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30일 입적 동국학원 이사 역임 32개국 120개 선원 개설 한국 선불교 보급에 헌신 “스님은 저와 제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삶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평정을 심어주셨습니다. 비록 대선사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스님이 남기신 가르침과 정신적 유산을 통해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꾸려 나갈 것이라 확신합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스님의 입적을 애도합니다.” 지난해 11월 숭산 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대통령 선거 입후보자 존 케리 상원의원은 애도전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비록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 출신의 수행자였지만, 숭산 스님의 법력은 이미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미치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
해원 황의돈 거사는 교육자이자 사학자로 활동하며 한국 근·현대사학을 개척한 인물이다. 일제시대 보성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등지에서 후학들에게 한국사를 지도하면서 민족주의 사관을 심어줬을 뿐 아니라 『조선통사』등 수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비뚤어진 한국사를 올곧게 복원하려 노력했다. 1890년 음력 9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황의돈 거사는 가까운 인척이 한말의 문인 황현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유학자의 가문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워 4살 때부터 『천자문』, 『소학』,『동몽선습』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16세에 이르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모두 익힐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17세 되던 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에 입학해
1992년 11월 22일 입적 BBS 설립-「다보」창간 장경호 거사 유업 계승 대중불교 결사 주창 중원 장상문 거사. 그는 선친인 장경호 거사의 유업을 받들어 한국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1922년 12월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난 장 거사는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때 전체 학생 150명 중 15명뿐인 조선인 학생들의 모임을 결성, 친목과 조선인들의 단합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돼 그는 반일단체 불령선인으로 체포, 부산, 영주, 대구 등지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시기 그는 옥중에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해 훗날 그가 외무부 정보국장, 유엔대사, 대통령 국방외교비서관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칠 수 있는 기초실력을 쌓았다.
1973년 11월 18일 입적 효봉 스님과의 인연으로 무소유 실천 원력 세워 사재로 법련사 건립 “아끼고 탐냄은 삼독의 하나이니 업으로 인해서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고, 보시는 육바라밀 중에 으뜸이니 선업의 근본으로 복락을 누리게 된다.(중략) 여기 남달리 신심이 견고하고 희사를 좋아하는 장한 청신녀(淸信女)가 있으니 그가 곧 법련화 김부전 여사이다.” (송광사 김법련화 공덕비 중에서) 법련화 김부전 보살은 그의 공덕을 기리는 탑에 언급돼 있는 것처럼 희사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50∼60년대 복지시설이 미약한 시절, 불교계 최초로 불교양로원과 보육원을 설립해 갈곳 없는 노인들과 부모 잃은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는가 하면 자신이 평생 모은 사재를 털어 송광사 서울 분원인 법련사가 건
2004년 11월 14일 입적 총무원장 등 요직 역임 왜색불교청산 이끌어 역경-어린이 포교 견인 석주 스님은 그 자체로서 20세기 한국불교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격동의 세월을 온 몸으로 겪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정화 등 지난하기만 했던 100년의 한국불교사가 스님의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석주 스님은 경술국치 바로 전해인 1909년 경북 안동의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인 1923년 “형제가 다섯이나 되니 한 명은 절에 보내야 한다”는 집안의 결정에 따라 선학원에 주석하던 남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면서 불문에 귀의했다. 이후 6년 간의 행자 생활을 마친 스님은 1928년 부산 범어사에서 남전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49년 비구
1989년 10월 입적 불교음악연구원 첫 원장 삼보법회 합창단 창단 찬불가 수백 편 작곡 “불교음악을 위해 불교음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위해 불교음악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불교음악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음악은 ‘진리의 언어’이며 ‘진리의 얼굴’이어야 한다.” (서창업의 『찬불가』 서문 중에서) 우성 서창업 거사는 한국 현대불교음악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렇다할 찬불가조차 없던 70∼80년대, 서창업 거사는 수많은 찬불가를 작곡, 지역 사찰 합창단 창단을 이끌면서 음성포교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28년 일본에서 태어난 서창업 거사는 광복과 함께 부모를 따라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원래 음악에
