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자꾸 염불하라고 하는데, 지금 제가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중에 한가하면 수행하지요. 그리고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왕생 한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말과 같이 가능할까요? 사람의 됨됨이는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염불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이, 막상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이 될 턱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누리고 살던 모든 것을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런 상황이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보다 무서운 때가 어디 또 있었겠습니까? 그 어떤 경험이나 지식으로도 감당하지 못하기에, 오직 공포에 찌들어 죽어갈 뿐입니다. 당연히 몸뚱이나 가족이나 명예
사불수행은 내 마음 비추는 거울 늘 웃는 부처님 그리려 마음수행 “보살님, 부처님이 절에만 계신답디까? 보살님 집에 부처님이 넷이나 있고 보살님 안에도 부처님이 또 한 분 있는데 날마다 이렇게 절에만 오면 집에 있는 산 부처들은 어찌 합니까?” 절에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짓는 게 일상이었던 내게 이 한마디가 나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20년 넘게 동고동락한 시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적막함과 누추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부처님을 마음의 도피처로 여기고 날마다 절에 가서 공양간 설거지를 돕고 법당 청소며 화장실 청소, 도량 청소를 하면
태국 남부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원이 없다. 다만 70 여년 전에 한 비구에 의해서 창설된 숲속의 수행도량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해탈의 정원’이라는 의미의 수안 목(Suan Mokkh)이다. 필자는 1995년 12월 19일에 남부의 수랏 타니(Surat Thani)의 차이야(Chaiya)에 있는 수안 목을 방문하여 조사한 적이 있었다. 아찬 붓다다사가 입적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찬 붓다다사가 수안 목에서 펼치려고 했던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찬 붓다다사 스님은 고독하고 엄격한 수행을 하면서 경·율을 연구한 후 불교개혁을 시도했다. 아찬 붓다다사(1906-1993)는 26세의 약관의 나이인 1932년에 자신의 고향에 수안 목을 창설하였다. 이곳은 아찬 붓다다사가 주장
“육체의 달콤한 쾌락 버리고 나면 “온전한 깨달음을 만날 수 있을까” 네란자라 강에서 바라본 전정각산. 오른쪽으로 세나 마을의 고행림이 펼쳐져 있다. 붓다는 이곳에서 6년간 죽음을 무릅쓰고 고행을 했다. 알라라와 웃다카 스승의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했음에도 원하는 해답을 얻지 못한 붓다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게 가르침을 줄 스승은 없는 것인가.”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은 붓다는 마가다 왕국의 우루벨라로 갈 것을 결심하고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신흥 강국이었던 마가다 국 곳곳에는 제각각 독특한 수행법을 가지고 수행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고행은 가장 인기있고, 인정받는 수행법이었다. 당시 고행을 수행의 방편으로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학림사(鶴林寺)는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도량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학이 나래펴고 날아든 형국 계룡이 날개를 펴고 승천하는 듯한 뒷산과 좌측의 장군봉과 임금봉의 위엄이 조화를 이루고, 전면의 갑하산은 학이 나래를 펴고 학림사를 향하여 날아오는 형국이다. 동남간에는 연화봉이 솟아서 제석천왕이 연꽃을 바치는 모습이며 남쪽에는 문필봉이 우백호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학림사 좌측으로 흐르는 청룡계곡에는 세속의 미진도 떨어버린듯한 청량옥수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흐르고 있다. 학림사는 지난 40여년간 수행에 매진해 온 학산 대원 스님이 지난 1986년 8월 개산했다. 대원 스님은 용성 스님의 선맥을 이은 고암 스님의 전법제자로서 현재 속세
청차는 발효과정을 가져 원하는 향과 맛이 나면, 살청하여 더 이상 발효를 막아 품질을 고정시키고 유념과 건조로 마무리하는 즉 홍차처럼 만들다가 녹차 제다공정으로 완성시키는 차다. 중국 복건성에서 처음 만들어 지게 되어 18~19세기에는 유럽에 까지 명성을 떨쳤다. 19세기 청차의 산지는 복건성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 지역이었고, 광동성 동부 및 대만에서도 생산되었다. 청차의 주산지는 복건성 남부지역인 민남(南)을 중심으로 발전되었고, 20세기 초 청나라가 멸망 후 1950년에 이르러 중국 내전으로 인해 청차의 생산은 쇠퇴하였다. 80년대에 이르러 청차의 보건작용과 더불어 매혹적인 향과 맛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어 급속히 옛 명성을 찾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차 소비 흐름은 홍차는 아
‘똑같은 차를 우려도 맛은 각양각색이다’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차는 어떤 차를, 어떤 물에, 어떤 온도에, 어떤 다기에 우려내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냅니다. 일반 차, 고급차, 중국·일본차 등 각기 우려내는 방법이 다르지만 일반적인 녹차를 중심으로 차 맛있게 우려내는 방법을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이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A 찻물 준비하기 『동다송』에 ‘차는 물의 정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니, 진수가 아니면 그 정신이 드러나지 않으며, 정갈한 차가 아니면 그 몸을 엿볼 수 없다(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莫顯其神 非精茶莫窺其體)’ 라는 말이 있듯 차를 마심에 있어 물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차를 우릴 때 가장 좋은 찻물은 산에서 천천히 흘러 내려오는 샘물이다.
