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는 좌우와 남북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한, 아니 모두에게 버림받고 그래서 오래도록 잊고 지낸 이름이 많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출신으로 알제리 해방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 프란츠 파농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우리 현대사의 이런 상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축소와 확대라는 이중의 왜곡에 희생된 가장 불운한 사상가에 속한다. 먼저, 프랑스에서 파농은 너무나 불온해서 언급하기 거북한 인물이다. 그는 우파 쪽에서 보면 모국 프
이 책을 쓴 알렉상드르 졸리앵은 ‘트럭운전사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를 부모로,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 태어났다.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고, 세 살 때부터 17년간 요양 시설에서 지냈고, 태어난 이래 하루도 어려움이나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불편과 고통, 난관에 수없이 부딪히면서’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하게 되고 철학에 빠져들었다.그는 5년 전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선(禪)을 만나고, 또 그 인연으로 아내와 함께 한국에 와서 살면서
이 시대 대표 사상가 신영복이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붙여 선물한 이 책은, 오래 전 그가 세상에 내놓은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 이어 독자들과 함께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세계와 자신을 변화시키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떠난다.책 전체에 걸쳐 그는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지지만, 변방이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강조한다. 이는 따로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을 낼 정도로 신영복의 사유와
엘살바도르. 가톨릭 국가이지만 저자의 동료 신부들 여섯 명이 대학 안에서 정부군에 살해될 정도로 처참한 고통과 슬픔의 땅인 이곳에서 이 책이 태어났다.과연 ‘해방신학’이 무엇인가. 옮긴이가 짧고 분명하게 정리한 대로, 해방신학은 “신앙의 그리스도보다 역사의 예수를, 구원보다 희망을, 부활보다 하느님 나라를, 예수의 고난보다 저항을 더 선호한다. 그리스도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을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중심이라고 여긴다. 가난한 사람의 운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현재도 그렇고 지나온 기독교 역사도
세계적으로 기독교 성장세가 주춤한데, 그 바탕에 무신론자 증가 추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그럼 왜 무신론자가 늘어날까?이찬수에 따르면, “세계가 변하고 언어가 달라지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천당에 계신 하느님은 영원불변하다며 고집하다가” 새로운 신자의 유입은 말할 것도 없고, “고민하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존 신앙을 의심하고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는 것이다.저자가 보기에 “성서에서 묘사하는 신은 사실상 성서 안에도 갇히지 않는 초월자다. 그리고 보편자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거
“환경은 거대하고 복잡한 생명의 기계이다.” 환경위기는 “우리의 생물학적 자산이며, 우리의 모든 생산 활동이 의존하고 있는 근본”인 이 기계를 파괴하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다.이 신호를 알아챈 과학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들은 대부분 환원주의에 사로잡혀서 “자연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 요소들을 하나씩 떼어내어 작은 단위로 환원시켜 분석해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떼어내어진 작은 현상을 모두 합치면 마침내 전체를 이해할
야생 침팬지의 도구사용과 잔인한 폭력성 등을 관찰하여 세상에 알려 유명해진 제인 구달. 이제 이 땅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그는 평범한 영국 소녀였다. 그러나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고, 세계 학계를 크게 흔들었다. 그러니 제인 구달과 루이스 리키의 만남은 어느 유행가 가사에서 말하듯, ‘우연이 아니라’, 숱한 전생 동안 쌓아온 인연의 결과였으리라.루이스 리키와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었듯이, 얼핏 우연처럼 보이는 ‘침팬지의 도구 사용 장면 발견’도 관찰대상 동물들에게 번호를 붙여 대상물로
“악마도 성서를 인용한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순종, 복종이라는 단어”가 본래 의도와 다르게 잘못 쓰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순종 대신 존중이라는 단어를 쓰겠다” “종교라는 무대에는 언제나 정치라는 그림자가 배회”한다면서, “불의한 정치권력과 불의한 종교권력은 한 패거리”라고 야단친다. 이것은 가톨릭뿐 아니라 모든 종교권력에 보내는 경고이면서 불복종선언이 아닌가.지장보살의 “모든 중생이 지옥 불에서 나올 때까지 자신은 지옥에 머무르겠다”는 자세를 언급하며 “구원 이기주의에 물든 사람은 자신도 구원받지 못할 뿐더러 이웃의
붓 뚜껑에 목화씨를 숨겨온 문익점을 비롯해서 동서고금의 역사에 숱한 산업 스파이가 있었다. 이 책은 세계 질서의 재편까지 가져온 중국 차(茶) 도둑 겸 산업 스파이와 그가 미친 영향을 재미있게 풀어간다.19세기 전반 “인도는 아편을 공급하고 중국은 차를 공급했으며, 영국은 그 두 가지 모두에서 자기 몫을 챙겼다.” 그런데 “만약 중국이 아편을 만드는 양귀비를 합법화한다면 영국은 더 이상 차를 수입하고, 인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국내에서 공공사업을 벌일 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중국의 최고급 차 산지들과 조건이
12세기 서양에서는 후추가 귀금속처럼 귀했다. “지금은 음식점 테이블마다 놓여있어 자칫 잘못하면 모래가루처럼 엎질러지곤 하는 후추를 12세기 무렵에는 하나하나씩 알갱이를 세어 계산했고, 무게 당 가격이 은값과 같았다. 심지어는 후추로 땅을 사기도 했고, 지참금을 지불하거나 시민권을 사기도 하였다.”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향료를 절실히 필요로 한 곳은 가톨릭 교회였다. 유럽의 수천, 수만의 교회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향로를 피워 흔들려면 향료 낱알이 수억, 수십억 개가 필요했다. 그런데 유럽 땅에서는 단 한 톨도 자라나지 않았으니 결