74년 7월 2대 종정 취임 천태종 체계확립 견인 불자 직접만나 신행 상담 종단 안팎서 존경받아 천태종 제2대 종정 남대충 스님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소백산자락 여의생 마을에서 출생했다. 영양 남씨 가문의 부친 명진 씨와 모진 안동 김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익순이다. 스님은 21세 되던 1945년 지금의 천태종을 세우고 중흥시킨 상월 스님이 소백산 백자리 연화지를 찾아 나설 때 길을 안내하는 인연을 맺어, 천태종에 몸담았다. 같은 해 음력 1월 16일 구인사에서 상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대충(大忠)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후 오랜 기간을 스승 상월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마음을 닦는 수련에 전념하던 스님은 67년 3월 드디어 상월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965년 10월 3일 입적 통도사 주지 3회 역임 독립자금 지원 증거 발견 위장 친일 논란 일기도 구하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불교계의 중심 축을 담당하며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명진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썼는가하면 40세의 나이에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후 14년에 걸쳐 연임하며 개혁을 이끌었으며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피선돼 당시 불교계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1875년 울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 되던 해 천성산 내원사로 입산해 1889년 경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에서 강
1974년 9월 28일 입적 한의사법 입법으로 동양의학 현대화 견인 재가불교 신행활동 주도 동명 여원현 거사는 서양의학에 밀려 그 명맥조차 유지하기 힘든 위기에 놓였던 한국 전통의학인 한의학을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1950년대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에 의해 한의술이 불법으로 내몰릴 무렵, 여 거사는 동료 한의사들과 함께 한의사법을 입법화 시켰을 뿐 아니라, 현 경희대 의과대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을 설립, 동양의학을 현대화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12년 충북 영동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여 거사는 교육열이 높았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명심보감』, 『소학』,『대학』등을 익히며 그가 훗날 한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이후 조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
2003년 9월 23일 입적 성철 스님 은사로 출가 유학 통해 해외포교 발원 97년 연등국제선원장 역임 원명 스님은 숭산 스님과 더불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국내보다는 외국에 더 머무르면서 러시아를 비롯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말레이시아 등지에 한국불교 분원을 개설하는가하면 수많은 외국인 후학들을 길러내면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1950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스님은 스물 살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이 따를 정도로 후학들에 있어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은사 스님의 영향은 아니더라도 스님은 출가 후 줄 곧 수행에 전념하며 수행자의 본
1981년 9월 8일 입적 59년 동국대 사학과 교수 신라정토사상연구로 박사 역사-불교 학제간 연구 하정 안계현 박사는 1960∼70년대 국사학자로서 한국불교에 천착하면서 한국불교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당시 한국불교사 연구가 주로 고승들의 전기나 사상 혹은 종파 및 중요 사찰에 국한된 연구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안계현 박사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불교사의 사회적, 시대적 배경과 토착적 전개 과정에 주목하면서 거시적 관점에 한국불교사를 이해하려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1944년 경북 공립중학교와 45년 춘천사범학교 강습과를 마친 안 박사는 학업에 대한 열정을 늦추지 않기 위해 그 해 동국대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왜곡된 한국
(1912~1998) 1998년 9월 15일 입적 의료봉사-포교에 전념 대한생활불교회 창립 재가불교 활동 강조 춘뢰 고자화 거사는 한 생애를 불교 포교에만 전념하며 재가불교 활동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불교 병원을 개원해 무료 의료봉사를 통해 포교활동을 펼쳤는가 하면 사단법인 대한생활불교회를 설립해 재가불교 활동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12년 제주도 북제주군에서 태어난 고자화 거사는 21년 제주 보성의숙 4학년을 졸업하고 이후 여수부산학교를 진학했으나 1929년 일제에 맞서 싸운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강제 퇴학 당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법대 전문부 2학년을 수료하고 법학도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고 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