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있던 건 다른 글이었다. 매체를 통해 조금, 아주 조금의 어눌함이 느껴지는 저 한국어를 들었을 때, 쓰던 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겹친다. 익숙지 않은 영어로 ‘우리’를 알리려 했던 그 해 5월 트럭 위 청년의 인터뷰가.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마지막 밤 시가를 돌며 애끓는 어조로 호소했던 그 여성분의 목소리가. 그해 그 계절, 푸른 눈의 이방인이 사투를 벌이며 카메라에 현장을 담지 않았던들, 목숨 걸고 탈출하여 그 필름을 세계인 앞에 내어놓지 않았던들, 그날의 우리는 영영 잊히고 묻혔을 것이다. 그래서 고개 돌려 바라
일찍이 미국을 중심으로 ‘커머셜 릴리젼(commercial religion')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극도의 개인주의가 일상화되어 있는 산업사회에서 종교의 자립을 위해 상업과 종교가 융합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런데 혹자는 이런 점을 악용한다. 종교가 지니는 지순성이나 청정함을 버리고 세속에 영합해 이윤 활동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교회나 사찰이 추구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다가와 있다. 종교적 감성마저도 상업성과 결부 지어 이용하려는 위험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종교의
어릴 적부터 나는 손목에 염주 팔찌 끼기를 좋아했다. 까닭은 모른다. 까까머리 시절, 어머니를 따라 어느 절에 갔었는데(영광 불갑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노스님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른쪽 손목에 나무구슬로 된 염주 팔찌를 끼워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노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염주 팔찌를 항상 끼고 다녀라. 언제가 너에게 좋은 인연이 될 것이다.”그 말씀과 염주 팔찌가 씨앗이 됐을까. 어떻게 어떻게 살다보니, 그리고 ‘눈뜨고’ 보니, 어느 날 내가 승려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내가 불
작년 후덥지근한 여름을 지나갈 무렵의 일이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평범한 40대 직장인 신도 한 분이 주식투자에 대한 고민을 상담해온 적이 있다. 자신의 주변에서 평소 주식을 하지 않던 사람들도 어느 회사의 주식을 지금 사야 한다며 대출을 받아서라도 투자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주식에 관한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기에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도 한다더라는 말이 들려오고 언론에서 연일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업무시간 내내 주식시세를 보게
2021.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앞으로 함께 할 한 해를 내다보며 조촐하나마 새해에 소망하는 것들을 적어 본다.새해에는 일터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일 없이 안전하기를 소망한다. 지난해 대한민국에서는 882명의 노동자분들께서 산업재해로 돌아가셨다. 하루 평균 2.4명의 인원이 생계를 위해 일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새해가 한 달여 지난 지금 여전히 동탄의 물류센터에서 여수와 광주의 사업장에서 참담한 부고가 전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한다. ‘과로사’라는 말은 형용모순이고, 작업장에서의 생명안전
“사마 외도도 불성이 있기 때문에 공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극단적인 공경을 주장한 스님이 있었다. 삼계교의 창시자 신행 스님이다. 그는 중국 수나라 때부터 당나라 초기에 걸쳐 활동했다.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항상 누구나 공경한다는 의미)보살을 닮고자 평생 노력했다. 일체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에 그들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구체적인 실천행이 요즘의 자원봉사운동과 유사한 무진장운동이다.새삼 신행 스님을 언급한 것은, 작금의 한국사회가 너무 메말라가는 것이 아
얼마 전, 죽음을 목전에 둔 어느 노문화학자가 ‘눈물 한 방울’을 떨구었다고 한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며 스스로 영정사진도 찍었다 한다. 지인들 앞에서 (췌장암 투병 중인) 그분이 떨군 ‘눈물 한 방울’은 행복의 눈물이었을까, 고통의 눈물이었을까. 희망의 눈물이었을까, 회한의 눈물이었을까. 그분이 떨군 ‘한 방울의 눈물’처럼 행복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이다. 뒤집으면 고통이지만, 되돌리면 행복이다. 행복이 행복인 것은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통이 있기 때문에 행복인 것이다. 행복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천으로 이
매년 한해의 끝자락에서 대학교수들이 우리사회를 돌아보며 사자성어를 선택해 발표한다. 올해도 2020년 경자년(庚子年) 한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했는데 바로 ‘아시타비(我是他非)’라는 신규 성어를 선정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이 사자성어를 처음 들었을 때 공감과 동의보다 약간의 걱정과 작은 아쉬움이 먼저 들었다.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택한 분들의 마음은 경자년 한해 우리 사회 모순된 현상들을 이 네 글자로 표현하여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로
연말인데도 한 해를 잘 보냈다고 하는 뿌듯함도 없고 새해에 대한 벅찬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너무 오래 세상이 아프다 보니 움츠린 자세를 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과 정면대결하면서 병을 치유하고 예방하는데 불철주야 애쓰는 의료진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눈물 나게 고맙고, 백신과 치료약을 개발해 내는 과학자들이 무척이나 위대하게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아파하고 애쓰는데, 내가 아프지 않다고 해서 그저 편할 수는 없다. 이 아픈 세상을 직접 변화시키는데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기본적으로
예년보다 따뜻하다 싶더니 첫눈이 온 뒤 포근한 행복에 젖을 틈도 없이 영하 10도를 밑도는 매서운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겨울 날씨야 이렇게 코끝이 찡하고 손끝이 아릴 정도의 추위가 되어야 그 맛이 나는 것이 아닌가! 상대적으로 무더위에 약한 나는 여름보다는 그렇게 맵싸한 추운 겨울이 좋다. 그러나 올해 코로나19 사태는 그 추위 못지않게 우리에게 공포심 가득한 겨울을 보내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섰고 미국 등 유럽의 뉴스는 연일 눈을 휘둥그러지게 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주춤할거라든지 겨울이 되면 나
왜 지연됐을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말이다. 알다시피 이는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에 대해 사업주에게 그 책임을 물어 처벌을 강화하는 법이다. 2020년 이와 관련한 몇 개의 법안이 상정되어 대기 중이다. 정의당과 민주당 그리고 국민의힘에서 모두 발의하였다. 조금 복잡하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자.제일 먼저 발의한 정의당의 안은 ‘①사망사고 시 사업주에게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상 10억원 이하의 벌금 부과 ②손해액 3배 이상 10배 이하의 배상 책임 ③감독 권한 공무원 처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민주당에서 발의한 안
테스형이 ‘죽어도 내일은 오고야 만다’더니 올해 달력도 기어코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12월은 왠지 아쉽고 뭔가 허전하다.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2020년은 일 년 내내 너무 소란스러웠다는 기억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호흡기질환인 코로나19의 충격이 워낙 컸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작금과 같은 볼썽사나운 모습들은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수선하다.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기사와 승객들 사이에 벌어진 마스크 시비를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