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정일 스님 권유로 지장경 독경3년 목표로 1000독 도전…눈 혈관 파열도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내가 올바른 길을 따라 수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주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아마도 수많은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모든 것을 걸고 수행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절에 다닐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도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철딱서니 없이 그저 그렇게 지인들과 몰려다니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유난히 약했던 나는 갈 곳이 절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인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던 어느날 지금은 입적하신 정일 스님이 계시던 보광사를 찾게 됐다. 처음 만난 정일 스님은 우리에게
사경 전시작품 보며 편견-오만 깨달아 차근히 다시 쌓은 수행 공덕 회향 발원 지난 6월 한국사경연구회 김경호 회장의 개인전을 통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김경호 회장의 작품들은 미세한 선 처리, 깔끔한 마무리 과정 하나하나가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작품들을 대하며 한 순간에 나의 오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월에는 국립박물관에서 주최한 ‘사경변상도의 세계’라는 삼국시대 사경변상도 특별전시회를 보게 됐다. 이 전시회를 보며 사경에 대한 내 태도가 확실하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까지 나를 지배해오던 편견들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절감했다. 6월과 7월 두 달 사이에 사경에 대한 많은 편견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한때 기초과정을 소홀히 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지난해 5월 길상암 법회에서 사경 첫 체험 나는 첫 돐 직전 열병을 얻었다. 그로 인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온몸에 통증을 겪어야했다. 10년 이상 투병을 계속해야 했고, 그 결과 장애를 얻게 됐다. 그 이후 나의 생활은 당연히 남들과 같을 수 없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 마음의 고통은 그 어떤 것보다도 컸다. 덕분에 행복한 유년시절의 기억 같은 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진로나 현실을 헤쳐가야 하는 현실적인 번민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절망과 실의에 빠져 위로 받고 싶을 때, 종교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틈을 비집고 나를 유혹하는 것은 이웃종교의 전도사며 선교사들뿐이었다. 그들을 접하면서 ‘왜 전지전능하다는 성자는 어린 양들의 육신이나 마음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원자력 관련 연구소로 취직하게 됐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꿈의 직장’이었지만 남편은 일상에 쫓기며 수행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수행에 소홀해지면서 기다렸다는 듯 많은 어려움과 난관들이 우리 부부에게 찾아왔다. 1986년경부터 본격적인 고난이 밀어 닥쳤다. 친구의 사업을 돕겠다며 남편이 상경을 결심한 것이다. 친구의 회사는 당시 정권을 등에 업고 전도가 유망할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의 모두가 아시안게임으로 들뜬 축제 분위기에 취해 있을 때, 우리에게는 고난이 시작됐다. 남편이 상경한지 한 달 만에 그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다. 여러 악재가 겹쳤고, 결국 남편이 회사의 모든 빚을 떠안게 되면서 빚잔치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불광의 도반들이 내 소
인생에 대한 번민 속에 광덕 스님 만나염불 수행 권유 받고 ‘불광회’서 정진 1975년. 당시 20대의 한창 나이였던 나에게 인생은 번민의 대상이었다. 누구에게나 20대는 꽃다운 청춘의 시절이지만, 나의 20대는 인생과 삶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당시 나는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직장동료들과 달리 나는 끈질지게 나를 따라다니는 고민들을 해결해줄 무언가를 찾아다니기만 했다. 나를 알고 있던 직장동료들은 나에게 종교를 권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대한성공회를 소개시켜 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청담동 성당의 미사로 이끌었다. 새로운 곳을 소개받을 때마다 나는 번민들을 떨쳐낼 무언가를 얻게 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매번 지인들의 소개로 찾아간 곳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런 기대는 무참히
사불하며 주력-염불 병행…24시간 정진인내 통해 내 몸-가족 소중함도 깨달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따지는 것은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그리자는 생각은 내가 화가가 되고자 하지 않는 이상 애초부터 접어둬야 할 것이었다. 붓을 들고 있는 동안 나는 수행으로써 한초 한초를 뜨는 그 순간을 즐겼다. 내 호흡과 함께 화선지에 나투시는 부처님은 그 날 그 시간의 내 모습을 만나는 것 이여서 나를 속일 수도 없었고 남도 속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참선, 염불, 간경 같은 것은 밖으로 드러내 보이기가 힘들다. 하지만 한 순간의 호흡과 마음을 모아 사불을 해서 벽에 붙여 놓으면 남편과 아이들이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불은 나 혼자만의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붓 한 자루 잡고 마음을 내는데 석
‘개종도 불사’ 원력 세워 기도…실패만 반복우연히 만난 사불수행으로 마음의 조복 받아 부처님 법을 만나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노랫말이 있다. “오늘 세운 이 서원은 끝 없사오리” 이 구절처럼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서원은 흔들림 없이 나아가리라 생각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수행은 많은 마음의 갈등을 겪으면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됐다. 그 후로는 이 이상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개종도 불사하겠다는 결심까지 해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부처님께로 더 나아가고 깨달음을 이룰 것인가? 내 삶에 의미 있는 기도 방법을 찾아서 큰 스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내 발심의 행로에 대한 답을 구했으나 나에게는 그 답들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기도도 되
