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에서 정진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의지를 다잡는다. 그 가운데서도 아들의 변화는 나에겐 큰 힘이 된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일들로 나를 힘들게 했던 아들은 내가 참회 정진을 시작한 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지금은 학급에서 반장도 하고, 일요가족법회에 참가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누구보다 적극 나서는 모범생이 됐다. “모든 참회의 근본인 절을 통해 몸을 낮추고 마음을 낮추라”는 스님의 가르침은 이제는 나에게 좌우명과도 같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절을 하면서 참회기도를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지만 가족의 변화되는 모습에서 용기를 얻는다. 기도를 시작한 후 나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 무겁기만 했던 몸이 예전에 비해 한결 가벼워졌고,
새벽 4시, 자명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추슬러 부처님과 마주한다. 부산 성암사 주지 응현 스님으로부터 숙제를 받고 난 후, 변화된 하루의 시작 모습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주무시지 않지만 언제나 두 눈 부릅뜬 스님의 모습이 없었다면 오욕의 하나인 수마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응현 스님과의 인연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힘들어 방황하고 있을 때 성암사를 소개받으면서다. 나는 성암사 경남불교대학을 다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참다운 불자의 길을 걷게 됐다.너무나 끔찍해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지만, 남편의 사업실패로 3년간 소득 없이 지낸 적이 없다. 정말 남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늘 남편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나, 남편의 일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절을 다니면서부터다. 그러나 부처님을 삶의 의지처로 삼은 것은 아마도 25년 전부터인 것 같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나의 의지처임을 믿으며 살아왔으나 부처님 공부와는 사실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삼독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신묘장구대다라니 정진을 시작하면서 많은 참회를 하게 되었고, 긍정적인 삶을 실천하는 참다운 불자로서 그 모습을 갖춰 나가게 됐다. 나는 지금 루프스라는 면역질환성 관절염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그 부작용으로 만성신부전증이 발생해 일주일에 3~4번의 혈액투석 치료를 받고 있다. 지금도 나는 혈액투석을 하러가기 전 반드시 부처님 전에 앉아 다라니 108독을 독송한다. 일상이 되어 가는 이 정진
위빳사나 수행은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대상을 잊어버리고 고요함에 젖어버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삼매에 들려고 하는 마음조차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셨다. 삶에 있어 큰 사건도 없고, 일상이 그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고 허무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떤 불만족이 싹트고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들, 삶 속에서의 피하고 싶은 어려 소소한 일들,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괴로움으로 다가 왔다. 고통과 괴로움에서 힘들어하는 것도 알아차림의 부재였지만 지혜의 부재였기도 했다. “고통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오는 고통, 육체로부터 오는 고통, 그러한 고통을 회피하
그러나 막상 좌복 위에 앉으면 화두는 머리에서 맴돌았고, 평상시에는 ‘저뭣고’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의심은 고사하고, ‘무슨 이런 말이 있나’하며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선서들을 보고, 법문을 들었지만 의심이 잡히는 듯 하다가도 이내 식어버리기를 반복했다. 화두는 처음 불교가 내 삶에 겉돌았듯, 그렇게 버릴 수도 없지만 착 붙지도 않는 묘한 것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 가족은 40여년 살아왔던 경인 지방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우리 가족은 범어사 아래 집을 구했고 주말이면 절을 찾았다. 그리고 수행단체인 토요참선회에도 가입했다. 도반들과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정진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당시 쌍계사 선원장 지환 스님의 법문이 있다는 안내문을 보고 아침 일찍 법문을 들으러 범어사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닷사” 존귀하신 분, 번뇌로부터 떠나신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처음 부처님을 접하게 된 것은 전공과 관계가 깊다.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물리학이 발견한 사실들이 수천 년 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불법을 알기 전까지는 사물의 본질과 법칙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 자연과학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부처님에 대한 호기심과 여러 수행법들에 관심이 갖기 시작하면서 선정이라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다소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갔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 이것에 있음을 찾고 싶었다. 매주 토요일 저녁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어사 참
언제나처럼 형광등 불빛이 새벽어둠을 걷어내는 거실에서 아침 예불을 마치고 좌복 위에 앉는다. 진리와 계합하고자 노력하는 삶인 수행을 할 수 있게 이끌어준 큰 인연들에 대한 감사와 부처님께 귀의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얇은 종이의 두께만큼 찰나의 시간 같은데 불교와 인연이 된 것이 벌써 30년 전. 결혼 전 지금의 남편의 권유로 호기심에 처음 절에 갔고 그곳에서 『원각경』 강의를 들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절은 점도 보고, 굿도 하는 미신이다”라던 말씀과는 달리 매일 들먹이는 이 마음이 왜 괴롭게 되는지에 대한 법문을 들었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이것이 인연이 돼 틈이 나면 절에 나갔지만, 철학과 같이 불교를 마치 학문처럼 공부할 뿐, 실제의 삶과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한 달이면 몇 번씩 청
