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計功多少 量彼來處)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忖己德行 全缺應供)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防心離過 貪等爲宗)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正思良藥 爲療形枯)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爲成道業 應受此食) 〈오관게(五觀偈)〉 내가 출가 했을 때 송광사 공양간에는 이 게송이 붙여져 있었다. ‘음식을 약’으로 생각한다는 정신이 퍽이나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공양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수고로움, 그리고 공양을 받는 목적을 돌이켜보라는 게송이다. 시주의 은혜가 소중한 절집에서는 공양물을 함부로 다루거나 먹고 남겨서도 안 된다. 또한 모든 공양은 육신을 지탱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모든 공양 가운데에 법공양이 제일”이라 했다. 또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밤새 소리 없이 순하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바다는 흔적이 없는 듯 여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앞마당에 나와 썰물의 때를 살피다가 그간 벼르던 바다로 내려간다. 겨우내 일체 흐름을 끊고 깊은 선정에 들었던 골짜기는 다시 깨어나 흐르고 함께 동행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갯바위는 부딪치는 파도에 더욱 둥글고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와 지난 동안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정겹기만 하다. 무심도 하나의 관문이어서 적멸을 비추고 있다면 아직 주객이 남아있어 법성의 바다에 들지 못하나니 적멸이 비춰야 마침내 바다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저기 톳과 돌미역이 지천으로 널려있고 갯바위에 붙어있는 연둣빛 파래와 먹빛 돌김이 달마대사의 수염처럼 자라서 손길이 가면 부드러운 촉감에 얼굴에는 파안대소가 번지고 있다. 갯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네. 혼인에 관한 명계의 책이지.” 그리고 주머니에 담긴 빨간 끈으로는 두 사람을 묶어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다고 했다. 위고가 호기심에 자신을 한번 봐 달라고 청했다. 노인이 책을 뒤적거리더니 신부 감은 겨우 세 살로 열일곱이 되어야 시집을 올 것이라 했다. 신부는 마을 북쪽에서 야채를 팔고 있는 진노파의 세 살 박이 아이였다. 위고가 실망하여 죽여 없애면 안 되는지 묻자, 노인은 “복이 있어서 아들 덕분에 영지까지 받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위고가 하인에게 비수와 돈을 건네며 노파의 딸을 죽여 달라 했고, 하인이 아이를 칼로 찔렀으나 빗나가 미간에 맞고 죽지는 않았다. 세월이 흘러 14년 뒤 위고는 관리가 되서 태수의 딸과 정혼하게 되었다. 신부는 아름
남도의 무르익은 봄기운을 따라서 가다가 한때 구산선문의 하나로 남종선의 종가였던 보림사에 도착했다. 하루해는 어느덧 앞산에 걸려 무여열반을 나투고 비로자나 부처님은 침묵으로 증명하고 있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불꽃이 소멸하여 적멸에 든 도량은 점점 평온한 어둠으로 깊어가고 있다. 부처님 출가제일과 열반제일 사이 불교도 경건주간을 맞이하여 보림결사라는 새로운 원력으로 도량을 결계하는 불사에 동참했다. 가지산문을 연 보조 체징선사는 오늘날 조계종 종조로 추앙받고 있는 도의국사로부터 법을 받은 염거선사의 제자로 이 절에서 20여 년간 주석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었다. 우리나라 선종의 발원지인 참으로 유서 깊은 도량이 그 간의 쓸쓸함을 떨치고 새 인연을 맞이하여 법신 광명으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선이
근진을 벗어나는 일이 간단치 않으니(塵勞逈脫事非常) 고삐를 당겨 잡고 한바탕 벌려보라(緊把繩頭做一場) 한 번의 찬바람을 뼈에 사무치지 않은들(不是一番寒徹骨)어찌 매화가 코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爭得梅花撲鼻香) 이것은 선가에 애송되는 황벽희운(黃壁希運, ∼850) 선사의 게송이다. 일찍이 황벽산으로 출가하여 득도하였으므로 산 이름이 법명처럼 붙여졌다. 몸이 왜소하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므로 ‘육주(肉珠)’라는 별명도 가진 선사는 기개가 활달했다고 한다. 선가의 보석 같은 어록들 중에 하나인 『전심법요(傳心法要)』가 선사의 것이다.이 풍진 사바세계의 크고 작은 세상사도 마찬가지여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한번은 제대로 사무쳐봐야만 돌파구가 생기는 법이다. 출가자에게 “세상 안 태어난 셈 치라”고 고구정령
