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당부처럼 인생의 수레바퀴에는 빈틈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날 내가 저지른 것을 받는 것이었다. 욕심을 놓고 억울함이 떠오를 때마다 비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미 갖추고 있는 존재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나를 믿는 마음을 더 키워나가면서 어느새 견디기 힘들었던 그 어려웠던 시간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4년이 흘렀으니 돌이켜보면 내겐 정말 큰 공부였다. 그리고 그 시련이 있었기에 참선 공부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어느덧 안거를 수차례 보냈다. 매번 안거를 맞이하면서 조
매번 안거 때마다 이번 안거는 나를 더욱 성숙시키는 수행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난 하안거를 돌이켜보고, 다가오는 동안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두서없는 글을 쓴다. 불교와의 만남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암자를 오가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늘 두 손에는 보시물을 들고 걸어서 산사를 향하는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를 참 예뻐해 주셨던 스님들의 미소도 떠오른다. 하지만 결혼 후 나의 삶은 부처님오신날 연등을 달기 위해, 연등 구경을 하기 위해 절에 오르는 무늬만 불자였
스님께서 무문관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맏며느리로 설이 다가오는데 무문관에 올라간다는 것은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며칠 후가 결혼기념일이어서 더욱 마음에 걸렸다. 아무 말 없이 무문관 수행을 허락해 준 남편과 딸이 고마웠다. 미안한 맘을 뒤로 하고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고 지금보다 더 나쁘지 않음에 감사하고 살자.” 좌우명에 얹혀 가기로 했다. 하루에 두 번 2층 환희선원에서 차크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잠자는 4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무조건 좌선을 했다. 총 5일 용맹정진을 했다
15년전 쯤 능인선원 31기 불교대학 재학 중 새벽기도를 하고 졸업 후엔 봉사도 하며 살았다. 어린 자녀들을 돌보느라 힘들긴 했지만 초발심에 즐겁게 다닐 수 있었다. 도중에 집안에 일이 생겨 그만두고 능인선원을 떠나기 전까지….아이들 키우고 집안일 하느라 기도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겨우 집 가까운 동네 사찰에서 입시기도만 하고 살았고 입시가 끝남과 동시에 잊어버렸다. 신심 날 땐 집에서 혼자 몇 개월간 염주 돌리고 경전 읽고 몇 시간씩 기도를 할 때도 있었지만 꾸준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부처님을 모르고 그냥 이름만 불자
무량한 법의 바다에 빠져 본 사람은 알 것 같다. ‘법화경’ 공부에 푹 빠져독송 외 사경수행도 병행애착 없는 평화의 삶 발원불단에 꽃 공양 환희로워해도 해도 끝없는 경전 공부가 환희심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법화경’을 독송하고 읽고 해석하는 시간과 더불어 쓰는 사경 수행도 추가했다. 경전 구절을 다시 쓰다보면 그 내용이 더 쏙쏙 가슴에 새겨지는 느낌이 든다. 수행에 회향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수행을 입재하고 회향하는 한 단락을 매듭 짓는 일은 감회가 남다르다. ‘해냈다’는 성취감, ‘나도 수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니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니라.”일본어 선생님 관둔 뒤붓다 가르침 세계 입문멀게 느꼈던 수행이지만‘법화경’ 독송하며 감동이 게송은 영단을 향해 관음시식할 때 익히 듣는 게송이다. ‘법화경’ 4구게이며, ‘법화경’의 주요사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제2요품 방편품에 기술되어 있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제나 고요한 모양이니 불자들이 이러한 도를 행하면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리라.’ 이 얼마나 엄청난 가르침의 게송인가? 이 게송 하나만 받아 지니고 외우고 바로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 알야 바로기제….”단순하게 시작된 수행평소 겪는 모든 일에자리이타 평등심 갖고고맙다는 원 세우게 돼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을 시작했다. 입 안에 가득히 고이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좋은 긍정적인 기운을 줬다. 건강해지는 기분이랄까?건강해지는 기분과 더불어 차츰 다라니 수행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마음가짐 또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다라니를 지송
