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들녘은 금빛 물결로 출렁이고 집집마다 결실의 행복이 단풍잎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남도의 넉넉한 들녘이 보고 싶어 무작정 들길을 따라서 가다가 어느덧 발길이 멈춘 곳은 월출산 무위사였다. 그윽한 고찰의 뜨락에 들어서니 대웅전 지붕위에는 청자빛 하늘이 한 조각 걸려있어 무위법을 설하고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단청이 멀겋게 바랜 법당은 인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전설처럼 점안을 마치지 못한 백의관음은 눈 없는 눈으로 보이는 것마다 눈임을 가르치고 있다. 도량에는 관광객들이 고찰의 넉넉한 기운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지나가고 천왕문 앞에는 진돗개 한마리가 일없이 졸고 있다. 무위법으로써 삼라만상과 일체 중생들이 이렇게 차별을 나투고 있지만 서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 “돈오입도
인무천일호(人無千日好)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사람은 천일을 두고 항상 좋을 수 없고꽃은 백일을 두고 붉을 수 없다.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서안의 법문사 참배를 기점으로 둔황, 투루판, 우루무치를 거쳐 오는 8일간의 여행이었다. 법문사는 부처님의 지골사리(가운데 손가락 뼈)가 모셔진 곳이다. 기원전 240년 경, 인도를 무력으로 통일한 아쇼카 왕은 불법에 귀의하여 부처님 성지마다 탑을 세우고 세계 곳곳에 법사단을 조직해 사리와 경전을 들려 불법을 전하기 위해 파견한다. 기원전 243년, 석리방을 비롯한 18명의 법사단이 지골사리1과와 진신사리 18과를 들고 30여 개 국을 거쳐 3년 만에 지금의 서안 근처에 당도한다. 들판에서 하루를 머물던 일행은 “아직 몸을 드러내지 말라”는 부처님의 교시를 받
섬진강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서 화개장터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끝없이 맑은 물길에 내려앉은 가을 하늘과 강의 정취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강물에 띄운 뗏목이 안전하게 바다에 도착하려면 양어귀와 중간에도 머물지 않아야 하듯이 성품에 계합하려면 일체 사량 분별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의단이 뭉치게 되면 생각의 기멸이 사라지고 마치 가을 들물처럼 무심을 이루어 깨침의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가 되면 공부를 마치는 것이 멀지 않았다고 『몽산법어』는 설하고 있다. 가을은 너무 덥거나 춥지 않아서 수행하기에 좋은 계절인 것 같다. 수행이 특별한 것이 아니어서 계절을 타지는 않지만 싸늘한 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면 왠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하여 지난 시간을 돌이키게 되어 일어나
부처님 당시에 한 여자 거지가 있었다. 모든 거지의 가난이 그렇듯이 이 여자 거지도 베푼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녀는 부처님께서 한 장자의 초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겠지’ 생각하고 따라나섰다. 그녀는 공양 자리에 참석하여 부처님께서 자신을 바라봐주길 기다렸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느냐?” 여자거지가 대답했다. “먹을 것을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무엇이든 함께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먼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내가 주는 것을 그대는 거절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는 음식을 여자거지 앞에 내미셨다. 음식을 본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평생
태풍 나리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동안 섬에서 겪은 어느 태풍보다도 유래가 없이 많은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어서 피해가 많았다. 다행히 도량 주변에 큰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서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주느라고 허리가 휘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인연들이다. 앞으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으로 세고 강한 슈퍼태풍이 온다고 하니 인간의 욕망이 갈수록 치성해져 태풍도 따라서 강해지고 덩치를 키우는가 싶어 씁쓸하기만 하다. 더구나 요즈음 승가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어 섬에 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남의 집안 일이 아니어서 참으로 밖에 나가기가 부끄럽다. 승가의 생활도 예전보다 편리해 지고 의식이 풍족한 것은 사실이나 스님들 사이에 훈훈한 기운은 갈수록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여름 내내 이목을 집중시키던 인질들이 풀려났다. 그 와중에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적신월사(Red Crescent Societies)’라는 이슬람권의 적십자 단체가 십자가 대신 심벌로 쓰는 ‘초승달’이었다. 어떤 특정지역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쓰는 기호(sign)와 상징(symbol)을 잘 알아야 한다. 구분이 모호하겠지만 상징은 심상(心象)을 부여하기 때문에 기호보다 심층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국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별 문양이다. 60개국 이상에 별 문양이 등장하고 있다. 별은 최고(supreme)를 상징하며 오각형이다.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이것을 황금분할(golden section)이라고 불러왔다. 이 오각형 내에 모두 대각선을 그으면 별의 형상이 얻어진다.
