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음을 다잡고 ‘금강경’ 공부를 했다. 그런데 임신이 됐다. 사실 임신이 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38세였다. 유전적인 문제가 있어서 조기 유산을 항상 걱정하던 터라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조기 유전자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도 웬일인지 예전처럼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누가 주신 아긴데 무슨 일이 있겠어?’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배짱이 생긴 것 같았다. 결과는 건강한 아기라는 판정이 났다. 이제 조산을 예방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울산에서 대구까지 가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어려운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공부를 그만 둘 수 없었다. 임신 기간 내내 누워서 공부했다. 워낙 고위험 산모라 예방차원에서 입원도 몇 차례 했었다. 출산 전에 ‘금강경’ 1만독이 빠
내 어린 시절 기억 속 불교는 정확히 말해 절에 간다는 것이다. 절은 향내가 가득하고 심심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그냥 엄마가 가자고 하니까 한두 번 따라가다 지겨워하며 돌아오는 곳이었다. 엄마는 도대체 절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참 궁금했다. 하지만 나에겐 너무나 딴 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어 어떤 문서에 종교를 적을라치면 항상 당연하다는 듯 불교라고 당당하게(?) 적고는 했다. 절에는 관광이나 가면서 말이다.남들처럼 학교 잘 다니고 어려운 대학시험도 한 번에 붙는 등 그리 힘들지만은 않은 20대를 보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고 나서부터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비슷할 것 같다. 사랑해서 결혼한다지만 결혼 하고 나니 상대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
차 명상공부로 얻은 작은 깨달음을 나처럼 어둠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비심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공부가 익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노보살님 인연으로 호스피스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처음 시작한 호스피스는 환자에게 다가가기 어색했다. 아파하는 모습들이 눈물짓게 했지만 모든 것을 인연의 이치로 보며 이내 환자와 그 가족들과 함께 인연 따라 울고 웃으며 삶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했다.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부처님 법을 조금씩 전하며 호스피스 지도법사 정법 스님에게 수계를 받도록 안내했다. 호스피스 봉사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돌처럼 굳었던 원한이 봄 눈 녹듯 녹아내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남편은 죽어가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눈물로 용
해병대서 제대한지 두 달 된 작은 아들이 말을 걸어왔다. “엄마!” “왜?” “엄마와 난 달라.” “뭐가 달라?” “엄마는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난 사람이 안 된 것 같아.” 아들 말에 난 크게 놀랐다. “명상 중 일어난 현상들이 일상에서도 이어지는 지 늘 점검하라”던 지운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것보다 확실한 점검이 있으랴. 4년 전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몸서리가 쳐진다. 어떻게 그리도 무명 업을 대물림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을까. 감정과 생각 그리고 느낌에 속아 사니 못사니, 잘났네 못났네 하면서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보며 분노했었다. 현재 이 순간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날을 보니 참으로 아득한 윤회의 시간들이었다. 많은 고통과 지독한 시련들은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밝은 지혜 빛을 얻기까지 내 스승
교리 공부를 마치고 기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를 때 우연히 읽고 있던 책에서 “100일이면 몸이 바뀌고 1000일이면 생각이 바뀐다”는 글귀를 읽었다. 그래서 1000일 기도 뜻을 세웠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백겁 동안 쌓아온 수많은 죄악도 한 생각 돌이켜 소멸한다는 뜻이다. 한 생각 바꿔 보자는 큰 원을 갖고 기도를 발원한 것이다. 물론 1000일 기도 동안 두 아이가 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진학했다. 또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해 ‘금강경’과 무상계를 매일 읽으며 49재를 올렸다. 기도를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있었지만 1000일을 목표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금강경 독송,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 반야심경 사경, 광명진언 독송….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 초입에 있는 대광명사. 이곳 대광명불교대학에서 ‘열반경’ 경전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재가 하안거 수행 결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재가’, ‘하안거’, ‘수행’. 각각 단어 뜻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가 하안거 수행’이라는 말은 생소했다. 도반이 책까지 사주며 “같이 해보자”고 권했다. 그 말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해보기로 작심했다. 1000일 기도 중이라 매일 사시 예불 뒤 ‘금강경’ 독송이나 “관세음보살” 염불 등을 하고 있었다. 도반이 “기도 중 자비도량참법을 한 권씩 읽으면 된다”고 하기에 별 부담도 없었다. 1000일 기도도 90일쯤 남은 시점이라 나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90일 동안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하며 1000
