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덕양선원에 몸을 담은 지 어느덧 5년이 지나간다. 덕양선원에 오기 전 원찰에 다녔고, 기도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믿고 따르던 주지 스님께서 갑자기 열반에 드셔서 한동안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마침 남편의 사업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게 됐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덕양선원을 알게 됐고, 그 곳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 수행을 접하게 됐다. 2년 전 어느 날, 큰사위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갑자기 딸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결혼 5년 만에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되면서 그 충격으로 2년이 넘도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다발성 신경증으로 매일 토하고 어지럽다고 했는데 급기야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병원으로 달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참회와 발원으로 108배 절을 하고 명상을 한 후 ‘금강경’을 독송한다.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부처님 법을 만난 것이 내 인생에 최고의 행운이고 복이다. 나는 늘 어둡고 부정적이었었다.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사는 게 힘들었다. 아버지는 늘 술주정과 노름에 빠져 살았고, 엄마와 나는 가장노릇을 도맡아 해야 했다. 알 수 없는 슬픔과 세상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느닷없이 밀려왔지만 어떻게든 엄마와 동생들을 보살펴야겠다는 일념으로 실업고등학교를 가고, 은행에 취직해 동생들을 뒷바라지 했다. 세월이 가면서 나는 지쳐갔고, 결국 그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해 버렸다. 그러나 시댁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의처증이 심한 시아버지와
나의 오랜 친구와 옛이야기를 하던 중 가끔 술 한 잔을 할 때면 자주했던 얘기가 있다. “책상은 책상이 아니고, 나무는 진정 나무가 아니야”라고.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인생 초·중반의 모습은 항상 우울했다. 무엇을 해도 만족할 수 없었고 공허하고 헛헛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늘 무기력하고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그러던 어느 날 청화 스님을 다룬 부처님오신날 특집방송을 보고 불교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또 우연히 접한 ‘반야심경’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오랜 갈증을 한 번에 해결하듯 그 동안 내가 삶에 던졌던 숱한 물음에 해답을 찾은 듯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접고 무작정 절로 들
불교와 인연을 맺은 뒤 처음으로 시작한 대비주 수행은 어떤 고통에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큰 힘이자 위로가 되었다. 대비주 수행의 힘을 처음 체험하게 된 것은 지난 2009년 2월. 당시 네 살이었던 아이가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나서부터였다. 사람이 살아가며 수많은 고통을 겪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픈 것을 그냥 바라만 봐야 하는 괴로움보다 큰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찾아온 아이의 병 앞에 우린 부모라는 이름이 부끄럽기만 했다. 고사리 같은 작고 가는 손에 바늘을 꽂고 어른도 견디기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를 바라만 보고 있노라면 깊고 긴 탄식만 터져 나왔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처럼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순간 대비주가 나도 모르게
지난 6월, 1년이나 미뤄 온 만 배 절 수행을 이번에는 꼭 하겠다는 발원을 세웠다. 청견 스님이 지도하는 법왕정사는 2박3일간 만 배 수행을 해야만 법명을 받을 수 있는데, 초등학생 꼬마들부터 70세를 훌쩍 넘긴 노보살님들도 이렇게 법명을 받았다. 내심 꼭 법명을 받고 싶다는 생각과 회사에 휴가를 낼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아 이번에는 반드시 만 배 수행을 하겠다고 발심을 했다. 만 배 수행을 시작한 첫 날, 새벽 4시 반부터 시작된 절은 공양시간을 빼고 계속됐다. 스님의 지도 아래 한 배, 한 배 정성스럽게 절을 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팔다리가 쑤시기 시작하더니 곧 졸음도 몰려왔다. 어느새 머릿속은 망상으로 가득했다. 몸은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교와 친숙했었고, 소원이 있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면 늘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 덕택인지 서울대에 입학하고, 우연한 기회에 사법시험공부까지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공부 시작 전에 항상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1차 시험에 무난히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뒤로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는 ‘관음경’이 잘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간절히 불렀던 관세음보살님인데 이제 1차 합격했다고 맘이 들떠서인지, 도무지 기도가 절실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불교서적을 뒤적이고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해 뜰 무렵’이라는 ‘금강경’ 카페를 발견하고,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대학을 다니면서 가슴은 늘 허전하고 학교는 겉돌기만 하는 일상이 계속됐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런 근본적인 의문이 뇌리에 맴돌면서 훌륭한 분을 만나 이것을 꼭 해결하고 싶었다. 마침 한 친구를 만났는데, 학교 불교동아리에서 하절기 수행을 하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권해 부산 남천동 보림선원에서 백봉 김기추 선생님을 찾아뵙게 됐다. 선생님이 누군지 전혀 들은 바 없는 상태였다. 선생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리고 난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그리고 하얀 수염과 치켜세워진 하얀 눈썹, 붉은 기운 도는 얼굴의 어른 앞에 앉아 있는데,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애써 이를 꽉 물고 참으려 하는데도 실없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왜인지 잘