2007년 9월 초 공부를 시작하며, 이 법은 다른 공부와 다르게 나의 몸과 마음을 빠르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1주일간의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심화반 수업을 할 때의 일이었다. 4년 전 위암 수술 후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아버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게 됐는데 수업 일정과 겹쳐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보리선원 심화반 과정은 결석 시 수료를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병원에서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뵈었던 힘없고 초라한 어르신들의 모습을 아버님에게서 보게 됐고, 그동안 아버님께 소원했던 일들이 떠오르며 순간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핑 도는 경험을 했다. 한 번 정해진 일정은 변경하시는 법이 없으신 아버님. 그러나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신듯, 먼저 외래 일정을
나와 불교의 인연은 큰 아이의 유치원 입학에서 비롯됐다. 우연한 기회 우편함에 꽂힌 유치원생 모집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곳이 잠실 불광사였다. 그곳에서 나는 불법과 인연을 맺었고 아이와 함께 등교와 하교를 하며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광덕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를 하던 나는 스님으로부터 원심행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아마도 모난 내 성격을 꿰뚫어 보신 광덕 스님이 좀 더 둥근 마음으로 사람들을 허물없이 대하라는 뜻에서 지어주신 법명인 듯하다. 당시 나와 도반들은 스님의 가르침대로 팀을 꾸려 인근 병원에서 도서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발심은 조금씩 흐려졌고, 결국 나를 제외한 다른 도반들은 모두 봉사활동을 그만뒀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가족들의 협조를 얻어
나는 요즘 순간순간 한없는 자신감과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행복감에 마치 지독한 사랑에 빠진 사람마냥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리라는 강한 믿음에 인생 자체가 너무도 신이 난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다라니 수행을 알게 됐고, 이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는 사실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만큼 감사하기만 하다.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기쁨을 전일적으로 느끼는 나를 보면서 또다시 다라니 수행으로 변한 나의 모습에 놀랄 뿐이다. 수행 초기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준 보살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부처님 법 안에서는 한 눈만 돌리면 세상이 광명천지예요. 그 세상을 보고 싶지 않나요?”이 말은 이제 내 가슴속에서 작은 공명을 그리기 시작했고, 기도를 할수록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지 3년이 지났다. 캐나다에서의 결혼생활 중 몸이 너무 아파 잠시 귀국한 것이 인연의 시초가 됐다. 잦은 소화불량으로 고생해온 나는 출산 후 7개월쯤에는 아예 식사에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아기를 돌보는 것이 힘들어 그럴 것이라 여기고, 어렵사리 남편을 설득해 치료와 휴식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그 때는 내 병의 원인이 남편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병이라고만 생각했다. 한국에 들어온 후 몸 상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급속히 회복됐고, 두어 달이 지나자 시댁에서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라고 압박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 병의 원인이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캐나다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20여 명의 사부대중이 함께 큰 법당에 모여 정진을 하는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침 넘어 가는 소리가 마치 물 흐르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고, 어쩌다 들리는 기침 소리는 경책을 하는 입승의 죽비 소리를 대신했다. 나에게는 고통스럽기만 한 그 시간, 도반들의 얼굴과 눈은 환하게 빛났고 뭐가 좋은지 연신 지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도반들과 함께 공부하니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함께 묻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닌지 은근한 기대가 생겼다. 법문 시간, 파욱 사야도는 12연기와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경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 그 내용을 이해하기는 힘들었으나, 부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고 지키며 자상하게 지도하는 남방불교 스님의 모습은 감동이었다. 한편으로 가뜩이나 용어
한국위빠사나선원(선원장 묘원)이 미얀마 마하시선원에서 위빠사나를 지도받는 특별한 행사를 갖는다. 한국위빠사나선원은 2월 11일부터 28일까지 ‘미얀마 성지순례 및 단기 집중수행’ 행사를 개최한다. 이번 미얀마 방문은 묘원 법사의 안내로 10일간의 성지순례와 집중수행 순으로 진행된다. 신청 마감은 1월 30일까지며 동참금은 300만원. 02)512-5255