옮긴이 신재식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오늘의 한국 교회를 비추어보는 중요한 거울이다.” 그런데 이 책은 한국 불교계, 아니 한국 인문학계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이정용은 말한다. “우리 삶의 경험을 다루지 않는 신학은 어떤 신학이라도 살아 있는 신학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삶을 신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이기에 이론과 실천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신학도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이 이정용의 신학에만 해당될까? 불교학·철학, 아니 그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학문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 아닌가.“예수는 주변인으
독일 패전 뒤 아르헨티나로 숨어 ‘아주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던 나치스의 제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11일 저녁,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스라엘 정보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약물이나 밧줄, 수갑 등도 사용하지 않았고, 어떠한 불필요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자신에게 언젠가 닥쳐올 일이라는
세대 차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에 불과한 조선 중기에 스물여섯 살 차이가 나는 퇴계(退溪)와 고봉(高峯), 이 두 인물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논쟁도 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다.‘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싶다’는 고봉의 편지를 받은 퇴계가 어른답게, 한편으론 대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말한다. “이것이 제가 그대 앞에서 깊이 옷깃을 여미는 까닭이며, 한편으로 그대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벼슬을
청(淸)의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는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1661∼1722)이 가장 길다. 소수 이민족 출신 청나라의 거대한 중국대륙 지배는 이 시절에 확고한 기반을 다져, 그 뒤 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현재 중국이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는 타이완·신강위구르 지역 등에까지 영토를 넓히게 된 것도 이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이다.또한 한자 사전의 모범이 되는 ‘강희자전’과 역대 고전을 집대성한 ‘고금도서집성’ 편찬을 추진하는 등 중국의 전통문화 부흥과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인물이 그이다. 그는
지난 2004년 제자 강의석의 교내 예배 거부와 그에 이은 징계[除籍]를 막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15년 간 재직하며 정들었던 학교를 떠난 전 대광고 교목실장 류상태. 몇 차례 만난 그에게서는 ‘투쟁하는 운동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감히 건드리기 어려운성역인 한국 기독교의지독한 배타성에 일갈다름 인정이 교회 개혁누가 보아도 ‘착한 예수님 제자’인 그가 ‘한국교회가 예수를 배반했다’면서, 누구도 건드리기 어려운 성역(聖域)인 한국 기독교, 나아가 한국 종교계에 ‘바위에 달걀 던지기’보다 더 무모해 보이는 일을 하였으니, 그야
답답하고 어두운 세상에 자비의 미소를 전해주는 제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쵸. 이제까지의 열네(14) 명 중 하나이고 앞으로 더 많은 달라이라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달라이라마’를 유일한 ‘달라이라마’로 알고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그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는 티베트인들의 신앙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실제로 증명해주는 그의 ‘말’과 ‘행동’,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을 탄압하면서 ‘악마의 화신’이라고 비난해대는 중국 정부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잃지 않는 사랑 가득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한 이래, 가톨릭을 넘어 온 세상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지난 8월 이 땅을 찾아 그가 전하고 간 유언·무언의 메시지들은 그 바람을 거스르기 어려울 것임을 우리 종교계와 사회에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로마로 돌아간 그는 실제로 얼마 전 교황청 내 보수 강경파의 선두인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66)을 세속국가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교황청 대심원장 직에서 해임하고, 추문에 휩싸인 고위 성직자를 구금하는 등 구체적인 개혁조치들을 보여주고 있다.국내 교회에도 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지난 11월
일본인들 중에서도 이제는 일왕(天皇)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지 않겠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대(代)가 끊어진 적이 없는 신의 아들’이라는 엉터리 신화를 위해서라도 다음 왕이 될 사람은 성(性)적으로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히로히토가 열다섯 살 때에 아버지 다이쇼(大正) 천황은 자신의 젊은 후궁을 아들의 거처로 보내 아주 인간적인 점검(?)을 한 적이 있다.“그 여자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이어 성인식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성 폭행범을 살해하였다가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하여, 지난 10월25일 사형이 집행된 스물여섯 살의 이란 여성이 남긴 유서에서 ‘진심으로 어머니가 내 무덤에 와서 울고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이 책 ‘정절의 역사’에서 마주친 조선 여성들을 떠올리며 ‘여자로 태어나는 죄가 이리 무거운가?’ 자문(自問)하였다.정절(貞節)은 조선시대 이 땅의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던,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도 안고가야 했던 무거운 짐이다. 본래 ‘정절’은 지극히 개인적인 덕목이지만, 조선시대의 시공간(時空間) 상황이 이것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른 가족관계에 비해 훨씬 더 폭발적인 사회·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의 여러 인간관계 중에서 피(유전자)를 나눈 아버지(어머니)와 아들(딸) 사이보다 더 가까운 곳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영조와 그 아들 사도세자의 경우와 같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면서 아주 극단으로까지 치달았던 사례는 동서양 역사에 숱하게 많았고, 가까이는 1995년 초 대학교수 아들이 재력가 아버지를 무참하게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