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견해 없이 일방적 훈계만인격 무시·폄하의 글 아쉬워학문은 항상 진리·정의 향해야불자 기준은 조사보다 부처님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지난해 불교평론 가을호에서 경허 스님의 파계행을 비판해 큰 논란이 됐던 가운데 최근 근현대불교연구가인 김광식 박사가 불교평론 봄호에서 윤 대표의 논문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윤 대표는 일체 대응하지 않겠다는 처음 입장을 접고 20년 지기(知己)라는 김광식 박사의 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글을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윤창화 민족사 대표 선생이 발표한 ‘경허논의의 비판적 검토-윤창화의 논고를 중심으로’라는 글은 잘 읽었습니다. 김 선생은 모두(冒頭)에서 “경허연구의 새로운 논의를 위
새벽 기온이 차갑다. 산사의 기온은 시내보다 더욱 차다. 새벽 예불 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달과 어우러진 별무리들의 청명함에 눈이 시리다. 달과 별이 내려다보는 사위의 존재들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잠시 멈춰 이 고요함의 한 일원이 된 ‘나’를 본다. 낯선 이방인이다. 적적요요의 세계 일원이 되기에는 아직 조화롭지 못하다. 체(體)와 용(用)의 연이다. 그 용은 부드럽고 평온하지 못하여 체와 섞이기에는 무언가 어색하다. 사물을 보되 봄이 없는 봄이라야 지극히 조화롭다. 수행이란 바로 나와 존재의 경계가 커져 종국에는 먼 지평으로 사라져 경계가 없는 자리라야 진정한 무아, 무심이 된다. 인연이 된 젊은이들과 화엄행자 1000일 수행을 하고 있다. 매일 나와 대상이 지극히 평온하고 자비로운 관계로 인연되
무애행 흉내 경계해야 하지만경허 스님에 책임전가는 잘못 깨닫지 못한 범부의 관점으로주색에 빠졌다는 비판이 ‘과오’ ▲옹산 스님 서산 천장암 회주 옹산 스님이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 추모 기념탑 건립을 앞두고 최근 경허 스님의 행적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경허 큰스님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우리의 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폐불이 진행된 데다가 연이어 나라를 빼앗은 일제의 악랄한 조선불교 말살정책과 맞물려 아예 명맥이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허의 오도(悟道)는 일개인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 중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멈추었던 선불교
조계종단이 종단 차원에서 재향군인회 투자사인 (주)향군상조와 제휴하여 상조업에 진출했다. 일견 별 문제없어 보이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본디 죽음이나 죽어감, 이와 관련된 의례는 종교의 영역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부대중이 불교의 도움을 가장 절실히 원하는 때가 바로 죽음 앞에서이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육체적 고통은 물론 죽음을 목전에 두고 느끼는 정신적, 심리적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주는 슬픔과 그리움, 죄책감,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가 주는 실존
1500여명 신륵사 참배남북의 평화정착 기원 돌아오는 길 교회 들러아기 예수 탄생 축하도 ▲108산사순례기도회 불자들이 지난해 12월25일 여주 신륵사에서 남북평화 정착과 우리 사회의 화합을 기원하는 탑돌이를 하고 있다. 성탄절인 지난해 12월25일, 유럽에는 100여년 만에 최악의 강추위가 몰아닥쳤다. 우리나라 역시 30여년 만에 찾아온 영하 17도의 혹한(酷寒)속에 전국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 와중에 ‘선묵 혜자 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순례’ 기도회 1,500여명은 이른 새벽부터 제2차 순례지인 여주 신륵사로 향했다. 차창 밖 나무들은 남은 잎들을 모두 다 털어내고 목피(木皮)만 앙상하게 들어내고 있었다
동국대 전 교수 호진 스님이 인도 성지를 순례하는 동안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성지에서 쓴 편지’가 근래 출간된 가운데 재가법사인 이제열 유마선원장이 호진 스님의 불타관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이제열 원장은 지난 30여년 간 포교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가법사로 ‘금강경 대강좌’ ‘수행으로 가는 길’ ‘법수로 배우는 불교’ ‘완전한 깨달음’ ‘왕초보 금강경 박사되다’ 등 저술을 펴내기도 했다. 편집자 오로지 불퇴전의 원력으로 평생을 교학 발전에 헌신해 오고 계신 호진 스님께 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이틀 앞둔 조계사법당에는 수험생 자녀의 대입합격을 기원하며 기도하는 학부모들로 붐빈다. 나 또한 퇴근 후 포교사가 되기 위해 다니는 불교대학 수업을 마치고 밤 9시가 넘은 시간 법당에 잠시 들러 수능을 보는 한 불자학생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 학생은 자운고 3학년 홍현승군이다. 중증의 뇌성마비장애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동국대 서울캠퍼스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수시 전형에 응시를 했었다. 서울캠퍼스는 1차 서류에는 합격을 하고 2차 면접에서 아쉽게 떨어졌으며, 서류전형으로 응시한 경주캠퍼스에는 대기자 명단에 올랐다. 아마도 뇌성마비장애를 가지고 불교학과에 응시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장애불자들이 적은 현실에서 한번쯤 불교계에서 불자장애인들의 새 물결, 변화의