지난 9월, 17년간 운영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가장 먼저 해남 미황사를 찾아 참사람의 향기에 참석했다. 무엇보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또 20여 년 전 송광사 단기출가 프로그램에 참석한 후 틈틈이 공부해온 불법과 참선 수행을 이번 기회에 집중적으로 공부해 보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면 어차피 나는 사장 재목이 아니었다. 대표이사직을 포기하며 주식과 회사 기물을 양도하고, 직원들의 고용 승계를 약속받은 후 스스로 내린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속 좁고 못난 사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회사 경영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운영했던 회사의 프리랜서 영업사원으로 나의 생활만 꾸려나가면 됐다. 모두 내려놓은 것 같은데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고,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아직 남
스님은 어둠에 쌓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우리들을 무지에서 밝은 빛의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스님의 색다른 수행 프로그램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에야 그 고마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10년 전, 위빠사나 수행을 처음 시작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생소하기만 했던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배우기 위해 스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법당에 앉아 있었다. 내게 필요한 아주 귀한 말씀을 받아 무엇인가를 얻어가겠다는 기대감 또한 컸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스님은 수행에 관한 이론도 불교에 관한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았고, 다음 시간부터 목판 작업을 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보는 일을
위빠사나 수행을 접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매 순간 순간 대상에 마음을 균형감 있게 올려놓는 것이 아직도 부족하다. 끊임없이 순간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마음을 챙기는 연습만이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현재도 미래도 계속해서 행하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의문이 많았던 유년의 시절, 나에겐 그 의문을 함께 풀어 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에게, 지혜로운 선지식이 있다면 그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기를 바랬던 강렬한 마음이 내가 세상의 진리를 찾아 가게 했던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지평선이 유일한 세상인줄 알고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그 충격, 새삼 표현하
가끔은 조계사 불화반 수업을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사불에 열중하는 불자들의 얼굴에는 환희심과 편안함이 묻어났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 문을 열고 들어가 함께 부처님을 그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정을 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숙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께서 나에게 사불 수행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또다시 부처님을 그리는 일을 해보라는 제안인 것이다. 보통 인연은 아닌 듯 했으나 여전히 망설여졌고, 이에 보다 못한 도반은 사불수행연구회 법인 스님을 찾아가려 하니 자신을 따라 나서라고 했다. 법인 스님이 계신 수원 참마음선원을 찾았다. 사불-부처님을 그리는 수행은 참으로 놀라웠다. 붓으로 그려낸 선에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대부분 불자들이 부모님의 영향으로 처음 불교를 접하듯,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부처님 곁으로 안내한 것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의 독실한 불심은 30여 년 전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당시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경기도 동두천의 작은 사찰을 찾았고, 차가운 법당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극락왕생과 자녀의 무탈함을 부처님께 간절히 기원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내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별 탈 없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간절하고 지극한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 같은 간절한 모습에서 나
그럭저럭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절에서 무슨 행사라도 한다면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다라니 기도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량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라니 1000독 가행정진에 한번 동참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더욱이 “혼자서 하는 것 보다 도반과 더불어 수행해야만 닦을 거리를 알 수 있고, 다라니 숫자를 정한 만큼은 꼭 할 수 있다”는 스님의 말씀에 자신이 생겼다. 1000독 다라니 기도의 도전을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지겹고, 조급하고, 하기 싫고, 숫자를 채워야 한다는 마음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신비한 경험이었다. 1000독 다라니 정진은 16시간을 꼬박 채운 후에야 끝을 맺을
부처님이 계신 법당을 향해 가는 길이 요즘처럼 즐거운 때가 없다. 거리에 지는 아름답게 물든 낙엽들을 보면서도 쓸쓸하다는 예전의 마음이 아닌 참으로 즐거운 마음이다. 기도 정진하는 도량까지 집에서 지하철,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가야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 거슬러 올라가 보니 덕양선원 법상 스님과의 인연은 10여 년 전인 것 같다. 딸아이 문제로 고민 하던 중 절에 다니시고 계시던 외숙모님께서 선원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때만 해도 절에 다닌 적도 없었으니, 부처님께 오체투지 하는 것은 더더욱 해 본적도 없었다. 스님을 친견하자 방하착 수행을 권해주셨다. 6개월 정도 했는데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되니 발을 뚝 끊고 잊어버렸다. 그 후에는 1년에 한 번 절을 찾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