삶의 통찰 번뜩이는 입문서 단문-명쾌한 그림도 일품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이 때로 한 권의 소설보다 진할 때가 있다. 이는 수행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두툼하고 어려운 수행서보다도 얇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 종종 있다. 불일출판사의 『관』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란 부재가 붙은 이 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틸포인트연구소에서 명상지도자로 활동하는 수자타 씨 저술로 86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돼 소개됐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지금까지 24쇄 째 발행하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초판 당시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수식관과 위파사나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수행입문서다. 그렇다고 무작정 방법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애끓는 절규와 통곡소리가 그치치 않는 장례식장. 그러나 내 앞엔 조문객 하나 없이 돌아가신 노인이 있다. 이 분도 분명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친지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을 텐데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홀로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지…. 멀고 외로운 길 가는데 내 염불과 부처님 말씀이 벗이 되어 주기를 다음엔 더 좋은 곳에서 태어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나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죽은 이의 몸을 씻기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인 수의를 단정히 입혀 극락왕생하길 기원한다. 한 달에도 예닐곱 차례씩 시체를 직접 만지는 이 일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종교란 내 일신의 평안만을 위해 있는 것이라 여겼다.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운구행렬 광경 효봉 스님은 6·25 피난길에 인연을 맺은 경남 통영의 도솔암에 머물고 계셨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동산 스님,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오월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에도 선봉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친상 이후 장례지도사 길 선택 “엄마 이제 집에 가자.” 7살 꼬마 아이는 절에 가는 길이 멀고 험하기만 했다. 아이의 손목을 낚아챈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끌고 그 고갯길을 넘었다. 어머니는 절에서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절을 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지금은 나의 일상이 된 염불과 절.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선사에 발을 디딘 게 불교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죽은 이들을 염해주는 독특한 직업을 갖게된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겠지만 고단한 어머니 삶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구원의 빛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불심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덕에 나는 자연스레 불자가 되었고 보림청년회 활
Q. 법장비구가 마흔 여덟 가지의 큰 원(願)을 세우시고, 마침내 성취하여 아미타불이 되셨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불이 되신 싯다르타와 법장비구는 어떤 관계입니까? A. 먼저 『무량수경(無量壽經)』을 근거로 해서 법장비구의 프로필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그는 한 나라의 왕(王) 자리에 있던 분으로, 온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쥔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사(生死)가 너무나 뚜렷합니다. “언젠가는 권력도 없어질 것이고, 나이를 먹다보면 몸은 병들고 늙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죽어갈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십니다. 그리하여 절절한 발원을 하면서 치열한 구도의
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 수행자에게 탐욕의 마음과 성냄의 마음, 그리고 어리석음의 마음은 깊이 뿌리내릴 자리가 없다. 그렇게 번뇌와 멀어진 마음은 지혜로써 밝아지며 자애의 마음으로써 부드러워진다. 그러한 고요한 행복은 참으로 의지할 만 하다. 오래전 한 스님께서 ‘현생에서도 삼악도를 보게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수행의 길을 걷는 지금에서야 이제 세상이 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삶이라는 과정은 의지할 만한 행복이 그 어디에도 없음을 보게 된다. 얼마 전 선원에서 돌아오는 길의 지하철 안은 노조 파업의 결과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의 뜨겁고 끈적이는 몸과 몸이 짓이겨 진 듯 맞닿아 있으며,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가장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입으로는 험한 말들
2002년의 마지막 달, 지금은 ‘겨울’이라고 이름 붙여야하겠지만, 그때 내가 머물었던 그 대륙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녹아내릴 듯 햇볕이 강하고 공기가 뜨거웠다. 점점 더해지기만 하는 삶의 무게로써 다가오는 정신적인 고뇌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여느 젊은이들처럼 세상일의 즐거움이나 성취로써 치환시켜주지 못했던, 나는 어찌 보면 참으로 도도한 부적응자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여 아직 ‘학생’이라는 이름이었던 그 몇 해 동안, 그 고뇌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많은 현자들이 머무른다는 땅들을 홀로 방랑하였다. 인도 중부의 엘로라석굴로 향하는 녹슬고 뒤틀린 로컬버스 안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서 ‘위파사나’라는 것을 처음 전해 듣게 되었다. 가볍게 흘려 넘기고야 만 그 이름이 내게 크나큰 인
20세기 초 중반에 태국의 선지식 아찬 문 스님에 의해 부활된 숲 속 수행 및 두타행의 전통은 몇 몇 출중한 제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분이 바로 아찬 차(1918~1992) 스님이다. 아찬 차 스님은 1918년 1월 17일에 우본 라차타니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관행에 의해서 어릴 때 사미생활을 경험한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출가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낀 청년은 20세가 되던 1939년에 다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법명은 보딘야나(Bodhinyana)이다. 비구가 된지 몇 년동안 팔리어와 교학을 공부하였으나, 비구가 된지 5년이 지난 해 아버지와의 사별을 계기로 수행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고 두타행을 시작하게 된다. 아찬 차 스님과 제자들.