자기 자신에 대한 냉엄한 성찰과 치열한 구도정신, 수행만이 공부하는 참선인의 덕목이요 나아갈 길임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안타까움과 자책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참선 장소가 어디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내가 할 나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살들이 참선공부를 부러워 하길래 여건이 허락한다면 좋겠지만 주부라서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쫓겨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입처개진이요 좌복에 앉아 주인공 노릇하며 참선하는 것이 바로 수처작주 아닌가요”라고 답하며 웃은 일이 있습니다. 선방에는 대다수가 보살인데, 저보다 참선 연륜도 오래고 정말 열심히 수행하고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보살들 중에서 앞으로 견성할 분
▲ 74·경각 제가 불법을 만난 지 30여년이 넘었지만 무늬만 불자이지 제대로 된 신행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여름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다가 미타선원에서 공파 스님의 미타 사십팔원 강좌가 신행으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우연히 마지막 주 강의를 듣고 새삼 발심해 계속 사시예불에 동참했습니다. 선방 대법장, 정법안 두 보살의 간곡한 권유로 참선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해운정사 진제 큰스님으로부터 “부모 미생전의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받고 참선을 시작했는데 도저히 의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나의 면목이란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의 자리가 아닌가’라는 알음알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원 진불선원
최고 영성 지도자들이 모든 수행자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때문에 잠시도 방일 할 수 없는 수행 일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행자들을 위해 미얀마 사람들이 수시로 공양하러 오는 장면은 큰 감동이었다. 한편 다른 생각도 고갤 들었다. ‘부처님과 경전 말씀대로라면 저렇게 착한 사람들 나라는 분명 복 받고 잘 사는 곳이어야 할 텐데 세계 최빈국이라니……. 이렇게 힘든 수행을 하고 나면 나도 그들과 같이 빈궁한 사람이 되는 걸까?’ 집중수행은 무엇보다 나의 삶과 가치관을 뒤흔들었다. 세상 모든 것을 더럽고 추한 것으로 보는 ‘부정관(不淨觀)’과 스스로 춤추거나 다른 이를 춤추도록 시켜 즐기는 일, 스스로 노래 부르거나 다른 이를 노래 부르도록 시키는 일도 금하는 8계(戒)는 혼란스러웠다. 말하자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약 10명 정도 되는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 중에 아홉 사람이 사전에 얘기를 나눈 뒤 한 사람을 지켜보기로 했다.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홉 사람이 시계를 보고 10시라고 했다. 그러자 나머지 한 사람은 “틀렸다. 9시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홉 사람이 한결같이 10시라고 하자 남은 한 사람도 결국 “맞아. 10시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공동체험 혹은 세뇌 작용이랄까. 반복되는 이야기나 주장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믿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공동 세뇌 현상의 부작용은 종교분야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을 믿어야만 천국을 간다고 믿는 교회질병(?)은 너무 유치한 얘기라 말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불교에서도 잘못된 미신이나 관습이 많다. 나이 든 보살님들이 복을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안해하고 작은 일에도 크게 화를 내며 일의 결과에 부정적이며 비관적으로 살아온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내 성격이 어찌 생겼으며 어떻게 나타났을까?’ 의문 앞에 거침없는 선사의 말씀이 두려움과 비관을 한 순간에 쓸어내어 준다. “제8 아뢰야식(함장식)에 둘러싸여 있는 자성이 나타나는 것이며 수행을 통해 자성을 깨뜨리고 습을 바꾸어 이 8식에서 벗어나야한다. 전생의 업과 6경 6처 6식에 의해 생긴 고정관념 때문이며 처음에는 온갖 망상이 생겨나는 것이 당연하며 실상관법으로 업을 정화하고 힘써 수행정진을 하다보면 종국에는 무심의 지혜를 얻게 된다. 경의 가르침이 뜻하는 것은 우리 일상의 생활에서 긍정심과 희망을 갖는 것이다. 불제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
2009년 어느 날, 지인 소개로 법공부 한다며 열심히 우곡선원을 다니던 아내(수선행 보살)가 나더러 함께 가잔다. 도반들 중에 부부가 함께 수행하니 보기 좋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종교라면 괜한 거부감이 있어 교회든 절이든 얼씬도 하지 않고 살던 나였기에 당연히 거부감이 들었다. “어두운 마음 밝히는 공부하는 곳”이라고, “가면 가정생활에도 좋고 또 거기서 보고 배우는 것이 많다”며 자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선 게 우곡선원과 인연을 맺은 계기였다. 사실 그 전에 우곡선원에서 주관하는 심성개발 교원직무연수 과정을 받긴 하였으나 연수라고 생각했지 여기가 바른 참선수행을 위한 도량인 것은 미처 몰랐었다.처음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부처님 전에 절하
진심으로 열리는 그 마음이 불성이라고 감히 얘기해 본다. 고개 들어 날아오는 모기를 갑자기 손바닥을 맞부딪혀 죽였다 치자. 불성을 0.1초라도 느낄 수 있다면 참회할 수 있다. 평범함에 감사하고 참 나를 찾고자 정진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진심으로 열리는 마음이 불성이라고 감히 얘기한다. 그것이 불성이 아니고 무엇일까. 0.1초가 1초가 되고 1초가 한 시간이 되고, 하루가 되고 또 1년이 되도록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크릿’과 다를 바 없다. 긍정의 힘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내 안에서 찾아야 함을 수천년 전 불법은 이렇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 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무엇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를 만나기 전에 삼천 배를 해야 한다”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 나라는 존재가 미치도록 싫은 때가 있었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불안한 신념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보내며, 세상에 대고 “난 억울하다”고만 얘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 자신을 철저히 깨부숴 새 인격체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추악할 것 같은 그 무엇은 지울 수 없는 업보가 아니었나 싶다. 도망가고 싶었을까? 내 것이 아니라 던져버리고 싶었을까? 곱고 좋은 것만 내 것이어야 한다는 마음. 인정이 안 되는 복잡함이 나를 더욱 미치게 했던 그 시절, 난 3000배를 결심했다. 대단한 불심에서 시작한 기도는 아니었다. 철저히 나 자신에 대한 불만과 시련으로부터 오는 공허함을 깨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내 속에 그 무엇을 죽이고 싶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는 마