하늘에는 위풍당당하게 바람을 가르던 소리개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바다는 뿌연 안개 속에 흔적이 없다. 강한 황사가 부는 걸 보니 봄이 결코 화사롭게 오지만은 않을 것 같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산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시켜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생명의 존귀함과 일체 생명의 평등함을 갈파한 부처님 말씀이다. 정초 기도가 끝나고 절마다 자비심을 실천하는 방생법회가 열리고 있다. 옛날에 스님들이 행각할 때 석장을 짚고 다니거나 절에서 목욕하고 빨래하는 날이 정해졌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까지 배려하는 자비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계는 불자들이 지켜야 하는 제일가는 덕목이다. 오래 살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은 살생을 하여 몸에 좋은 것만 골라
사람마다 마음이 있고(人各有心)마음마다 보는 것이 있다.(心各有見) 무자년 정월의 기도와 행사를 마치고나니 시간은 훌쩍 키가 자라 3월이다. 정초의 7일 신중기도를 ‘산림기도’라 부른다. 흔히 말하는 ‘살림’이 바로 이 ‘살림(山林)’에서 유래한다. 일정 기간을 두고 이뤄지는 일이다. 경전을 강독하면 ‘경전산림’이다. 아직도 많은 사찰에서 정초에 방생을 가기도 한다. 절집의 고유한 문화이기도 하다. 우리 절에서도 꿩 방생을 다녀왔다. 정초에 기도를 올림으로써 한해의 무장무애를 발원하고, 방생을 통해 자비로운 마음을 기르자는 뜻이다. 오래 살고 싶은 게 생명의 본능이고,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일부러 고통스러워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뜰 앞에는 매화가 마침내 진한 향기를 토하고 있다.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한바탕 사무친 정진 끝에 찾아온 봄소식에 더욱 환희롭기만 하다. 이제 동안거 해제가 시작되면 제방선원에서는 만행을 떠날 것이다. 『만선동귀집』에서는 이(理)와 사(事)가 서로 의지해야 걸림이 없어 나와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며 동체대비가 원만해져서 다함없는 만행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수행의 목적은 실상의 이치를 증득하여 널리 중생들을 위해서 보살행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이 일하는 속에서 실천 되었던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좌선에 집착하여 고요함을 지키면 이기심으로 인해서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아 활달한 경계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을 통해서 이치를 파악함으로써 살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선원에서는 점점 울
제 환공(齊 桓公. BC 685~643년 재위)이 하루는 재상인 관중(管仲, ?~BC 645)과 함께 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지금도 사람간의 아름다운 우정을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는데, 이는 관중과 포숙아(鮑叔牙)를 두고 생겨난 말이다. 바로 그다. 발길이 멈춰선 곳은 마구간이었다. 환공이 마구간의 관리를 불러 물었다. “마구간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 관리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관중이 나서서 대답했다. “황송하오나 저 역시 예전에 마구간에서 일해본 적이 있습니다. 마구간에서는 말을 세울 우리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굽은 나무를 쓰면 그 굽은 나무가 다시 굽은 나무를 요구하게 되고, 반대로 처음부터 곧은 나무를 쓰면 이 곧은 나무가 다시 곧은 나무를 요구
따뜻한 남녘 바다에 볼을 베어갈듯 칼바람이 몰아친다. 온몸에는 청아한 기운이 뼛속 깊이 흐르고 물결은 끝없는 설원처럼 은빛으로 넘실거리고 있다. 『금광명경』에서는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물속의 달처럼 인연을 따라서 응한다고 했다. 산짐승들은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가고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 속에서도 설원과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는 겨울 축제가 한창이다. 이 모든 것이 법신이 인연을 따라서 울고 웃으며 차별 없이 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법신이 허공에 두루 펼쳐져 있으며 허공 속에 법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견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법신이 곧 허공’이라는 사실을 투철하게 알지 못한 까닭에 자유롭게 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허공을 기준으로 수행을 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