고려불화를 떠올리면 마음이 먹먹하고 애잔하다. 작품에도 운명과 팔자가 있는 법인가. 6개국에서 모은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는 역사의 거울로 시공을 초월한다. 재난과 사변 많은 고향을 떠나 있었기에 오히려 온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사연의 고려불화. 그 ‘진리의 꽃’이 고향에서 다시 향기를 발하고 있다. 세계에서 160점이 고작이라는 인류문화유산의 고려불화. 그 가치는 존재성을 넘어 성스럽다. 이번에 출품된 66점의 불화는 한마디로 화엄의 세계요. 장엄의 극치다. 종교와 예술이 만나 빚은 지고선(至高善))의 세계다. 고려인의 성정과 독창성이 주목받고 환희와 찬탄 속에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불국토의 신앙과 제작자의 노력은 불화의 질을 높였고, 깊은 외경의 붓길은 속기
불교신문 5월 8일자에 실린 우봉규 논설위원의 ‘그리운 수월 스님’이라는 사설을 읽으면서 우봉규 논설위원은 아마도 고대 신라의 서라벌에서 태어났으면 원효 스님을 비난했을 것이고, 조선시대에 살았으면 왜군과 싸우는 서산대사를 공격했을 것이며,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살았더라면 만해 한용운 스님을 일제 경찰에 고발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우봉규 논설위원이 원효, 서산, 그리고 만해 스님의 깨달음과 공덕, 불교의 역사성을 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우봉규 논설위원은 그 누구보다도 더 원효, 서산, 그리고 만해 스님을 존경한다고 말할 것이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우리의 불교사에서 큰스님들이 행한 당시대의 깨달음과 역사를 분명히 알고 있을 우봉규 논설위원이 ‘4
“승려는 본인이나 세속의 가족을 위하여 개인명의 재산을 취득할 수 없다”는 승려법 제30조 2항인 승려사유재산금지에 관한 종법 개정안이 도입된 지 2년이 지나 구체적인 시행령이 최근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시행령이 급작스런 입법 예고와 함께 10년 주기로 시행되는 승려분한신고와 결부되어 시행되면서 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승려법에 사유재산금지 조항이 도입된 근본 취지는 승려가 급작스런 원적에 들었을 때 발생하는 유산의 분배문제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의용민법(1960년 1월 1일 이전 구민법) 당시에는 상속은 조선의 관습법을 명문으로 규정하여 따랐다. 조선 스님 명의의 재산은 상좌들에게 귀속되었으며 속가의 유족들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1960년 1월 1일자로 오늘날의 민법이 시행되면서 이러한 관습법이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는 다시 아함과 니까야 또한 설일체유부 등 부파에 의해 승인할 불설일 뿐이라고 반박했다.(본지 1010호 10면) 이에 마성 스님이 다시 권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필자의 반론문에 대한 권오민 교수님의 성실한 답변에 감사드리며, 평소 학문하는 자세나 열
불교의 세속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조계종의 정체성과 수행풍토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에 본지에서는 △조계종의 종지와 종조 △간화선: 성철 선사와 화두 △재가불자: 신행과 역할 등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출가불자가 수행 전념토록 돕는 것도 의무조계종 사찰마다 통일된 이념·행법 갖춰야 법보신문의 세 차례 연재는 조계종의 ‘기준’이라는 측면에 주목을 한 글이다. 필자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주장하는 ‘기준’을 종헌 종법과 그리고 역사와 제도 등을 통해서, 극히 일부분 즉 ‘종조’와 ‘종지’를 제한적으로 거론했다. 이것이 분명해야 출가는 물론 재가 불자들의 신행도 분명해지고, 또 그에 따르는 역할도 분명해질 수 있다. 이를 위해 두
지난 6월 6일 지리산 노고단 하악단에서 출발,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을 거쳐 임진각 망배단까지 124일간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이처럼 1000리를 길어서 오체투지 순례를 마친 서울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 순례를 회향한 수경 스님이 ‘4대강 살리기’ 사업 등 개발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불살생의 참 의미를 설하는 기고문을 보내와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목숨을 해치는 것이 차안(此岸)이요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이 피안(彼岸)이다.”〈잡아함경〉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상생과 평화의 길을 구하고자 오체투지의 가장 낮은 자세로 124일간 국토를 순례한 수경 스님(사진 가운데). 뼈를 깎는 순례의 길을 마친 스님이 이명박 정부에게 제시한
불교의 세속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조계종의 정체성과 수행풍토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최근 보내왔다. 이에 본지에서는 △조계종의 종지와 종조 △간화선: 성철 선사와 화두 △재가불자: 신행과 역할 등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선종 종지종풍은 돈오무심 사상남종선서 보면 지눌은 ‘비주류’ 신 교수는 성철 스님이 혜능과 임제의 종지종풍을 잇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지난 호에 조계종의 종지와 종조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거기에서도 거론했지만,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종명(宗名)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종조(宗祖)에 대한 논
