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법(法)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무엇입니까? A : 법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법을 빨리어로 담마(Dhamma)라고 하는데 요약하자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대상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의 대상을 법이라고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법의 개념은 대체로 알아차릴 대상을 말합니다. 불교는 실천적인 수행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이건 수행을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릴 대상이 몸과 마음이고, 이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법입니다.
육긍 대부가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천지는 나와 한 뿌리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했는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남전 스님이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한포기의 꽃을 마치 꿈결에 보는 것과 같이 하느니라.” 이에 대해 설두 스님이 노래했다. ‘듣고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고/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옛 사람들은 “만일 사(事) 측면에서 이해하면 상정(常情)에 떨어지고, 생각(意根)으로 헤아리면 끝내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암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향상인(向上人)의 살림살이다. 눈 앞에 조금만 내보였는데도 번갯불이 스치는
Q : 마음을 보는 수행은 어떻게 합니까? 또 이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A : 수행을 할 때 알아차려야 할 중요한 대상의 하나가 마음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서 마음보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알아차릴 대상이 마음일 때를 마음보기라고 말합니다. 먼저 『대념처경』에서 말하는 알아차려야 할 마음은 16가지입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없는 마음. 성내는 마음, 내지 않는 마음. 어리석음 마음, 어리석지 않은 마음. 침체된 마음, 산만한 마음. 커진 마음(선정), 커지지 않은 마음. 집중된 마음, 되지 않은 마음. 자유로워진 마음,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 이상과 같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마음을 보려는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또한
벽허 선사가 월저 선사 아래서 공부한 지 몇 해가 지나자 스승 월저 선사가 말했다. “나는 이미 늙었다. 용의 새끼를 기를 수 없으니 네가 비늘이 돋아날 수 있는 곳으로 가거라.” 그리고는 벽허를 설암 선사에게 보냈다. 벽허 선사가 설암 선사에서 수참한 지 4년이 흐른 정월 초하룻날 떡국을 먹던 스승이 벽허에게 물었다. “법성원융(法性圓融)이란 뜻이 무엇인고?” “적일(赤日)입니다.” 순간 벽허는 확철대오하며 시를 지었다. 지는 햇빛은 붉은 누각에 비치고 끊어진 구름은 옥봉(玉峯)을 의지했네. 천고의 탑에서 방울소리 흔들리고 백년된 소나무 바람소리 웅웅대네. *벽허선사: 1657년 평양서 출생, 영조 11년인 1734년 묘향산에서 입적.
Q : 마음의 작용은 모두 몇 가지나 되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A : 수행을 할 때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하는 일이 서로 다릅니다. 마음의 작용은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수(受)가 1가지, 상(想)이 1가지, 행(行)이 50가지입니다. 그래서 모두 52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마음과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하는 것들입니다. 느낌도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생각도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행위 역시도 마음의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만 하고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수, 상, 행 3가지가 합니다. 또한 이것들이 함께 일어날 때가 있고 때때로 혼자서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의 작용이 고구마의 한 줄기에 여러 개의 고
설봉 스님이 동산 스님의 회하에 있을 때 밥 짓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쌀을 씻고 있는데 동산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쌀을 일고 있습니다.” “쌀을 일어 모래를 버리느냐, 모래를 일어 쌀을 버리느냐?” “모래와 쌀을 일시에 모두 버립니다.” “그럼 대중들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 이에 설봉 스님이 쌀을 씻던 그릇을 엎어버렸다. 동산 스님이 말했다. “너의 인연은 이곳에 있지 않다.” 동산 스님의 용처는 무엇이었을까? 운문 스님이 말한 바 있다. “그대들에게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가 있기를 바라지 않으나 물에 순응하는 뜻만 있어도 된다.”
한 스님이 목평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겨울 오이가 이토록 크구나.” 한 스님이 고덕 스님에게 물었다. “깊은 산 가파른 벼랑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끊긴 곳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있다.” “어떤 것이 깊은 산속에 있는 불법입니까?” “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다.”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을 때 “뜰 앞의 잣나무”라 한데 착안해 보라. 만약 불법이니, 종지이니 하는 헤아림이 없다면 목평 스님과 고덕 스님의 일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Q :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심념처(心念處)라고 해서 마음에 대하여 강조하는 부분이 많은데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A :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습니다. 정신은 하나이지만 필요에 따라 다시 세분화해서 표현할 때 심(心), 의(意), 식(識)으로 나눕니다. 이때 심을 마음이라고 하고, 의는 생각, 식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과 구별할 때 사용됩니다. 마음은 오온 중에서 식을 말하며 수, 상, 행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소가 수레를 끌 듯이 오온을 이끄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의 작용과 물질과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집니다. 마음은 매 순간 빠르게 일어나서 빠르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마음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