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모라다나 다라야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 알야바로기제 새바라 다바…(삼보님께 머리 숙여 절을 올립니다…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는 관자재보살님께 귀의하면 성스러운 관자재의 위신력이 나타납니다….)”한여름 오후, 천년고찰에 70여 대중이 지송하는 범어(梵語)가 흐르는 건 ‘천수대다라니 108독 성취기도’ 원력을 세운 대흥사 신임 주지 성해 법상(性海 法祥) 스님에서 비롯됐다. 교구본사 주지 당선 소감을 피력하는 자리에서는 사찰의 중장기 청사진을 내놓는 게 상례인데 ‘승가의 본질’을 자문했던
‘붓당 사라낭 가차미(부처님을 의지처로 살아가겠습니다.)’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불심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이다. 국어 교과서에 인류의 빛이란 단원이 있었다. 거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들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한 글이었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처음의 만남이라 할까. 그때부터 내 마음속엔 부처님을 모셨다. 고등학교 시절이다. 종립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불교성전 교과가 있었지만 불교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학생회 교화부장이었던 나는 불교에 심취했다. 도서
1895년 10월8일이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역사를 배우면서 참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가끔 있는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그중 하나였다.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시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우리들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었다고 배웠다. 그러니 더더욱 말이 되는가? 강제병합 15년 전에 일본 낭인들이 서울을 활보하고 궁궐에서 왕비를 죽이고 유유자적 나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하니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시간이 참 많이 빨리도 흘렀다. 100년하고도 25년이 더 흘렀다. 말 못하는 식물도 그렇고
오늘부터 백중 때까지 49일간 기도를 시작합니다. 백중은 잘 알다시피 ‘목련경’에서 목련존자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해 백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대중에게 공양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목련존자와 같은 아들이 있어서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런 아들이 없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설령 지옥에 가더라도 스스로 걸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49일간 기도를 하는 것은 지옥에 빠지더
신라 ‘중고’기 국가불교의 최대 상징물인 황룡사의 9층목탑이 조성된 때는 선덕여왕 14년(645)이었다.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塔刹柱本記)’와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 의하면 선덕여왕 14년(645)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에 찰주를 세웠으며, 다음해에 준공하였다. 9층탑은 오늘날의 건축물로는 20여 층의 높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탑신부의 정상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김극기(金克己)가 읊은 시구에 의하면 탑에서 내려다본 경주는 벌집이나 개미집처럼 작게 보였
한문 독송과는 다른 한글 독송의 묘미도 배우게 되었다. 우리말로 풀이된 ‘금강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어느새 경전의 말씀은 중생의 세간살이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고정관념이 스르르 사라지고 없었다. 매일 ‘금강경’을 독송해서인지 경전반에서 공부했던 내용은 더 와 닿았다. 그대로 상을 비우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이 이전에는 그저 경전의 한 구절이었다. 그러나 100일 기도를 마칠 즈음에는 삶의 이정표로 온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100일 기도를 회향하며 법우들의 가피 소식도 전해져 왔다. 딸
모처럼 맘 편히 휴가를 다녀왔다. 자연이 선사하는 힐링의 시간들이 일상의 피곤함을 녹여주는 듯했다. 여유로운 마음과 도반들이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번 여행은 복지시설에 종사하는 시설장 스님 및 재가 시설장들과 함께한 여정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도반들과 같은 원력으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느끼는 시간들이다.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보면서 도란도란 마음을 나눴다. 어려운 점을 공유했고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했다. 이 귀한 추억들이 나의 일상에 더해져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상살이가 쉽지 않은 시절입니다. 그래서 동산불교대학에서 이 힘든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야기를 좀 해 달라고 해서 이렇게 여러분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갈등의 시대로 불리는 이 시기에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 그러면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자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시대를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그래서 두 가지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하나는 이 세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나는 늘 불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불교 공부를 할 기회는 접하진 못했다. 이전에는 집 근처에 있는 사찰에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시불공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냥 의식을 따라 할뿐이었다. 사시불공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절에 다니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늘 답답함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우연인지 필연인지, 시절인연이 닿았다. 그러던 중 2010년이었다. 당시 서예학원을 다녔는데 그 학원에서 여래사 주지 종우 스님과 인연이 되었다. 스님 덕분에 여래사불교대학을 알게 되었고, 불교대학
곧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절에서는 템플스테이가 열립니다. 기대를 갖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친구를 데려오라고 하면 곤란해합니다. 친구들 대부분이 교회를 다니니 자신이 절에 다닌다는 말도 잘 하지 않게 됩니다.어린이 법회 날이면 1시간 이상 일찍 오는 10살 여자 어린이가 있습니다. 절에 오는 것을 좋아해서, 법회 준비나 청소까지 모든 일을 즐겨 합니다.이번 법회에도 일찍 와서 법당 좌복과 기도책을 미리 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머뭇거리다 결국 법회가 다 끝나고 나서야 말합니다. “스님,
강의에 앞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찰숲은 나라 전체 산림면적 중 얼마나 될까요? 짐작하기도 어렵나요? 먼저 우리나라 전체 산림면적은 남한의 전체 면적인 1000만 헥타르(ha, 1ha=1만㎡) 중 634만 헥타르입니다. 63%가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조계종 소유의 산림은 전체 면적의 1%인 6만3000헥타르 정도가 됩니다. 언뜻 보기에는 1%가 ‘별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만한 산림을 갖고 있는 기관은 국가기관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이야기를 국립공원으로 좁혀서 보면 사찰이 소유한 산림을 뺄 경
진안과 마령 경계선에 희유한 모양의 두 봉우리가 마주한 산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신라시대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 용출산(聳出山)을 거쳐 조선 초에는 속금산(束金山)으로 불렸다. 계절에 따라 봉우리 이름도 다르다. 안개 자욱한 봄날에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녹음 짙은 여름 수목 사이에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 단풍 때 말의 귀처럼 생긴 봉우리가 유독 두각을 나타내 마이봉, 화선지(설산)에 묵화를 치는 붓(봉우리)과 같다 하여 겨울에는 문필봉이라 한다. 지금은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