불교의 세속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조계종의 정체성과 수행풍토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최근 보내왔다. 이에 본지에서는 △조계종의 종지와 종조 △간화선: 성철 선사와 화두 △재가불자: 신행과 역할 등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건립 공사 광경. 유교를 국시로 하던 조선은 승려 신분을 국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독한 불교 탄압이 계속되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하고, 그 이듬해 1911년 6월에 총독부의 ‘조선사찰령’이 실효되었다. 이 법령에 의거하여 30본사는 각각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어서 본 말사에 시행했다. 1934년에는 일본 승려들에 의해, ‘일조불
지난 3월 28일 공주 신원사 중악단서 북 묘향산 상악단까지 오체투지 순례길에 다시 나선 수경 스님과 순례단. 교만을 비운 만큼 상생의 의지를 새로 채울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지리산 노고단 하악단에서 공주 신원사 중악단, 평양 묘양산 상악단까지 가장 낮은 자세로 교만과 아상, 독선을 내려놓으며 사람과 생명 그리고 평화의 길을 찾아 오체투지 순례 중인 서울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이 본지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지난 5월 16일 서울로 들어서는 남태령 고개에 다다른 수경 스님의 100여일 간의 마음 비움과 나눔을 담은 글을 본지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허공’이라 하지만 하늘과 땅 사이입니다. 온 생명이 거기에 깃들어 삽니다.대지의 품에 안겨 보니,아스팔트 틈새 작은
아주 먼 옛날 저 멀리 당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궁중에 있던 관리가 절을 찾아와 자신이 지금 쫒기고 있으니 숨겨 달라는 것이다. 이 절은 다름 아닌 장안의 남산인 종남산(終南山) 초당사였다. 그리고 숨겨준 스님은 규봉종밀 선사였다. 얼마 안 있다가 관군(官軍)이 들이닥쳐 ‘범인 숨겨준 죄’로 스님을 연행했다. 재판은 공개적으로 당나라 어전(御殿)에서 열렸다. 먼저 범인을 심문했다. 재판장 왈(曰), “너의 이름을 말해라.” 그가 아뢰기를, “저는 성(姓)은 우(牛) 씨요, 이름은 아무 아무개입니다.” 다음에는 검사 측에서 취조가 시작되었다. 검사 왈, “너희들은 우 승유의 일파구나!” 그러자 재판장 안에 있던 군중들이 술렁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이당’과 ‘우당’의 정치 싸움이었다.
지난 11월28일 존엄사를 인정한 법원 판결로 인해 찬반논란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존엄사 혹은 소극적 안락사 찬반여부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토론문화의 결핍, 죽음문화의 부재, 그리고 조급증으로 인해 진지한 토론과 과정을 무시한 채 존엄사 문제에 대해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 사회가 죽음문화 성숙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했는지, 존엄사 법제화를 논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되었는지 묻고 싶다. 죽음은 바르게 이해되고 있는가? 죽음을 연구하고 죽음준비교육을 할 수 있는 전문가는 있는가? 개개인이 죽음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가? 또한 우리 사회 죽음의 질은 과연 어떠한지도 묻고 싶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죽음의 질
사경이란 앞서도 말씀 드린 것과 같이 불교 경전을 옮겨 쓰는 것입니다. 아니 경전의 한 자 한 자에 배어있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마음과 가르침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득 채우는 작업이자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어른들은 한 자를 쓰고 삼배를 올리고, 또 한 자를 쓰고 삼배를 올리는 ‘일자삼배’ 또는 ‘일자일배’ 수행을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입니까. 경전의 글자하나 진언하나 염불하나에 정성을 다했던 것입니다.경전의 글자하나 진언하나 염불하나도 결코 단순한 문자들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중생들의 본성이 가득 담겨 있고 부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글자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경을 함으로써 보다 깊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지난 8월 27일 불교도대회에 참석한 1만 2000여 스님들은 세상의 소통을 한마음으로 기원했다. 김지하 시인은 이를 새 문명의 출발점으로 평가했다. 나는 옛날 학생시절 탈춤을 추었지만 오래도록 마당에서는 추지 않고 새벽 수련 뒤에 혼자서 추곤 하였다. 그런데 그 큰 광장에서 그 빨라지는 목탁소리와 독경소리에 내 몸의 밑바닥으로부터 춤사위가 뜀뛰어 펄펄 살아오르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생명운동이다. 말만 운동이 아니다. 진짜 생명의 진짜 운동이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생명운동은 이래야한다.그 생기는 곧 동작에서는 ‘기화신령(氣化神靈)이라 부르는 것인데, 그런데, 정말 이럴 수가 있나!아, 진짜 이럴 수가 있나!그 몸속에서부터 터져 오르는 춤기운은 자연스럽게 이제껏 확성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