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자리에는 부산불교계를 대표하는 분들이 모두 모이신듯합니다. 사실 제 고향이 부산 범일동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님들이 이곳으로 피난 오셨다가 저를 낳으셨습니다. 저는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했고, 해직 기자이기도 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산중으로 숨어 다니던 시절에 부처님 법을 만나 중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모태신앙의 가톨릭 신도였습니다. 오늘은 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생각·행동 몸에 입력 돼 80년대 한창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 가운데 물고문이 있었습니다. 그 물고문이라는 것이 머리 위에 링거 병 같은 것을 매달아 놓고 이마 위로 물을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지요. 처음엔 그
좋은 날씨입니다.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면 우리 마음도 화창해집니다. 우리 몸 자체가 자연의 일부분이므로 대자연의 상태에 따라 몸도 자연히 공감하기 때문입니다.온 천지간에 꽃입니다. 봄기운이 사방에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이런 때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꽃 멀미’를 앓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을 이룹니다. 꽃이 없는 봄을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꽃 없는 봄이 온다면 그것은 봄일 수 없습니다.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에 꽃다운 요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무심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만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습
조계사 동자스님들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예방했다. 4월 24일 오전 10시 총무원장 스님을 예방한 동자스님들은 제법 위의를 갖춘 의젓한 자세로 총무원장 스님께 합장 인사를 올렸다. 동자스님들의 예방을 받은 지관 스님은 “부모님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동자스님들께 질문을 던졌고 10명의 동자 스님들은 큰 목소리로 “말씀 잘 듣겠습니다”라고 합창으로 답변을 올렸다. 하지만 삭발수계한지 이제 겨우 나흘째인 동자스님들은 지관 스님이 선물로 나눠준 과자와 음료수에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등 천진불의 모습을 보여 주변에 웃음을 선사했다. 동자스님들을 인솔하고 총무원장 스님을 예방한 조계사 주지 원담 스님은 “동자스님들은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큰 스승”이라며 “동자스님들
유대인들은 2차 대전 막바지에 이르러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600만 명이 나치즘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가스실에서 죽어 나가는 동포를 보면서도 당장 이 순간 자신들을 구원해주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필사적으로 기도를 했으나, 결국 야훼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불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크메르루주 군은 킬링필드(Killing Field)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던 캄보디아 불자 3백만 명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그들을 어떻게 해 주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절에서는 기도를 하면 부처님이 다 들어줄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관세음은 극락 인도하는 보살『법화경』에는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부르면 모든 고통과 인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관세
생명나눔실천본부(이사장 일면 스님)가 4월 11일 오전 11시 생명나눔실천본부 사무실에서 3월의 환우 이훈(36) 불자에게 수술비 300만원을 전달했다. 이 씨는 만성협착성심낭염과 간경변, 폐충혈, 심부전 등 합병 증세로 심장수술(개심술)이 필요해 지난 1월 고대구로병원에 입원했지만 폐에 대한 수술이 시급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수술비 300만원이 없어 수속조차 밟지 못한 실정이다. 이 씨는 지난 2월 고대구로병원에서 “수술 외엔 방도가 없다”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해 현재 집에서 방문 치료를 받고 있다. 생명나눔실천본부는 “이 기금이 폐수술이 절실히 필요한 이 씨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에 수술비를 전달받은 이 씨의 보호자는 “다들 사정이 어려운데 이렇게 수술비를 마련해 주셔
저는 오늘 쉽고 웃음만이 가득한 법문을 하려고 합니다. 어려운 이야기야 들을 기회가 많겠지요. 우리 주변에는 좋은 경전도 있고 훌륭한 학자들도 많습니다. 법문을 하시는 스님들도 ‘도(道)’며 ‘마음공부’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려운 이야기들이지요. 근기(根機)가 높은 분들이야 단박에 깨닫고 무릎을 치겠지만, 대다수 불자들에겐 그림 속에 보석입니다. 불교는 참으로 어려운 난해한 종교입니다.제가 쉬운 법문을 하겠다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너무 쉽다보니 웃음이 절로 나겠지만 어쩌면 이런 법문이 진짜 법문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말로 눈높이 법문이라고나 할까요.지성이면 감천여러분, 들어보셨겠지만 우리말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지극 정성으로 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未生之前誰是我)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누구인가. (我生之後我是誰)자라나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내라 더니 (長大成人裳是我)눈 한 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누구던가. (合眼朦朧又是誰)중국 청나라 세 번째 황제인 순치황제가 출가하며 세상에 내 보인 게송 중 일부입니다. 이른바 ‘순치황제의 출가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떠올리게 하는 게송입니다.오온경계에만 집착우리는 어머니 태중을 빌려 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 전에는 누가 나였겠습니까? 인연을 다해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 때의 나는 누구입니까?‘이 뭣고’화두와 함께 순치 황제의 게송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맛보고자 합니다.모든 중생들이 이 생 한번 멋지게 잘 살아보겠다며 삶의