매일 새벽 1시간 좌선-1시간 어록 공부100일 정진 정해 놓고 입재·회향 반복 바른 스승을 만나 바른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익히는 것은 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물론 바른 스승 만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백봉 김기추 선생님을 만났듯이 인생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극한 원력이 있으면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지극하게 꾸준히,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줄기차게, 여유같은 의심이 들끓어도 과감히 떨치고, 어려움을 당해서도 꺾이지 않고 굳건히, 공부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어서 명료하고 분명하게, 좋은 도반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30여 년을 수행하면서 하루하루 지나는 일상 속에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
‘나는 누구인가’ 의문…대학 3년 때 불연백봉 선생 無色 법문에 눈물, 정진 시작 청소년 시절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고전적 의문에서부터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가치를 찾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성인도 위인도 아닌 평범한 내가, 기껏해야 80년 정도 살아가는데, 내가 태어나고 죽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왜 부질없이 왔다 가는 것인가.’‘내가 보고 듣고 인지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이 세상은 정말 있는 것인가.’ 등 스스로 해결할 수도 답을 얻을 수도 없는 요상한 물음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매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때인 1975년 5월 어느 날 남동생과 함께 울타리에
10만 독 후 탐·진·치 삼독심 점차 소멸2010년 5월까지 다라니 100만 독 발원 나에게도 기도의 힘이 생기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여동생도 지금은 매주 금요 철야에 함께 수행한다. 부모님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며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았다. 조상님께도 온 식구가 참석하여 여법하게 천도재를 모셔드렸다. 재를 지내며 나는 끝없이 우러나는 환희심으로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처음 이 기도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잠과의 싸움, 게을러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들이 무한히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기도가 계속되면 될수록 그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발원하는 마음도 예전에는 “부처님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변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 후에
스님 권유로 철야 1000독에 도전자신감 얻어 올해엔 10만독 회향 매주 금요 철야기도 시간 어김없이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이어진다. 그 열기는 금요 철야기도에 직접 참석해 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에어컨과 여러 대의 선풍기를 작동해야 할 정도의 열기다. 내가 결혼도 뒤로 하고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다. 2001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어릴 적, 부모님 따라 가끔 절에 다닌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었다. 물론 “부처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금강경 사경하고, 독송하기도 하고, 엄마 따라 그 추운 겨울날 조계사 법당에서 손과 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묘원법사 글 통해 ‘진짜 수행’만나좌선과 경행은 삶의 유일한 활력소 지난해 3월 29일, 위빠사나를 기초부터 차례대로 배울 수 있는 한국위빠사나 선원을 찾아갔다. 강의를 들으면서 ‘몸과 마음은 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아니다’라는 말이 강렬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배우려면 직접 수행처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원을 찾아가기에 앞서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위빠사나 선원의 인터넷 카페를 방문했는데 여러 게시물 중에서도 ‘옹달샘’이라는 코너를 보고부터 나는 그 코너에 중독이 되었다. 묘원 법사님이 수행자들에게 주는 글들이 올라와 있었는데, 삶과 수행이 일치한 글이었고 균형 잡힌 글이었다. 3일에 걸쳐 그 글들을 보면서 머리 속에 있던 먹구름이 확 걷혀나갔다. 그
고교시절 불교에 관심, 대학 3년 때 출가 속퇴 후 한의대 입학…보통 여인으로 살아 통찰지혜란 일종의 자기 치유력이다. 부처님께서 진실로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했던 가르침이란 바로 자기를 치유해 나가는 방법이다. 위빠사나를 만나고 나서 내가 사회를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나의 탐진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내가 옳다고 믿고 고집을 부려서 주위와 불화를 일으킨 것이나 결혼해서 시댁과 겪었던 갈등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나의 강직한 성격 때문인 줄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 성격의 근저에 자리잡은 탐욕과 성냄을 보고 나니 마치 병든 사람이 약을 먹은 것처럼 내 행동이 저절로 고쳐졌다. 이런 것을 일러 법에 의한 치유라고 하던가. 흔히 통찰에 의한 치유를 근본적