어디부터였을까. 정확히 돌이켜보자면, 언제부터였는지가 맞다. 누구에게나 시작에는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가 기억이 난다. 기억에는 소리 흐르고 냄새가 묻어난다.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책을 읽었다. 독서라기보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소리 내서 읽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나름 어떤 리듬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을 독경했다. 그리고 집에선 항상 향 내음이 났다. 자식 잃은 엄마의 기도심정 헤아리지 못했지만독경·향내음 기억에 남아불연 맺고 다라니 시작그땐 참 어렸다. 엄마가
‘금강경’ 공부 이전에는 가망성 없어 보이던 것이 있다. 사기당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진행하던 형사고소 2건과 민사소송 5건 등 총 7건의 소송이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안 된다’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고,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더욱 정진수행하게 됐다.불면증에 시달리다 숙면힘겨웠던 소송 모두 승소‘금강경’ 인연 맺기 앞장‘금강경’을 독송하기 전에는 잠을 자도 숙면이 되지 않았다. 보통 서너 시간 지나면 잠이 깼다. 울화, 번뇌, 망상, 잡념 등이 생겨 잠을 설치기 일쑤여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
요즘 시대의 직장은 정년이 보장 되지 않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들은 조기 퇴직하게 되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늘 걱정하며 살고 있다. 나 역시 조기 퇴직에 대비하여 법인을 설립하고, 사업을 위한 자금을 모아두며 미래를 대비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급한 마음과 탐심이 나의 지혜를 어둡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나는 평소 곤경에 빠진 이를 돕는 것을 즐겨한다. 지인 부탁으로 개발사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
완전히는 아니지만 천천히 마음의 내려놓음을 알게 되었고 내려놓음을 통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려놓음을 반복했다. 걱정을 내려놓자 그 자리에서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샘솟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같이 기도를 하는 도반들의 기운은 상승작용이 되었다.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좋은 에너지를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다.‘반야심경’ 사경하면서 ‘천수경’ 독송도 100일1000일 회향 뒤 재입재“불자로서 살아가는 힘”처음 100일 1차 기도를 할 때는 ‘천수경’ 독송과 ‘반야심경’ 사경으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도를
나에겐 불교란 무엇일까? 스스로 이 질문을 자주 하곤 한다.동자스님 태몽으로 출생결혼 후엔 점점 멀어져가족에게 힘든 날 닥쳐홍법사서 ‘참기도’ 입재먼저 답을 하자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밝히고 싶다. 나의 전부이고 생활의 일부이고 필연이라고 말이다.친정 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신심이 두터운 분이셨다. 특히 친정아버지는 불교의 수행과 불교 공부에 항상 매진하셨던 분이다. 그리고 친정어머니께서는 나의 태몽도 아기 동자승 꿈을 꾸었다고 하시니 보통 인연이 아닌 점은 분명하다. 보통은 기독교에서 모태신앙을 말하지만 나야말로 불교가 모태신앙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 끝에 처음 인연이 닿았던 스님을 수소문하여 전주로 내려갔다. 스님은 다시 대비주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스님은 내가 몸으로 다 받아내야 한다고 하셨다. 남편의 주사도 힘든 일을 하는 것도 몸이 아픈 것도 모두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들이니 거부하지 말고 다 받아들이라고 하셨다. 한동안 절에 머물면서 대비주 기도를 하니 몸이 점점 살아났다. 비로소 나의 기도인연은 대비주 기도가 근원임을 깨닫고 다시는 대비주 기도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힘들던 피부 관리 마사지대비주 수행으로 복전 돼10만독 성취에 심신
1997년 12월1일 새벽, 기차에서 내렸다. 공기가 찼다. 남편 주사폭력 피해 탈출식당일 하다 대비주 만나몸과 마음 편안해지려다 신내림 받으란 얘기 들어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머릿속 혈관들이 마구 펌프질을 했다. 배에서 바깥바람보다 더 찬바람이 회오리쳤다. 딱딱한 발바닥이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데다 깨질 듯한 두통으로 고개를 들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욱신거리는 몸이 그만 맨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24살에 결혼하자마자 남편의 주사와 폭력이
