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독송할 때면 눈물이 ‘주르륵’ 애착-탐욕 없애나가는 게 삶의 목표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라는 종교를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 소개돼 있는 불교대학을 찾아 등록을 하고 기초교리부터 배우고 난 후 2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경전 전문반에서 공부하고 있다. 경전 속에 시설되어 있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초입에서 만난 업설을 받아 지니면서 나는 비로소 나의 업을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거듭해 오는 동안 쌓였을 업의 높이와 두께를 감히 짐작이나 해볼 수 있을까. 금생에 지은 업만도 얼마나 많은데…. 사람으로 태어나 일생을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의 여부는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업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가
한글경전 시대를 열어준 스님 부처님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진지 어언 1600여년이 지났건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해 놓은 ‘팔만사첨 법문’은 ‘팔만대장경’이라는 한자(漢字)의 감옥에 갇혀 지내왔다. 우리말 우리글이 있으되 부처님의 경전이 한자의 감옥 속에 갇혀 있으니, 자연 불경은 물론 민초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불교는 ‘배우기 어렵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한문투성이’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세납 74세의 나이에도 운허 스님은 도선사 석불전에 올라 14일 동안 '역경불사 원만회향'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大雄殿’ 대신‘큰법당’ 민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답답함을 절감한 백용성 스님이 1920년대에 불경의 한글화 작업에 착수했고, 그
어릴 때 ‘기복불교’ 보며 미신 간주 불교방송 들은 뒤 매일 금강경 독송 한 배 한 배 절을 한다. 온 몸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마다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갖가지 욕심들로 뭉쳐진 커다란 덩어리의 한 귀퉁이가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108배의 참회기도를 마치고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심호흡을 몇 번 하고난 후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 신 새벽 거실에 울려 퍼지는 소리.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내가 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대여섯 살 무렵, 할머니를 따라 갔던 절에서였으니 45~46년 전쯤의 일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할머니를 통해 만난
집중정진 후 큰 진전…잠잘 때도 觀 수행하며 가정화목…대자유인이 꿈 다른 여러 일정이 있어 바쁘신 와중에도 붓다락키타 스님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각각 1시간 30분씩 법문해 주시며 정성을 다 해 수행 지도를 해 주셨다. 처음엔 몸에 붙지 않아서 그런지 중노동하다 몸살 하는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고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고 했는데 십 여일이 지나자 점점 나아지더니 나중에는 앉아서 잠깐 눈 감고 있으면 누워서 잠자는 것보다 몸이 더 빨리 풀렸다. 선원에서는 하루 1시간 30분씩 하는 수행이었지만 스님의 법문을 듣고 꾸준히 해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늘 날마다 진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며칠씩 똑같은 것만 관찰되어지기도 하고 그럴 때는 답답하고 늘 새롭고 미
희한한 한약 된장국 대중공양 1962년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 부산 범어사 청풍당에서는 때 아닌 된장국 소동이 일어났다. 아침 공양에 모든 대중들이 함께 먹는 된장국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된장국 맛이 왜 이 모양이지?” “글쎄 말이야. 된장국에서 웬 한약냄새가 나는 거지?” “가만 가만. 이거 된장국 안에 한약이 들어 있잖아? 자 보라구. 이건 감초, 이건 당귀, 아이구 이거 된장국에 시레기 대신 한약 찌꺼기가 들어갔잖아?!”아침공양을 막 시작하려던 대중들 사이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된장국에 시레기는 들어있지 않고 한약찌꺼기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봐 갱두, 자네 어떻게 된 거야? 조실 스님 아시면 자네 쫓겨나게 생겼네” 사찰에서 국 끓이는 소임을 맡은 사람을 갱두라고 부르
권태-번민 밑바탕서 수행 시작 경행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 발견 아주 어렸을 적 나는 늘 생각했었다. 난 누구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저 해와 달과 별들이 무엇 때문에 빛나는지를… 또 한때 나는 이 세상에 가짜는 없고 다 진짜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농담은 잘 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진지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 어느 날, 내게 일어난 두 가지 일은 내 삶을 바꾸어 놓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하나는 광주사태 혹은 광주항쟁이라 불리는 역사적인 일을 겪었을 때와 또 한 번은 어느날 한 아주머니가 파 한 뿌리 무 한 개를 들고 가는 평범한 모습에서 받았던 초라한 인간상과 삶의 비애였다.