‘선’(禪)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눈을 통해 본다 하지만 마음 없이는 볼수 없습니다. (주장자 들어 보이며) 이것은 물질입니다. 그러나 마음 없이 볼 수 없으니 이것(주장자 들어 보이며) 또한 마음입니다.이 한마디에 알아들었다면 선의 정수를 보았다 하겠습니다. 주장자와 마음을 나눠 놓고 분별하며 보려 하는 사람은 영겁이 지나도 ‘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주장자를 보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 주장자와 보는 사람의 마음이 따로 있는 한 선은 저 허공에 있을 뿐입니다.생로병사 거스를 수 없어나타나는 세계와 그 세계를 보는 주체가 둘이 아닌 자리, 바로 그 자리를 일컬어 우리는 선이라 하고 불법(佛法)이라 합니다. 여기서 불(佛)은 마음이고 법(法)은 물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장자를 세 번 치고 대중에게 들어보였다.) 종사가 자리에 앉기 이전에 벌써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제이두(二頭)에 떨어짐을 면치 못합니다. 주장자를 들어 보일 때 계합(契合)했다면 중근기의 사람이라 옳지 못한 것이며,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대중에게 묻고 답할 때 계합했다면 하근기의 사람입니다. 법문 듣는 순간 계합해야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대중은 어느 근기에 머물러 있습니까? 세 가지 근기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평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것입니까? (양구후에 주장자를 내리친 후에) 두꺼비가 범천에 뛰어 오르고 (蝦跳上梵天) 지렁이가 동해 바다를 곧장 지나감이로다. (蚓驀過東海) 여기서 여러분은 바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알지 못한다면 그분을 위해서
정관 스님은 “수행하는 궁극의 목표는 신통이 아니라 도(道)”라며 “방하착을 통해 평상심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인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해인사에 가야만 좋다고 합니다. 통도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통도사에 가야만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적응하고 그 때 그 때 불평 없이 상처 없이 지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지옥도 극락으로 변합니다. 옛날 큰 스님들 계실 때는 경제가 참으로 궁핍했습니다. 한 겨울 나무를 때도 마른 나무가 없어 젖은 나무로 군불을 지피다 보니 연기 속에 눈물 흘리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방이 너무 뜨겁고, 어떤 때는 너무 차 시자노릇 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당
3·1절은 한국 민족과 국가의 거룩한 기념일입니다. 이런 소중한 날에 저 같이 코 큰 서양인에게 기념법석을 열어주셔서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게 3·1절은 스승이신 숭산 스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제가 아는 3·1절은 바로 숭산 스님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스님을 통해 3·1절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스님은 평양 출신입니다. 남한 땅에서 실향민의 삶이 그렇듯 스님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참혹한 시절이었다고나 할까요. 가끔 당신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는데 그때를 반추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합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 한국말도 한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일본의 글과 말을 써야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올레 니달 라마는 “보는 사람,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모두가 하나이며 전체의 부분일 뿐”이라며 “이를 체득한다면 깨달음에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는 티베트 불교의 하나인 카르마 까규파를 대표하는 라마입니다. 오늘 이곳을 찾은 여러분들은 불교를 수행하는 불자들로 알고 있는데, 과연 서양 사람이 불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이 법회에 참석했을 겁니다. 현재 카르마 까규파를 비롯해, 티베트 불교는 흥미로울 만큼 전세계에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로 서양에 동양 문화가 혼합되면서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서양에 있으면서 동양의 문화를 접했고, 그 가운데에서도 티베트 불교를 접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법문을
부처님 마음은 얼마나 맑고 고요한 것일까. 우리도 마음이란 게 있지만 깨달으신 분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으십니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귑니다. 망울 튼 버들가지는 싱그럽고 시냇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갑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들은 봄나물을 뜯고 있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런 광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이 있으면 물을 보고 꽃이 있으면 꽃을 본다는 것. 이게 바로 공적영지(空寂靈知)입니다. 이 자리가 본심(本心)의 자리인 참 마음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산에 올라가서 연 초록색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작년 한 해가 지나가고 병술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병술년을 맞이한 지 다섯 째 날입니다. 아직 나뭇잎은 보이지 않지만 내일 모레면 입춘입니다. 땅 밑에서는 더운 기운이 조용하지만 힘차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이 순간, 나무는 땅의 기운을 받아 잎을 피우려 약동하고 있습니다. 꽃도 아직 피지 않았지만 작년에 피었던 가지에서 다시 피려는 용기를 품고 있습니다. 만물과 함께 지난 해의 삶을 성찰하고 금년에 지어갈 삶의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진정한 정초기도 입니다. 자만하면 道 못 배워 부처님은 우리 중생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조목조목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은 몇 가지만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호귀학도난’(豪貴學道難)이라 하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영웅호걸이나 돈 많은 사람들은 도
