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를 전하는 분들이 중국출신 법사님들이어서 언어 소통이 어려웠다. 우리말이 서툴러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는 잘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있으면 나를 쳐다보고 중국어로 말하면서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되느냐고 묻곤 했다. 그렇지만 무척 검소한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 슬리퍼를 빨아 신고서 우린 교육을 마친 늦은 시간에도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에게 갔다. 가피를 해야 한다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분들이 정말 남을 돕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분들 같았다. 중국 법사 통역 인연으로수행기 ‘가사’ 한국어 번역감동 받았다는 독자 말에조
2006년이었다. 이 해는 30여년 간의 교직생활에서 정년한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학교로 출근하여야 하는 일상이 학교 밖에 새로 마련한 연구실로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일단 정년이라는 한 고개를 넘은 시점에서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교직 정년한 해 참선 접해아내와 보리선수에 입문오체투지·팔괘 수행 병행일상체험 가능성도 엿봐돌이켜 보면 지난 20여년 간 김천에 있는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을 뵐 겸 한 달에 한 번 관음재일이면 그 어른이 계신 중암을 찾
수행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절에 자주 나가다 보니 대광명사의 봉사단체인 ‘사무량심’에 눈길이 갔다. 수행과 봉사를 겸할 수 있는 기회를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봉사는 젊은 시절부터 늘 마음으로 발원해 온 일이기도 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감사한 일임이 분명하다. 불교를 모르는 상황이거나 수행을 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봉사만큼은 가장 먼저 권할 수 있고 누구나 계속할 수 있는 최고의 포교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사단체 ‘사무량심’ 활동가피에 회의 들어 상심도초심 새겨 광명진언 염송재가불자 하안
몇 해 전,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49재를 마쳤을 즈음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갖기 위해 부산 해운대에 있는 폭포사라는 절에 갔는데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한 교리 공부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런 나를 스님께서는 한 눈에 알아보시고는 포교당에 가서 불교교리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마침 폭포사와도 멀지 않은 곳에 대광명사가 있었다. 시어머니 49재 치르면서도불교에 문외한이었던 시절불교대학 인연에 기도정진매일 1000독씩 광명진언 대광명사에는 대광명불교대학이 있었다. 이곳에 등록해 교리공부를 시작한
때를 맞췄다. 따로 시간 내기 어려워 직장 휴가를 택했다. 마음을 내어 덕양선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미 인터넷 카페에서 봐왔던 터라 법당도 부처님도 익숙했다. 신도님들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휴가 맞춰 덕양선원 방문기다리던 봉정암에서 기도4년 만에 10만 독송 성취남편·아들 불연 가교될 것주변의 작은 배려가 큰 힘이 됐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함께 기도정진했던 도반님들과 스님께서 반겨주셨다. 오세암서 정진이 대비주를 마음에 새겼다면, 이제 그 마음 따라 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 스님을 따라 BBS불교방송 순례기도를 계
2012년, 아들은 힘들었다.수능 앞둔 아들 걱정하다설악산 봉정암 기도 동참대비주 고성정진하며 눈물수행에 매진하겠다고 발심수능을 앞두고 자신감 부족과 조바심 탓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긍정의 말로 위로는 했지만 힘들다는 사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인에게서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불교에서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인 성지, 설악산 봉정암에 다녀오자는 제안이었다. 한 가지 소원을 꼭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당시 봉정암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음이 먼저 앞섰다. 강원도 높은 산이라고 했다. 산을 좋아하지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다. 말리는 엄마, 한다는 아이삼복더위에도 사불·108배덕분에 남편과 함께 수행부처님 가피로 행복만들 것나는 아이에게 내 경험을 빗대어 “민재야. 힘들다. 하지말자”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달랐다. “엄마. 해보고 못하겠으면 그때 안할게.”나는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멍했다. 아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다. 하루도 빠짐없이 1차에서 3차까지 90일씩 반복되는 재가안거 수행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거뜬하게 완성했다. 1차 재가안거 사불수행을 신기하게도 잘 마치더니 2차 때는 삼복더위를 넘나드는 뜨거운 날씨에도 구슬