1. 불교의 근본진리인 연기(緣起)를 생멸(生滅), 거래(去來), 일이(一異), 단상(斷常)의 대립을 넘어선 팔불(八不)으로 해석하여 어떤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모든 것을 철저히 부정 타파하고, 이러한 공성(空性)이 바로 연기(緣起)라는 사실을 밝힌 논서는? ① 「중론」 ② 「회정론」 ③ 「대지도론」 ④ 「백론」 2. 용수 보살의 저서로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이면서 대승불교의 종합 정리한 책으로 불교 백과사전의 형태를 띠고 있는 논서는? ① 「대지도론」 ② 「십주비바사론」 ③ 「성실론」 ④ 「구사론」 3. 초기대승경전 성립이후 6~7세기경까지 성립된 중기 대승경전의 특징이 아닌 것은? ① 중기 대승경론으로 유식계통의 경전군과 여래장계통의 경전군이 있다. ② 대승초기 경전
초기경전과 팔리 주석문헌(청정도론 등)에 나타난 수행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다양한 수행법을 크게 나누면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으로 나누는 것이 초기 및 남방 상좌불교를 포함한 불교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사마타 수행이란 4색계선과 4무색계선을 닦는 것으로 5신통 등을 얻는 이익이 있다. 위파사나 수행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에 대한 통찰을 통해 열반을 얻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청정도론 근거로 지도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는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 방법은 전통적인 남방불교 수행론에 대한 해설서로 유명한 『대념처경』과 『청정도론』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마타 수행법에 대해서는 『청정도론』의 40가지 수행주제에 근거해서 지도하고 체험하고 있다. 40가지 수
경전 쓰다보면 번뇌 절로 소멸 피 뽑아 쓰듯 한 사경 77점 전시 하룻밤 꿈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불교경전이 어느 순간 내 삶의 전부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경에 집중했다. 경전을 쓴다는 게 참으로 묘해서 언뜻 작은 글씨에 한 없이 답답할 것 같지만 실제 쓰면 쓸수록 환희심이 샘솟고는 했다.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이 내 손끝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속됨을 버려야 하는 사경의 세계는 한없이 광활해 보통의 노력으로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기만 한 경지였다. 나는 부처님께 끝도 없이 절했다. 나를 낮추고 낮추어 마침내 나조차 없어질 때 비로소 글씨가 성스러움 자체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반야심경』,『법화경』,
밥 대신 죽, 김장독엔 소금 1950년 겨울, 한국전쟁이 한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피난지 부산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 보루로 남은 부산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모여든 때문이었다. 상기된 제자를 직접 업고 제자 고향으로 가는 동산 스님의 모습은 숭고한 '자비'로 다가온다. 마지막 피난지 부산으로 모든 피난민이 모여들자 먹을 것, 잠잘 곳이 턱없이 모자랐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모든 백성들의 형편이 아사직전에 이르니 사찰의 형편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왜색 대처승들이 사찰의 운영권을 손에 쥐고, 청정 독신 비구승들은 대처승들로부터 양식을 얻어먹고 사는 지경이었으니, 부산 동래 금정산 범어사의 선방인 청풍당의 살림도 말씀이 아니었다.
필자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연구의 일환으로 태국과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의 수행처를 방문하며 수행법에 대한 조사를 한지도 8년이 넘었다. 당시 방문했던 곳의 대부분은 본지를 통해서 소개하였고, 지금은 한 번도 만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 스승과 수행처를 소개하고 있는 형편임을 독자들은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이번에도 만난 적도 없는 스승을 소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글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무엇인가 잘못 소개하고 있는 곳이 없는가 점검하여 혹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경책해 주기 바란다. 청정도론 수행법 고수 미얀마의 수행처를 조사할 때, 양곤을 중심으로 필자의 이해의 역량하에 여러 수행처를 다니고 스승들을 통해 직접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미얀마의 경우는 대부분의 수행전통의 중심도량이나
70년대 말 경찰생활하다 서예가로 10년 전 신비한 꿈꾸고 사경 시작 내가 붓을 잡은 지도 어언 30여년. 시인은 시에 갇혀 살고 소설가는 소설에 갇혀 살 듯 나는 붓에 나를 가두고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한 글자 한 글자 뼈를 깎아내듯 온갖 노력을 기울여 쓰고자 했고 또 때로는 희열에 젖어 글씨를 써 내려갔던 깨알 같이 많은 시간들. 번뇌를 덜어내기 위한 그 지난한 세월의 편린들을 모아 이제 곧 사경전시회까지 열게 됐으니 그 감회를 무어라 표현해야 될까. 내가 서예를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였다. 청원이 고향인 나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자라 나중에는 경찰관이 됐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도 늘 무언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지나가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계에서 근무했던 탓에
백봉 거사와의 만남으로 수행에 박차 일년에 두 번 ‘7일 철야정진’ 십년째 대전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봉 선생의 책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늘 큰 스승의 가르침에 갈증을 느끼던 나는 백봉 선생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소문 하고 다녔지만 인연이 아닌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79년 부산에 내려가 며칠 묵을 기회가 생겼다. 백봉 선생이 부산 보림정사에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나는 부산에 내려가자마자 전화번호부를 뒤져 보림정사를 찾아 전화를 걸어 백봉 선생을 만나게 해 달라 간절히 부탁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아침 마치 꿈만 같았던 백봉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백봉 선생은 나에게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현문과 우답이 몇 차례 오가고 나서 백봉 선생은 “
Q : 보임(保任)이란 무엇이고 왜 하는 건가요? A : 보임(保任)은 보호하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돈오를 얻은 사람이 일상사에서 혹시라도 마음이 유혹될까 조심하여 자성을 보호하는 것이고, 또한 행하고 일하고 걷는 것 등을 자성불에게 믿고 내 맡기면서 부처의 행을 익히는 것입니다. 원오(圓悟) 스님은 『심요(心要)』에서 ‘심(心)중에 한 물건도 남아있지 않으면 바로 목석과 같은 무심인(無心人)이 된 듯하여, 우치하고 둔한 것과 같아서 특별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기르고 길러서 생사를 관하되 심히 일없는 한가로운 것과 같아 문득 조주, 남전, 덕산, 임제와 더불어 동일한 견지에 서야 되니, 간절히 스스로 보임(保任)하여 이 무생무위(無生無爲)의 대안락한 경지에 머물도록 해야 하느니라.’
