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빚보증으로 전 재산 잃은 뒤21번 봉정암 오르며 자학하듯 고행 “스님, 앉는 자세가 특이하시네요. 왜 그렇게 앉으세요?” 처음 뵙는 스님께 나는 따지듯이 대뜸 질문을 드렸다. 그런데 그 스님 참 맘도 좋으시다.“보살님도 한번 이렇게 앉아보실래요? 이렇게 앉으면 참 좋습니다.” 결가부좌 수행법과의 첫 만남이었다. 버릇없다 꾸중 하실 법도 한데 오히려 한 수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고마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동안 나름대로 기도하고 참회한 공덕이 티끌만큼이라도 쌓여서 이런 수행을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지난부터 10년 전, 우연히 서준 친구의 빚보증 때문에 나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편 뒷바라지며 아이들 양육, 그리고
한때 욕심과 아상 가득했던 삶염불 후 ‘하심=행복’ 깨달아 그때 거울처럼 보이는 나의 마음은 사람을 대할 때 음탐심으로 끌어들였다 붙였다 하며 부와 명예가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고자 했던 욕심들과 상대를 존중하지 않은 행동과 말씨, 마음씨 그것이 내 인식의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이 꼴로 부처님 전에서 입을 열 수 없는 미천함을 보게 되었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과 마음 씀씀이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껴졌다. 내 자신의 무서운 용심의 세계를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 닦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이렇게 죄 많은 중생을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께서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아프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생각하면 일상생활을 대하는 마음의 태
중학시절 ‘금강경’ 읽고 한없이 눈물염불하며 가르침 실천하는 기쁨 느껴 중학교 2학년 시절, 집주변에 있는 절에 놀러갔다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게 됐다. 법당 안은 49재를 지내고 있었는데 누구의 49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스님을 따라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읽으면서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그때 당시에는 엄마 따라 절에 다녔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꼭 금강경을 꼭 공부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금강경 독송회에 인연 닿아 매일 금강경 7독과 정진하며 아상닦으며 마음 들여다보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그 사실을 양심으로나마 느낄 수 있지만 사실 금강경독송회에 가입할 당시만 해도 오직 나만 좋아지기 위해 부처님에게 다가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혜로운 삶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알아차림 하겠다 다짐하며 하루 시작 수행도 이제는 웰비잉이어야 한다. 길거리를 걷다보면 단전호흡, 명상, 요가 혹은 마음보는 수행이라고 적힌 간판이 많이 눈에 뛰는데 이는 요즘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으면 수행을 갈구하지 않는다. 괴로워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수행처를 찾는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 같은 번뇌를 안고 출가를 하셨다. 그러나 수행을 한다고 해서 다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시작한 것이 더 큰 문제를 만들 수도 있고 한없이 먼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수행도 수행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위빠사나 관련 서적 읽고 감동…수행 결심한국위빠사나선원서 심념처 수행에 주력요즘 들어 우리 입에서는 웰비-잉(well-being)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사는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좋은 음식,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다보니 과잉 영양, 오염된 먹거리, 환경오염, 건강 적신호 등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는 데서 비롯한 자중의 목소리로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다시 전원으로 돌아가 못난 과일과 벌레 먹은 배추를 반가워하는 등 반작용의 현상도 일어나고 있는데 이 또한 어느 의미에서는 다가오는 재앙을 조금이라도 피해보자는 또 다른 욕망일 것이다. 너무 지나치다보니 오히려 안 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 “마이너스 건강법”이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사실 웰비잉이란,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하며 매사에 중도를 지키며 산
도반 전화 한 통에 ‘벌떡’…누워서 철야정진멈추지 않는 정진 덕에 뚱뚱해진 기도 저금통 온 몸이 쑤시고 손가락도 가딱할 수 없을 만큼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방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못해 도저히 철야기도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나의 몸 상태를 아는 가족들은 옆에서 지켜보며 이러다 병나겠다며 오늘은 제발 절에 나가지 말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을 보니 되려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를 위한 정진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각 끝에 오늘은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누워있어도 잠도 안 오고 더 아프기만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들 수 없는 고통은 수행을 하며 몰려오는 잠보다 두배 이상 힘겨웠다.아파도 거기 가서 아파야한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누워서 끙끙 앓다가