며칠간 계속되던 가을비가 그치고 나니 바다가 다시 열리고 있다. 이맘때면 농촌의 부모님들은 추석에 찾아올 자식들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뿐이었지만 요즘 때 아닌 가을장마에 걱정이 늘어가고 있다. 수행하는 사람도 이맘때가 되면 한해의 농사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 농사는 해마다 더하는 일이지만 법농사는 해가 갈수록 덜어서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향엄선사는 거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어서 송곳 꽂을 땅이 있더니 금년 가난은 참가난이라 송곳마저 없다고 노래했다. 법을 모를 때에는 깨달아 보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 보지만 문득 이 농사는 세상과 달라서 유위법이 아니기에 힘을 쓸 일이 아님을 알게 된 후로는 천연의 성품에 맡겨서 유유자적하여 세월이 흐르다 보면 덜고 덜어 어느덧 무위법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지난
밤사이 내린 이슬이 아직 날아가지 못한 채 풀잎을 적시고 있던 이른 아침, 부처님께서 극락의 연못가를 산책하고 계셨다. 연못에는 색색의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연못을 구경하시던 부처님은 빼곡히 들어찬 연잎들 사이로 우연히 아래세상을 내려 보게 되었다. 극락의 연못 아래는 지옥이었다. 그 많은 지옥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의 관심을 끈 이는 칸다카였다. 살인은 물론이고 도적질 같은 악행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다. 그가 과거의 어느 때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 발에 밟힐 뻔 한 거미를 살려준 적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 한 가닥 선행인연을 알아보시고 구제하실 마음을 내셨다. 연못에는 아직 이른 아침이라 거미들이 잎 사이사이에 줄을 치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중의 거미줄 한 가닥을 지옥으로 내려 보내기 시
만행 떠나기 전힘 얻었는지 점검천둥같은 선지식 말씀“건강할 때 밀어붙여라”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계절은 속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처서가 되니 밤이면 귀뚜리미가 울고 하늘의 별밭에는 은빛 잔치가 시작되었다. 가을의 문턱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수욕장은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이른 아침 바다는 아직 남아있는 열정으로 집채만 한 파도로 굽이치고 있다. 앞마당에는 연꽃의 향기로운 잔치가 한창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연향에 취해보기는 처음이다. 해질녘 순백의 얼굴로 미풍에 하늘거리는 하얀 연꽃의 자태는 숨을 멈춰야 바로 볼 수가 있다. 저녁에는 고사리 손의 합장인양 다소곳이 아문 모습은 천진 동자의 해맑은 얼굴이다. 몇 해 전 선원의 상징화로 심었는데 지붕꼭대기에는 조각된 하얀 연꽃이 법성의 바다에 뿌리를 내린
무모한 선교가‘인질사건’불렀다지만포교현실서 보면그들 열정 놀라워 ‘무샤하다(mushahadah)’는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의 말로 ‘목격’,‘봄’의 뜻이다. 이것은 오로지 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 신이 부여하는 것으로 이 상태가 ‘야킨(yagin:확실성)’이고, 궁극적으로 신의 모습에 접하기를 열망하는 모든 수피의 목표이다. 그 반대개념인 히자브(hijab, 신의 얼굴에 가린 베일)는 수피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벌이다. 수피들은 ‘무샤하다’를 얻기 전의 삶을 헛된 것으로 여긴다. 유명한 신비주의자인 바야지드(?~874)는 나이가 몇이냐는 질문에 “4세”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말이 이랬다. “70여 년 동안 신의 베일이 나에게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 4년 동안 그를 보고 있다. 이
앞마당 너럭바위에 앉아 더위에 지친 몸을 뒤척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문득 깨어보니 밤은 이슥하니 깊어서 새벽으로 넘어가는데 파도소리는 잠들지 않고 묘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람의 심성 그대로가 불성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자존심마저 버리고 나면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생기게 된다. 향엄 스님은 남양 혜충 국사를 모셔 놓은 탑묘를 참배하다가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밟히는 기와 조각을 던졌는데 우연히 대나무와 부딪치는 소리에 삶의 긴 방황을 그치고 오도를 하게 되었다. 참으로 감격하여 멀리 사형인 위산 스님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향을 사루고 예배하면서 그때에 가르쳐주지 않고 진실하게 목숨 바쳐 참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형님을 더욱 귀하게 생각한다면서
삶을 맞이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적이 없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 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채우는 기쁨이 비우는 즐거움을 넘지 못함도 알고 보면 단순한 법칙에 근거한다. 오르려면 우선 가라앉아야하듯이, 이 작은 기적이 삶을 변화시킨다. 한 성자가 있었다. 그가 어딘가를 다녀오기 위해 제자를 데리고 가다 강을 만나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성자의 명성을 알고 있던 한 사내가 불쑥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성자로 불리는 이여, 당신은 맨발로 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성자가 말했다. “난 할 줄 모르오.” 사내가 신통으로 물위를 자랑스레 걸어보이고는 말했다. “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면서 성자라고 할 수 있소?” “사내여, 물위를 걷는 데 얼마나 수련을 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