어느 해 가행 때 일이다. 철야정진 중이었다. 자정 쯤, 30cm가 넘어 보이는 긴 지네가 내 발가락을 물었다. 놀라 비명을 질렀고 철야정진 중인 도반들 공부 삼매경을 깨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응급실에 바로 갈까 하고 내 도반을 지대방으로 불러냈다. 그랬더니 도반은 “고마워, 지네”라면서 “잠도 오고 공부도 힘든데 잘 됐다”고 지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스스로 대중 참회했다. 물론 맛있는 대중공양을 준비해서. 또 가행 때의 일이다. 모두 선정에 들어 고요했다. 갑자기 어디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직간접적으로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도 공부방 기운을 흩트리는 기색은 없었다. 아뿔싸! 한 보살이 의식을 잃고 앞으로 쓰러진 것이다. 나는 멀리 앉아 있었지만 반사적으로 튀
아침은 늘 그렇다. 어김없다. 내 하루의 빗장은 먼저 예불, 참회, 발원, 기도로 연다. 그리고 발걸음은 선방을 향한다. 오전 9시, 탁! 탁! 탁! 세 번의 입선 죽비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와 함께 참선 정진을 시작한다.선방 좌복에 앉아 가부좌를 튼다. 묘봉산 녹음이 내 앞에 가만히 펼쳐진다. 멀리서 뻐꾸기 소리도 “뻐꾹 뻐꾹” 아스라이 들려온다. 바로 앞 아카시아 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도 “깍, 깍” 노래한다. 겉모습은 그렇게 참선수행 모양을 갖춘다. 그렇다면 내 속은, 내 마음은 어떤가?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왜 수행을 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혜원정사 명심전 선방 주련은 다음과 같다. 단자무심어만물(但自無心於萬物, 다만 만물은 스스로 무심하니) / 하방
어설픈 나무아미타불 염불도 시작했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느새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좀 차리면 오후였다. 어쩌면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지. 사실 불교용어는 너무 생소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무조건 자료들을 공책에 베껴 썼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카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는 보물창고였다. 나는 참 다행이었다. 복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청화 스님과 ‘금강’의 도반들을 만난 복은 물론이거니와, 해인선원장 지도 스님과의 인연도 큰 복이다. 2006년 여름이었다. 카페 ‘금강’ 주선으로 남해 수광암에서 철야정진을 했다. 아들과 동참했다. 주저주저 했지만 도반 승진행님의 간곡한 권유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 녀석과 처음으로 철야정진에 함께 참여했다
한 동안은 내가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어 그냥 살아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으로 살던 때가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가톨릭 신앙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혼 뒤에는 시어머니를 따라 일 년에 두 번 정도 절에 가기는 했다. 그러나 법당에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법당 밖에서 빙빙 겉돌다 돌아오는 일이 고작 이었다. 시어머니는 언제나 절 입구에서부터 지극정성이었다. 정성껏 절을 하고, 전각마다 다니며 빠짐없이 기도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그저 미신이겠거니’ 했다.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으로 나들이 정도로 여겼다. 그다지 아무런 감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 가을쯤이었다. 우연히 불교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수행이 2년째 접어든다. 익숙하지 않는 대비주수행이 처음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안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보리라는 소극적인 마음으로 시작했다. 절실한 마음으로 한 독 한 독 정성껏 독송했다 모나지 않고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도를 하면서보니 문제점이 드러났다. 진지함과 진실성 등을 가식으로 포장해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끄러웠고 반성과 참회도 많이 했다. 보이지도 않는 나의 마음 작용으로 그들을 힘들게 했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참회가 이뤄졌다. 그러니 가족을 대할 때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내가 편안해 지자 그들의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 힘든 기도의 보람을 그렇게 느껴갔다 그리고 평소에 무
지난해 딸아이가 대학 입시에서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서 재수를 하겠다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울면서 매달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번 한번 뿐이라고.’ 막막했다. 시어머님께 부탁드려서 철학원 두 곳을 찾아가 물어 보기도 했다. 지금 딸아이가 들어간 대학에 어림없다고. 여동생도 아는 분한테 물어 보았는데 대학 못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재수 하지 말고 지금 붙은 대학을 가라고 했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막막해서 눈물만 났다.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나에게는 금강경이 있지’ 하는 배짱이 생겼다. 앞도 뒤도 보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남편이 회사에서 일을 잘 해 생각지도 못한 성과금을 받게 됐다. 딸아이는 공부 잘 마쳐서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 다니고 있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