석굴암 오르내리며 게으른 마음 다스려 7년간 매달 한 차례 ‘다라니’ 철야정진 오늘도 나는 기도의 밭인 오봉산을 오른다. 매월 셋째 토요일 밤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뚫고 나는 석굴암을 향한다. 산길을 더듬어 가노라면, ‘정진하며 작은 일들에 대한 정성을 쌓아가야지’ 하는 맘으로 오늘도 그렇게 석굴암으로 발걸음을 딛는다. 경기도 양주 오봉산 봉우리 중간 허리에 아담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봉산 석굴암은 서울보다 2~3도가량 기온이 낮아서 겨울엔 두툼하게 옷을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울이면 30센티 이상 쌓인 눈 때문에 발목까지 쌓인 눈에 푹푹 빠지면서 오르는 날도 있다. 석굴암은 여타 다른 절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다름 아닌 들어가는 절차가 다르다. 군사지역이라 일반인 출
한여름 땀 흘리며 100일…게으름 극복우곡선원서 정진 통해 스스로 운명 바꿔 곧바로 선원에 100일 정진 입재를 하고보니 8월 30일이 100일 정진 회향 일이었다. 그야말로 한여름 내내 수행을 하면서 더위와 싸워야 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한번 하겠다고 결심한 나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기에 비가 오는 날이나 무더위로 밖에 나가기 싫을 때도 선원을 찾았다. 기왕에 한번 시작한 정진, 가능하면 선원에서 하는 것이 올바르고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가기 싫어 ‘집에서 할까?’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 게으름을 극복해야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임을 느끼며 ‘그래, 선원에 가자’하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수행을 하는 동안 내내 ‘일이 생겨 중도에 못하게 되면 어쩌지?’하는 조바
시간 지나면 그 뿐…10년간 헛공부26년 공직생활 뒤 100일 기도 발원 어릴 적, 어머님이 초파일이면 항상 절을 찾고 새해가 되면 사찰 달력을 집에 걸어놓는 것만으로 나는 자연스레 불교와 가까워졌다. 특히 고향에 신라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단속사(斷俗寺) 라는 절 터 주위에 석가탑 모양의 동, 서 쌍탑(보물 72, 73호)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탑 주변은 늘 나의 놀이터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시간이 날 때면 10년 넘게 절을 찾아 법문을 듣고 조사어록과 법어집 등을 읽으며 스스로를 가다듬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소설책 보듯 흥밋거리로만 여겼을 뿐 올바른 수행을 이어가지는 못했었다. 경전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접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의 수양을 쌓고 그 속에서 좋은 말씀들을
사경하며 부처님 함께하는 환희 체험사경은 허영심과 자만심 버리는 수행 신라 백지묵서(新羅 白紙墨書) 대방광불화엄경 사성기에는 “사경을 하는 방법은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 생장(生長)시키며 닥나무가 다 자란 연후에는 닥 껍질을 벗기는 자, 연마하는 자, 종이를 만드는 자, 사경을 하는 자, 변상도(變相圖)를 그리는 자, 표구를 하는 자, 심부름을 하는 자 모두 보살계(菩薩戒)를 받아야 하며 재식(齋食)해야 하며 위의 사람들이 만약에 대소변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했을 때는 목욕을 한 연후라야 사경하는 곳에 나아간다”고 했다. 이토록 우리 조상들은 사경을 하는데 지극 정성을 다 하였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 뒤 고려 때의 감지금니의 화려하고 섬세하게 장엄한 장엄경은 우리 조상의 긍지이며 세계적인
만학의 길에 학위논문 주제로 사경 선택하루에 3시간 자면서 연구하고 수행실수 어느 여름날, 녹음이 짙게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간 곳은 전남 보성군 대원사였다. 집안에 크게 어려운 일이 생겨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처음으로 찾아간 대원사에서 현장 스님을 만났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은 주지 스님은 집안 사정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서예를 하는 내게 수행으로 사경(寫經)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음이 어지러웠던 그때, 내 마음은 사경보다는 염불이나 절을 하면서 그동안의 내 삶을 참회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스님의 권유를 조심스럽게 뒤로 미뤘었다. 10년 전 그땐 사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해서(楷書)로 쓰는 사경이 힘들고 따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서예를
3년 수행 후 부처님 호흡법 알아매달 삼 천배…틈나면 절하고 싶어 그 뒤 병원에서 검사 한 이후 병명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스님께서 전생부터 아팠던 습관과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 아프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셨다. 결국 나는 ‘나이롱’보살이 되었다. 가슴이 통증이 와도 이제는 두렵지 않게 되었고, 더욱 신심발심해서 정진하던 어느 날 호흡 수련에서, 아랫배 단전에 굵은 말뚝을 하나 박는 것처럼 묵직한 힘이 느껴지더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파란 하늘처럼 맑아지기 시작했다. 스님께서 머리가 맑아지면 피곤도 사라지고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되고,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하셨는데 체험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절, 독경, 염불
29세 상기병 앓은 뒤 다시 병 얻어매일 삼천배·염불…새로 태어난 듯 자수성가를 해보겠다고 밤낮으로 뛰어다니던 26살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 누군가에게 의지해야함을 느꼈다. 교회를 나가보았지만 적응이 되질 않았고 오빠의 인연으로 절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노력한 만큼 반드시 대가가 주어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희망에 부풀어 3년만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결혼을 하던지 사회생활을 하던지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고향과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떠나 온지 어느새 8년이 지났다. 아예 머리를 깎으려면 보내줄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절에 간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절대로 여동생을 먼저 결혼시킬 수는 없다고, 자식을 낳았으면 결혼을 시켜야 부모의 도리를 다