극락사 원일 스님 인연…지도자까지매주 수요일 사경하면서 행복 충전해 대구불교대학 2년 과정을 공부하며 부처님의 향기를 느끼며 사경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지혜를 베풀 수 있는 중생이 되게 해달라고 발원하며 사경을 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라도 찾아가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고나니 이럴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불도 배우고, 붓 사경도 배워보자는 마음이 일어났다. 사불도 공부하고 전통 방식의 붓 사경도 배우게 됐다. 그래서 대구 지천에 위치한 극락사 주지 원일 스님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우리들을 사경수행에 정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원일 스님께서는 사경수행을 보급해 보다 많은 불자들이 집에서 조용히 앉아 부처님 말씀을 새겨가며 정진 할 수 있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그 덕분에
사업실패 후 무작정 경전 쓰는 연습1000일 기도회향…신이한 경험 느껴 내가 사경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년 전쯤이었다. 사업에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항상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커져 어찌 할 도리가 없을 때 즈음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사경. 처음에는 사경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마냥 부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읽고 쓰기 시작했다. 가만히 마음속으로만 하는 것보다 직접 글을 쓰면서 하면 나의 마음을 부처님이 좀 더 알아주실 것 같다는 생각에서 사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작하게 됐다. 1986년도에 시작한 식당 영업을 시작하기 전 일일장부 첫 장에 사십이수주진언을 일곱 번씩 사경하며 소리 내 염송하며 사경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라니 108독 15분 만에… 하루 3천독 100일 10만독 후 자신감-위신력 체감 가행정진을 거듭 할수록 내면의 힘이 세어진다. 독송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 독을 하는데 이제는 15분이면 족하다. 입으로 내는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함께 내 안에서 굴러가면서 염불삼매에 빠져 든다. 하루에 3,000독이 가볍게 이뤄진다. 하루에 3,000 독을 하고 나면 한량없는 성취감에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진을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10만 독을 돌파하였을 때에는 환희심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이 밀려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높은 길이었다. 힘든 길이었다. 그
잠자는 4시간 빼고 20시간 정진가행정진 후 환희심·희열 솟구쳐 나는 오랫동안 불자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시절을 살펴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하기 전에는 거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수준에서의 신행이었다. 남편이 잘되길 바라고 자식이 건강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기원하고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전부였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텅빈 법당에서 홀로 3000배를 하기로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배 절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 공덕의 힘으로 많은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 시기에 덕양선원을 알게 되었고 법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을 시작하였다. 독송목표는 100만 독으로 잡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10
4년 전 정림사에서 본격적 수행 시작몸 힘들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즐거워 날마다 절과 능엄주 기도를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겨우 할 수 있음을 알기에 주변 인연들이 못 마땅하다가도 조금씩 이해가 됐다. 정림사에서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연습해온 것이 있어서인지 불교 수행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물고기가 물 만난 듯, 힘은 많이 들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즐거웠다. 절, 능엄주 주력, 사경을 날마다 일과표에 동그라미를 치고 틈틈이 법문을 경청한지도 만 4년이 넘었다. 4년 동안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여러 번 바뀐 것 같다. 날마다 기도하기가 힘이 들어 어느 날은 울면서 하기도 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작은 마음을 갖고 인생살이 살기가 너무도 힘이 들어 세상을 외면하려 기도에 매달렸는지도 모
10년 전 능엄주·절수행…성격 극복집착 욕심 버리니 포용력, 이해 생겨 어느 날 법당에서 새 초에 불을 켰다. 심지가 새 것이라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심지의 불은 가물가물 흔들리며 꺼질듯 말듯 초 몸을 향하여 가는데 마치 꺼질듯 하던 작은 불꽃이 초를 만나는 순간 불꽃이 ‘우뚝’ 제 모습을 하고 여여하게 웃는 듯 보였다. 마치 애쓰고 기도하는 내 모습이 그곳에 있는 듯하다. 시댁이나 친정이 불교집안이라 일 년에 한두 번 절에 가곤 했었는데 10년 전 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스스로를 좁은 세상에 가두어 힘들게 살았는데 불교를 알고 절 수행을 접한 이후 그러한 욕구불만을 아마도 절을 하며 풀었던 것 같다. 108배, 300배, 500배,
매일 밤 다라니 21독-108배로 하루 회향매월 철야정진…항상 가족-주변에 감사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불을 밝히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21회 독송한다. 이어서 108배를 하고 관세음보살 3000 염송과 마하반야바라밀 독송을 한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공덕으로 원이 성취되고 바른 행을 하여 자비 보시할 수 있는 공덕자가 될 것”을 발원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주말을 맞아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일상에서 분주하기만 했던 내게 있어서 불교방송 포교사업팀을 따라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을 하는 시간은 어느새 내 삶에 없어서는 안될 감로수가 되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은 참회로 시작해서 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밤이 새도록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