몽중일여 단계 아니면 입도 열지 말라 간절하게 끊임없이 참구하면 한 소식 화두는 어떻게 지어 가는가. 목숨 걸고 화두를 들면 분명 소식이 있을 것이라 하지만 이 또한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다. 초심자들로서는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라 드는 수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화두 짓는 법』은 나옹, 허운, 성철, 만공, 한암, 서암 스님 등 한구고가 중국 대표 선승 14명이 설한 ‘화두 짓는 법’을 담고 있다. 성철 스님은 화두를 지어가는데 있어서 꿈에서도 화두가 성성하는 ‘몽중일여’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은 아예 입도 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깊은 잠에 들어서도 여여한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사리자와 목건련이 붓다와 조우한 땅에 서니 긴 대숲바람 순례자를 반기누나 1만여 학인 스님들이 기숙하며 공부했던 세계 최대·최고의 대학 나란다 전경. 마가다(Magadha) 왕국의 수도 라즈기르(Rajgir)는 붓다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우리에게는 왕사성(王舍城)으로 더 잘 알려진 라즈기르는 가는 곳마다 붓다의 흔적이 가득한 불교 8대 성지 중의 하나이다. 그 유명한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위치해 있고, 붓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외호자가 되었던 빔비사라 왕,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 붓다의 수제자로 승단에 큰 영향을 미친 사리푸트라(사리불)와 목갈랴야나(목건련), 붓다 입멸 후 교단을 이끈 상수제자 마하 카사파 등이 이곳에서 붓다와 인연을 맺었다. 『
강진 백련사 전경. 염불 중심의 백련사결사가 시작된 곳이다. 서울에서 강진까지 천리 길.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 백련사(白蓮寺)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잘 닦인 아스팔트가 끝나는 곳에서 백련사의 명물 동백 숲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계절 푸른빛을 띠고 있는 동백들이 절 마당까지 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인 셈이다. 긴 장마 뒤에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에 터널 안 여기저기서 동백 잎이 생선비늘처럼 반짝인다. 다시 300여 미터 동백 길을 오르자 수십 미터는 족히 될 팽나무 뒤로 천년가람이 펼쳐져 있다. 백련사는 만덕산(萬德山)이 가람을 보듬는 형상이고 앞으로는 툭 트여 개간지와 강진만이 비단 띠마냥 휘돌고 있는 천혜의 도량으로 손꼽힌다. 백련사의 옛 이름은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만강변에 굶주려 죽은 시체가 쌓이고 TV를 통해 젖먹이에게 먹일 젖조차 부족하여 아이를 밀쳐내는 부인이 방영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민족의 대수난의 늪 앞에서 우리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냉담함 속에서, 그리고 남·북한 정부끼리의 치졸한 밀고 당기기 싸움 앞에서 내 맘속의 분단 의식을 돌아보고자 시작한 것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24시간 1000일 정진”이었다. 2000년 3.1절을 기점으로 시작된 입재식에 참여한 모두는 기필코 당시의 얼어붙은 마음들을 녹여 통일을 이루리라는 비장함까지도 배어있었다. 1000일 정진 기간 중 100여 일이 지났을 때 남과 북의 전상들의 만남이 이루어 졌으며 차츰 차츰 화해의 분위기가 피
염불은 일체 인연에 감사·보은하는 것 칭명·관상염불 전통 수행법 소개 범부도 지극정성 염하면 윤회 끊어 “염불은 진실한 믿음으로 보리심의 꽃인 정토를 염원하여 일심으로 명호를 부르고, 자연과 생명의 청정광명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염불은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고 그 지혜를 한결같이 엎드려 믿어, 믿음을 성취해 안심을 얻고, 일체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하는 수행이다.” 정목 스님의 염불에 대한 이 한마디는 우리가 왜 염불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다. 금정산 범어사에서 출가한 정목 스님은 쌍계사와 범어사 강원에서 수학하고 강사 소임을 지낸 후 중앙승가대를 졸업했다. 계정혜를 온전히 닦아야겠다는 일념에 따라 수행법을 고민하다가 염불수행을 선택한 정목 스님은 1998년 하안거 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