청아 스님은 법석에서 “나를 다스려 나를 변화시켜야 부처님을 닮아가는 참 불자”라고 강조했다. 어느 날 고개를 들어 문득 파란 하늘을 쳐다보거나 혹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일상의 모든 것이 퇴색되어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언제가 한번쯤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의문들이 불쑥 찾아 듭니다. 나는 무엇인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몸을 맡기고 이렇게 살아가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삶 속에서 삶의 목표는, 삶의 의미는 과연 얼마나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을 어찌 알며, 자신도 모르는 남이 어찌 나를 알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평화롭게 끝나는가? 아니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이러한 모든 의문이 잔설
지현 스님은 “자등명 법등명에 담긴 부처님 뜻을 마음에 새길 때 진정한 불자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늘은 마음을 다스리는 보약인 무제 대사의 심약방(無際大師 心藥方)을 준비했습니다. 무제 대사는 당나라 석두 희천 스님입니다. 무제 대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집안을 잘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도를 배우고 자신을 수양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내가 처방해주는 열 가지 맛의 미묘한 마음의 약을 복용하여야 바야흐로 뜻을 성취할 수 있다.” 석두 희천 선사의 心藥方 첫째는 좋은 창자 한 가닥(好腸一條)이라 했습니다. 남의 어떤 말이나 행동도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웃으면서 잘 받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불법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며 집안과 나라를 다스릴
보현행원품 ‘청전법륜’(請轉法輪) 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남자야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불찰 극미진수(極微塵數)의 모든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하실 때와 또한 모든 보살과 성문 연각인 유학 무학과 내지 일체 모든 선지식에게 두루 권청하되 “열반에 드시지 말고 일체불찰 극미진수 겁토록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여 주소서”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권청(勸請)은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청전법륜이란 법을 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법은 청해서 들어야 합니다. 어떤 법
성스러움은 세속적 삶의 현장과 함께 존재 『기신론』 저술은 진속 집착 해결 위한 방편 「화엄연기회권」 중 원효와 의상이 헤어지는 장면. 무덤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후 원효는 신라로 발길을 돌리고 의상은 당나라를 향해 홀로 떠났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의 현실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원효는 “그 어떤 상황에도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애의 몸짓은 대중 교화를 위한 유희신통(遊戱神通)이기도 합니다. 원효가 “유희신통으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신통은 헤아리기 어렵고, 묘용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찬양했습니다. 물론 진실한 마음에 바탕 하지 않은 무애행이란 방종이고, 파계입니다. 그러나
동대병원 “사망하거나 치명적 장애 올수도” 천성산연석회의 “대법원 바른 판단 해주길” 지난 1월 5일 동국대학교병원에 입원한 이후 지율 스님이 처음으로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16일 오전 병실에 취재진을 들인 지율 스님의 몸무게는 28.3kg에 불과해, 입원 당시 31kg보다도 2.7kg 줄어들었다. 피부에서는 수분 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바싹 말라붙었으며 몸 어디에서도 살점이라는 찾아 볼 수 없어 앙상한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다. 지율 스님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1월 5일 안동 토굴을 나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이후 10여일 만에 처음이다. 불교계와 시민종교계의 35개 단체들로 구성된 ‘천성산대책위·천성산을 위한 시민종교단체연석회의’는 이날 오전 지율 스님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량주를 하시나니 이른바 상주 대비에 주하신다. 모든 불사를 지으심에 주하시며, 평등한 이 뜻으로 정법륜을 굴리는 데 주하시며, 불사의한 일체 불법에 주하시고, 청정한 음성으로 무량한 국토에 두루하심에 주하시며, 말할 수 없는 심심한 법계에 머무르시며 일체 최승 신통을 발현하시는데 주하시며, 필경에는 장애가 없는 법에 주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이 ‘상주 대비에 머무르신다’는 말은 대자대비에 머무르신다는 뜻입니다. 대자대비가 이뤄지는 순간 부처님이 나투신다는 말이므로, 이를 다시 말하면 대자대비를 발현하는 순간 그 당사자는 중생이 아닌 부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보살펴주면 여러분들은 중생에서 부처로 전환됐음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