고요한 공기를 가르고 죽비가 울립니다. 한 배 한 배 절을 올립니다. 천천히 몸의 상태를 느끼면서 호흡 끝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108배를 합니다. 거친 호흡을 정리하고 숨을 고르며 편하게 앉습니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지켜보며 관세음보살을 염합니다. 한 숨 한 숨 들어오고 나가면서 몸이 이완되고 손이 따뜻해져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저에게 불교는 대학시절 잠깐 배운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었고, 사찰은 MT가는 관광지에 불과했습니다. 비오는 날 산사에서 마시는 커피를 좋아했고, 법당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냄새와 딸랑이는 풍경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 가끔 삶이 힘들 때면 절을 찾고는 했지요. 그것이 불연이었을까요. 우연히 선지식을 만나보겠냐는 한마디에 끌려 해운대 ‘시선원’을 알게 되었고, 법사님을
아마도 그리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그땐 모른 채 그냥 그리웠다. 부처님 법 만나 공부하면서 생각해 보니 고향이 그리웠던 것이다. 어느 날, “참선 하는 곳 없을까?”하는 남편 물음에 “지나가다 눈여겨 뒀던 선원이 있는데 가볼까?”하고 발걸음을 옮긴 곳이 공생선원이었다. 첫발을 들여놓은 순간 푸근한 마음이 친정에 온 것 같았다. ‘내가 공부할 곳은 이곳이야.’ 주저함도 없이 마음이 딱 결정 돼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가 끊임없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에는 그 장애가 공부 거리인 줄도 모르고 ‘장애가 없어야 공부하는데 큰일이다’하고만 생각했다. 남편의 퇴직, 주식 바닥, 쌍둥이 손자도 맡아야 하고, 게다가 절망적인 것은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의 폐암 진단이었다. 무상이라는 단어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저는 마음의 종교는 불교에 두고 있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절에 자주 나가지 못했습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사찰에 가곤 했기에 저 스스로 ‘비빔밥 보살’이라고 이름을 하는 게 오히려 좋을 만큼 불교는 편안하지만 아직 멀기만 한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몇 년 전 부산 대광명사 주지 목종 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마음으로만 불교를 믿고 있던 제게 좀 더 적극적인 불자가 되라며 다양한 불교 공부의 길을 제안하셨습니다.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서 불교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스님 안내로 불교 교리를 배우고 경전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 공부를 하고 경전을 접하는 가운데 불교에 대한 저의 시각은 많은 부분 변화가 되었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일 자
▲51·한당 8년 전, 부모님과 형제들을 떠나보내고 죽음에 대한 공황증에 시달려 잠도 못자고, 온몸은 마비가 되고 오한이 오는 극심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 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던 중 현수막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길을 따라 간곳이 공생선원이었어요. 여름 안거 중이라고 하더군요. ‘삼배하는 것도 모르고 불교용어 하나 모르는 내가 생소한 마음공부로, 끄달리는 마음만 잡을 수 있다면 한번 해보리라. 내게 부처인 주인공이 있다는데, 자신을 믿으라는데 손해 볼게 뭐 있으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아무것도 모른 채 하안거에 도전 했지요.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좌선을 하고 밤마다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목탁 대신 손
▲74·수일행 꾸준히 사경을 하면 모든 감각을 다스리고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기며, 좋고 나쁜 분별심이 없어져 이끌림을 당하지 않게 되고, 대인 관계에서 마음이 상하고 미움이 일어나도 분별과 시비를 초월할 수 있어 늘 마음이 편안합니다. 향 한개 사르고 경상 앞에 앉아 붓놀림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모릅니다. 모르는 글자는 사전을 찾으며 문맥을 해설하니 노년 생활에 사경만큼 바람직한 수행은 없으며 치매, 우울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는데 몇 년 째 사경을 하다 보니 어떤 어려움에도 초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자신감으로 내 자신이 변해가고 있다’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사경반에서 80세 넘은 노
▲74·수일행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친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친할머니께서는 가을이 되면 추수를 끝내고 정갈하게 다듬은 햇곡식을 머리에 무겁게 이고 손주 중에 유달리 착하다 하시며 나를 데리고 마을 뒤 조그만 암자에 가셔서 부처님께 정성껏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할머니 옆에 앉아 절도 따라하고 기도문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불심(佛心)의 씨앗이 나에게 심어진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니 시어머니께서도 진실한 불자셨습니다. 그 당시는 마을 근처에 사찰이 없을 때라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머리에 이고 가는 과일이 어찌 그리 무거웠던지 손자 점시해 주시라는 기복적인 기도에 저도 마음이 동하여 부처님께 애원하는 기도