어릴 적 엄마 손에 이끌려 나는 아주 특별한 외출을 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분위기는 나를 압도했다. 그 특별한 외출을 한 곳이 바로 부산 홍법사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외출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간호대학을 가기 위해 엄마와 1000배를 할 때에도, 불자 기본교육 단계인 신행학교를 다닐 때에도 내가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엄마가 그저 시키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억지 신심을 내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나도 한 아이의 엄마, 또 아내라는 이름의 삶을 살면서는 불교를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우연일까
참선하면 부수적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다는 큰스님들 법문을 많이 들었다. 나만 알던 내가 배려를 할 줄 알게 됐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애착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됐고, 옳고 그름을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이 참선공덕인 것도 여실히 깨닫고 있다. 이렇게 좋은 부처님 법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돼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특히 재단법인 선원수좌선문화복지회가 주최하는 ‘간화선 단기안거’에 동참하면서도 많은 공부를 했다. 간화선 단기안거는 한국불교 전통수행법 가운데 하나인 간화선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 여름, 정진해서 ‘참나’를 찾아보겠다던 선방의 여러 도반님들! 대단한 각오를 한 듯했다. 선풍기도 없이 자연바람을 도반 삼아서 참으로 잊지 못할 한 철을 보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지만 실감이 나질 않는다. 무엇이 그 무더위를 잊게 하고 시원하게 ‘이 뭣고’를 붙잡게 했을까?지금 1998년. 창문으로 가을햇살이 밝게 들어오는 날이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여기저기 옮기다가 어느 순간 불교방송이라는 코멘트가 나오기에 그 자리에서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애청자가 되어 밤이 늦도록 듣게 됐다. 불교다, 부처다
좌선을 하다보면 문득문득 지나온 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도 과거의 습관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하는 모습을 마주하면 얼마나 습관이 무서운 지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매일 아침 ‘천수경’을 독송하면 특히 가슴에 와 닿는 구절들이 있다. 불, 법, 승 ‘삼보’와 탐, 진, 치 ‘삼독’ 그리고 계, 정, 혜 ‘삼학’이라는 구절이다. 그 중에서도 ‘삼독’이라는 용어가 눈에 들어왔다.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많이 접하는 행동이나 모습으로 쓸데없는 탐욕을 내기도 했다. 또 순간을 참지 못해 분노하거나 화를 내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
나는 오랫동안 오직 직장생활에만 전념한 사람이었다. 직장 생활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 왔기에 그동안의 나는 종교나 수행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아내와 함께 가끔 절을 찾기도 했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참선에 대해서는 더욱 알 리 없었다. 마음공부가 무엇인지 듣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수십여년 간의 직장생활이 내 인생의 전반기였다. 그렇다면 참선을 알고 시작한 이후부터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자 삶의 후반기를 새로이 설계하고 살아가는 기분이라고 포현하고 싶다. 벽시계는 고장 나도
변했다. 자신감 잃고 일상이 무기력했던 내가 달라졌다. 이모 덕에 대비주와 인연을 맺고 10만독 정진을 새롭게 발심했다. 그리고 결국 성취했다. 지금도 그 날짜를 잊을 수 없다. 2016년 6월26일 10만독을 회향했다.되돌아보니 신묘장구대다라니, 즉 대비주 수행을 발심하고 10만독을 성취하는 동안 기적 같은 일들도 많았다. 신기하게도 나를 옭아매고 있던 강박과 불안이 소멸됐다. 강박증에서 비롯되는 불안, 근심, 걱정들이 대비주 수행이 무르익어갈수록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신경 쓰이던 마음속 번뇌들이 대비