염불수행하며 매일 아침 108배와 좌선어느 날부터 온갖 소리가 염불로 들려수행이 이어지고 여러 경전과 글 등을 통해 불법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내가 어렵게 이 법을 만난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극락왕생의 뜻을 세워 열심히 정진해서 뜻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기도 때마다 극락왕생을 발원하게 되었는데, 극락왕생 발원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세상일에 마음이 채워져 있는 한 발원이 뿌리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일을 내려놓아야 할 것인데, 다 내려놓아 버리면 어찌 되는 것인가. 한편 걱정이 들기도 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염불하는 자를 결코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하였다. 광명 놓아 이끌어주시고, 관음보살님을 비롯해 여러 보살님들과 모든 하늘신
선용 스님 인연으로 정토선 수행 입문염불하며 출퇴근…“삶의 행복 느껴” 불법을, 그리고 정토선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0년 넘게 성당을 다니던 내가 불교로 개종한 것은 아들의 대학진로 때문이었다. 아이 진로 문제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궁리도 해보았지만 확신을 못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만난 한 사찰의 주지 스님을 친견하고 그 스님께서 해주시는 따뜻한 한마디의 말씀에 감동해 절을 다니기로 결심하게 됐다. 막상 절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무작정 옆 사람이 하는 대로 법회에 참석했고,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 반야심경, 금강경 등의 경전을 열심히 읽고 외우기도 했다. 그 무렵 우연히 불교서점에서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책 한권에 매료되었다. 그 책은
어둠 속에서 의지해야 할 것은 오로지 마음경험속에서 깨달음 의미 새기는 버릇 생겨 태백산으로 떠난 철야 야간만행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길을 법사님의 인도에 따라, 각자의 손전등에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체감뿐만 아니라 산행 도중의 좌선 시간을 통해서 온갖 사물을 보고 느낌과 의식을 만들어내던 ‘눈’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무력한 것일 줄이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모든 의식은 귀에만 쏠리게 되고 평소에 별 생각 없이 당연한 것으로 의존해 오던 눈이라는 감각 기관은 그저 꿈벅거리기만 했을 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 무기력한 기관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의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의지해야할 것은 오로지 자신에 대한 믿음뿐
삶의 허무-적응력 부족으로 마음고생봉화산 학바위에서 좌선…눈물 주르륵 오늘도 선원에는 목요일마다 열리는 정기법회에 참석한 도반들의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자리를 정돈한 후 삼귀의에 이어 법사님의 좌선 인도가 시작되었다. 날숨 3회로 좌중을 편안하게 이끄시는 법사님의 인도대로 내려놓기를 하던 중, 문득 살아온 모든 날들을 다 내려놓아 보자는 용감한 생각이 들었고 어렵지 않고 편안하게 선정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우곡선원에 오게 된 계기는 몇 년 전에 실시한 우곡 교원직무연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교원직무연수를 받던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삶의 허무에 더 익숙해져 있었던 때문인지 유독 세상살이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나는, 방학을 이용하여 기존의 사찰에서 실
매주 토요일-여름·겨울엔 1주일씩 철야화두 참구하며 죽음 공포 극복…마음 출가 첫 번째 일주일 철야정진 이후 2년간 철야를 하다보니 언제부터인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참선을 시작해서 1분 여가 지나면 시계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오직 화두만 들렸다. 처음으로 생각을 쉬어본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1초도 안 쉬고 생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는 화두를 받았는데, 지속적으로 철야정진을 하면서 마치 정해진 답처럼 ‘예리한 칼을 들고 쫓고 쫓을 새, 갈곳 없는 東山水上行이 내 집안 소식을 토하는구나. 산은 푸르고 물은 맑은데 할 일도 많았던 내 집안 일이 하나도 할 일 없는 그대로구나’하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자성자리는 특별히 나만 가지고 있
“향후 10년을 준비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청소년 단체로 발돋움 하자.” 파라미타청소년협회(회장 도후, 이하 파라미타)가 2월 3일부터 4일까지 충북 증평에서 정기총회 및 지도자 대회를 가졌다. 파라미타는 3일 오후 4시부터 대의원과 지도자를 구분, 정기총회를 진행하고 지도자 대회를 개최했다. 지도자 대회에서는 문화재 애호활동에 대한 특강 시간을 갖고 그 동안 각 지역에서 청소년 포교에 일익을 담당한 우수지도자 16명의 공로를 치하했다. 파라미타 회장 도후 스님은 “파라미타는 지난 10년간 연합캠프를 비롯해 문화재애호활동, 국제구호활동, 해외문화탐방 등 종단 내외의 관심과 지원 속에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었다”며 “과거의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종단에서 어린이, 청소년 포교 지원을 약속한 만큼 종단을 뛰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죽음 보고 공포백봉 선생님 첫 법문 듣고 생사해결 확신 초등학교 6학년 때 앞자리에 앉던 친구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 겨우 13살이었지만 친구처럼 병들어 죽거나 아니면 80까지 산다고 해도 죽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겁이 났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과학시간에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우주에 대해 배우면서는 죽음과 우주에 관한 생각만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고등학교를 가서도 마찬가지여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던지 삶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