▲43·반야지 순간순간. 한 순간도 부처님을 잊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슴에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업이 되니 만사형통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불을 자꾸 하면 부처님과 한 마음이 되니 남에게 베풀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저는 평소에 운전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많이 염불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간혹 얌체족 운전사를 맞닥뜨리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거든요. 얌체 운전도 여러 가지입니다. 깜박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차는 물론, 잘 가다가 갑자기 서버리거나 작은 차라고 무섭게 들이대는 덩치 큰 트럭들 모두 얌체족입니다. 운전하면서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 건 얌체 운전이 아니었습니다
▲43·반야지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을 믿고 따름으로써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신앙입니다. 극락에 가면 성불합니다. 극락세계는 부처님께서 48원을 세워서 진실한 과보와 진실한 보답으로 만든 실보장엄토요, 아미타 부처님께서 공덕을 지어 만든 공덕장엄토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관음사에선 재작년부터 공파 스님을 모시고 ‘대승기신론’을 1년간 공부하고 또 ‘정토삼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주지스님이신 지현 스님을 모시고 장엄염불을 시작으로 ‘아미타경강기’를 매주 수요일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불교에 입문하지 6년 된 불자입니다. 6년 전 아이들을 머나먼 호주에 두고 한국에 온 뒤 우울증에 걸릴 뻔 했습니
▲ 47·휴암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기 얼마 전이었다. 스님 법문집을 읽었다. ‘일기일회’와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을 읽으며 과거 의문과 공부를 되살렸다. 이렇게 부평초처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불안과 공포와 욕심과 짜증으로 점철된 삶이 괴로웠다. 그리고 얼마 후 스님이 입적하셨다. 생전에 못 뵌 것이 아쉬워 길상사를 찾았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아침 참선수련에 참여했는데 결국 법정 스님은 나를 40년 동안 끊임없이 격려해주시고 마침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깨달음이 숙명처럼 찾아왔다. 역시 생물학, 물리학 그리고 천문학이었다. 슈레징거의 고양이는 주·객관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드린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밀폐
▲ 47·휴암 비스킷을 먹고 그네를 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네를 밀어주셨다.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하얀 옷을 입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이제 떠나야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떠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죽는다고 하셨다. 웃으면서 가셨다. 죽음이 뭔지는 몰랐지만 여하튼 헤어지는 것이라 울며 매달렸다. 울다가 잠에서 깼다. 할아버지는 멀쩡히 잔디에 물을 뿌리고 계셨다. 6세 때 일이다. 죽음은 이렇게 강렬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실까?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죽음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이 있을까 등등의 고통스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느덧 그런 생각은 일상
▲ 62·경주 눈이 수북하게 쌓이고 볼을 에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날, 고등학생 10여명과 선생님 한 분이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60년대 덕산 삼거리에서 수덕사까지 10리 이상을 걸어 수련대회를 가는 풍경이다. 당시 장항선 기차를 타고 3시간 이상 걸려 삽교역에 도착, 해미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덕산삼거리에서 내려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2였던 내게 세속과 단절됐던 수덕사 절간에서 열흘 동안의 참선정진과 원담(혜공) 큰스님 법성게 강의는 인생에 크나큰 자량이 되었다.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 봉은사에서 광덕 큰스님을 뵙고, 달밤에 하얀 배꽃이 핀 배밭을 지나 나루터로 오던 기억은 어제 일인 듯 가깝
▲62·경주 11년 11월11일! 새벽 5시30분쯤 평생도반 수형 보살과 집을 나섰다. 오늘은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기로 한 날이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보리방편문 120독, 아미타불 금륜관 1200념의 새벽일과를 마치고, 금강 카페에 제2차 염불선 천일수행 714일째 수행기를 올린 뒤다. 도시의 번잡함을 뒤로 하고, 운무와 어우러진 산세가 실경 산수화보다 아름다운 길들을 지나 월정사에 다다랐다.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 너머 옷을 다 벗은 키 높은 나무들이, 일주일쯤 전이면 화려했을 단풍을 추억하며, 내방객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었다. 상원사 내 찻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일행들과 적멸보궁을 향했다. 평일이어서 인적이
▲50·덕성화 어머니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갑갑한 마음이 들던 차에 딱 적절한 곳이 문수선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풍습은 하나도 모르는데 가지 않으련다’는 어머니를 막무가내로 모셔왔다. 처음 왔을 때 감정이 위축되고 세상사 당신 탓만 했는데 무비 스님을 뵌 순간 신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구절과 이 세상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 그리고 사람이 부처님이란 법문을 듣고 어머니는 지금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또 사경반 여러 보살들도 친절하게 잘 안내 해주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람 사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고 바로 그날부터 사경반에 입학을 했다. 어머니가 처음 사경할 때는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