형과 아우 죽음 이후 참선 수행 시작 헌책방서 찾은 백봉 선생 책에 감화 61년. 아홉 살 되던 해였다. 동생이 아프다며 징징대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다녀온 날. 여느때처럼 가방만 내팽개치고는 해가 저물도록 밖에서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동생이 죽은 것이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리 없는 나이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는 것이 분명 슬픈 일이었고 함께 장난칠 동생이 없어졌다니 나에게도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 두 살 터울의 형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던 형제들이 차례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Q:오매일여(寤寐一如)를 얻어야만 깨달음이 가능한가요? A:그렇지 않습니다. 오매일여는 깨닫지 못한 수행자가 점진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한 현상일 뿐이지, 누구든지 꼭 이런 과정을 거쳐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6조 혜능 스님은 아직 스님이 되기 전에 단지 홍인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한번 듣고 깨달았으므로 육조단경에 오매일여에 대한 말이 없고, 3조 승찬 스님이 혜가 스님을 만나서 깨달을 때도 역시 말끝에 즉시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 오매일여를 성취한 후에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승찬 스님이 오매일여를 얻어서 깨달은 것이라면 신심명에 그런한 구절이 있어야 하는데 신심명 어디를 찾아보아도 오매일여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또한 영가 현각 스님은 육조스님에게
몽골에서의 사불전시회로 수행에 박차 부모 은혜 되새기며 독거 노인 보살펴 2002년 첫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을 완성하느라 눈 코 뜰새가 없었다. 아이들 준비물 챙겨주는 것을 깜빡 잊기도 하고 남편 와이셔츠 다리는 일을 잊어 아침에 허둥대기 일쑤였다. 그러니 식구들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회장에 걸린 작품을 보고는 내 열정을 인정한다는 듯 아이들과 남편이 환한 얼굴로 꽃다발을 건넸다. 지금은 예전처럼 그림그리는데만 몰두하지도 않지만 식구들도 나의 수행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덕에 수행이 우리 가족을 하나로 맺어주는 효자역할을 한다. 전시회는 가족들과의 화해 뿐 아니라 나에게도 크나큰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 특히 지난해 여름에 대한불교진흥원에서 개최한
Q:오매일여(寤寐一如)란 무엇입니까? A: 화두수행하면서 간절히 공을 들이면 어느 날 자동으로 화두가 들리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단계는 화두와 친해져서 평상시 생각이 화두이고 화두가 곧 마음이 된 상태입니다. 자동으로 화두가 들리는 단계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간절한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은 마음을 쉬어 동요하는 마음을 근절하게 하려는 수행입니다. 동요가 쉬면 만물의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인데, 막상 마음을 쉬려하면 오히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더 망상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되므로 그 번뇌하는 마음을 중지시키고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가 의심이 안되고 다만 관(觀)하기만 하면 알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므로 화두의 답도 나
화재로 아버지 잃고 생사의 갈등 사불 전시회 통해 가족들과 융화 사불수행은 서예를 즐겨 하시던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응용미술을 전공한 나는 그림 그리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있는 그림을 따라서 그리는 것쯤이야 하는 생각에 처음엔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을 느꼈고 여느 미술 못지않게 정성과 창의력을 깃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사불을 더욱 극진한 마음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95년 11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숨을 쉴 수조차 없이 독한 연기가 방 안 가득 들어찼다.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였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그 때 나의 어
수행카페 회원들과 매월 백련암서 삼천배 능엄주 외니 두통없이 청명-꿈에도 하심 미숙아를 업고 다니며 8년을 아비라 기도에 참여시키는 엄마, 시각장애로 눈이 보이지 않아 책을 통째로 외우는 사람, 남편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삼천배를 시키며 날마다 참회기도를 하는 사람. 세상엔 참으로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았다. 온라인 카페로 만난 도반들과 매월 백련암에서 삼천배를 하고 또 아비라 기도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다들 나보다 힘들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 도반들 덕에 더욱 정성껏 삼천배를 하고 아비라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내가 삼천배를 할 때마다 범상치 않은 꿈을 꾼다는 것이다. 지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