2012년 1월 즈음이다.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 없는 그리고 믿기도 싫었다. 몸과 마음이 한창 혈기왕성할 20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곱씹어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몸은 쇠약했고 마음은 불안했다. 집안에 우환이 있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몸의 어떤 부위가 특별히 아프지도 않았다. 까닭도 없이 무기력하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가고 있었다. 주위에선 그런 내 모습이 염려됐던 것 같다. 조카를 걱정하시던 이모가 내 손을 잡고 사천 평안사로 데리고 가셨다. 자초지종을 들은 주지스님께서는 한 마디를 꺼내셨다. “그렇게 마음이
아침은 힘들었다. 그날 하루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 예불문부터 주력까지 아침마다 108배를 포함해 30분에 이르는 수행과 기도를 하는 게 쉽진 않다. 그래도 했다. 오히려 수행을 하다보면 정신이 맑아져 좋았다. 간혹 부득이한 경우가 생기긴 했다. 출장을 갔을 때 같은 방을 쓰는 분이 불자가 아닌 경우다. 내가 절을 하면 상대방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만큼 웬만해선 일과수행을 빼놓지 않았다. 일과수행을 거듭하면서 달라진 부분은 적지 않다. 가장 큰 변화는 ‘긍정으로의 전
얼마 전 ‘루시’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는 참나를 떠올리면서 영화에 푹 빠져 감상을 하였다. 영화의 내용인즉, ‘CPH4’란 임산부가 임신 6주차에 만들어 내는 화학물질로 아주 극소량이라고 하더라도 아기는 핵폭탄에 버금가는 초인적인 힘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힘을 뼈를 구성하는 에너지로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CPH4를 주입받은 주인공 루시는 뇌의 활용량을 늘려가고, 결국 100%까지 사용하게 되자 설명이 불가한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과학적인 증명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은 뇌의 2~5% 가량을 사용한다고 본다. 19
부처님을 믿게 됐다. 감사예경을 끝내고 명상하는 동안 눈물이 났다. ‘우주법계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 부처님의 자비란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벅찬 마음으로 가족여행 일정을 시작했다. 입가에 부처님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부모님도 방콕 사원들을 둘러보시며 연신 “좋다, 좋구나” 하셨다. 행복해 하시는 얼굴을 보니 무척이나 뿌듯했다. 동생도 편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이틀째 새벽이었다. 감사예경을 끝내자 전날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온 방콕이 나를 사랑해 주는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날 일정 중에 어머니께
“신이나 종교는 없다.” 학부 때 철학을 전공하며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 법왕정사를 몰랐을 때였고, 청견 스님 법문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시절 이야기다. 그래서 무슨 인연이 닿아 지금 여기서 수행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아, 내 스승님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청견 스님 법문은 명쾌했다. 때로는 신랄했다. 신앙보다는 내 머릿속 이성이 먼저 반응했다. 스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법문에서 항상 강조하는 수행이 스스로 너무 부족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감사와 경탄이 우러나오지 않아 딜레마에 빠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광명사 주지이신 목종 스님으로부터 능엄경을 공부하는 동안에 나는 스스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했다. 욕심과 집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7년 넘게 멀다않고 다니던 정든 절을 과감하게 떠나왔다. 인연 따라 강물처럼 흘러가리라 변명하면서. 대광명사에는 내가 갈망하던 참선방이 있어 더욱 좋았다. 이제 이곳을 나의 마지막 수행처로 삼고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열심히 살리라’고 나에게 다짐한다. 칠순 기념으로 작년에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부다가야에서 룸메이트와 둘이서 간절히 기도한 순간을 잊
푹푹 찌는 듯했던 폭염이 한풀 꺾이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가을 소식을 전해 주더니 이제는 어느새 차디찬 바람이 몰아치며 오색 단풍들마저 점차 자취를 감추는 겨울이 목전에 찾아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재가안거 동안거 수행에 입재했다. 세간생활을 하는 재가불자들이 결제와 해제를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거 기간 동안 도반들과 더불어 수행의 열정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소중하다. 오늘도 108배로 하루의 문을 열며 그간의 수행 기록을 조심스럽게 열어보고자 한다.나는 안거 기간과 상관없이 현재 매일 천일기도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