부산 대광명사 목종 스님 말씀은 참선반 수행을 함께 하면서 한결 쉽게 와 닿았다. 참선반을 이끄는 진희 보살님의 당부도 늘 귀감이 됐다. 특히 “부처님의 진리는 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로 일상 전체에 녹아 있다”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겼다.경전에만 있는 게 아닌일상에 녹아 있는 진리말씀 가슴에 새겨 수행매사 감사하며 긍정 찾아나 바뀌니 남편도 따라와매사에 감사하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면서 웃을 일이 많아졌다. 가족을 대할 때 화를 불쑥 내기보다 화가 나려는 상태를 지켜보는 연습을 반복했다. 몸의 고통은 마음에서 비롯됨을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다. 온몸 관절 통증으로 앓아망설임 없이 참선에 입문부정적인 생각부터 고쳐시어머니 불만서 나 찾아참나 찾아가는 여정 몰입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으로 인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온 몸의 관절에서 오는 통증으로 인해 정확한 병명도 없이 끙끙 앓는 나날만 이어졌다.몸과 마음까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절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50세가 넘도록 불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절을 해 본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로 종교에 대해서는 담을 쌓고 살던 삶이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수행하며, 부족하지만 나보다 더 힘든 분들을 도우려 마음을 내었다. 그런 시간들이 어느새 10여년이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기적들을 지켜보며 절 수행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가장 최근에는, 30년 가까이 아픈 상처를 안고 자신을 포기한 채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절 수행으로 온 몸과 마음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도반의 기적을 지켜보았다. 매일 절 수행으로 깨어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는 흥분했다. 누구나 절 수행을 하기만 하면, 자신의 삶을 100% 바꿀 수 있는 이 엄청난 환희 앞에서 나는 새롭게 발심을 했다
철야 기도를 다녀오다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났다. 도반 한 분이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다. 내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외상이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 온몸이 돌처럼 굳어왔다. 마음도 굳은 몸에 갇혀 버렸다.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가슴과 머리가 터질 듯이 조여오며 통증이 이어졌다. 눈은 새빨간 토끼눈에 얼굴은 홍당무, 온몸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두려움과 초조 불안으로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어졌다.돌처럼 굳는 사고 후유증살기 위해서 절하기 시작숨길 트였지만 절은 엉망새로운 삶을 위해
요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등을 배접하는 운력에 동참하고 있다. 등을 만드는 일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동참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도반들이 있어서 더 고마운 시간이다.이렇게 거의 매일 절에 가는 나를 보고 남편은 “절에 너무 빠져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남편이 이 공부를 같이 한다면 좋을 텐데’라는 서운함이 앞섰다. 하지만 그 마음도 곧 내려놓게 됐다. 내가 밝아지면 주위가 모두 밝아진다는 말을 믿기 때문이다. 남편이 지적할 때마다 내가 더 잘해야 되
부모님은 장남으로 살아왔다. 나 역시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항상 그림자처럼 책임감이 뒤따랐다. 장녀라는 책임감에 압박‘나’ 버리는 공부에 몰입상념·수마 극복이 관건매일 ‘천수경’ 후 좌선‘나’라는 단어는 늘 부담스러웠고 힘들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그런 무게감을 덜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 쉼을 처음 경험한 곳은 외할머니의 49재였다. 결혼도 하기 전인 처녀시절이었다. 불교를 몰랐던 당시엔 사찰이 주는 고요함과 평온함에 이끌려 절에 다니게 됐다. 나름 기도하며 소원도 빌었다. 결혼 후에도 꾸준히 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