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7일 문화재청장 일행 10여명이 강원도 원주시 법천사지를 찾아 원주시청 관계자와 ‘지광국사현묘탑(이하 ‘부도’) 이전 및 보존방안’ 등을 논의했고, 얼마 뒤 “지광국사탑을 원래 있던 법천사지로 이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부도는 조각이 뛰어나서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해서 20세기 초 이래로 숱한 고통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번 이전 결정 소식을 전하면서 ‘미인박명 지광국사탑의 파란만장한 파괴 유랑기’라고 한 일간지 기자의 한마디에 이 부도의 기구한 운명이 담겨있다.1911년 9월 일본인 모리라는 사람이 법천사 터
1994년 봄, 길고 긴 고통을 겪은 끝에 이른바 ‘조계종 개혁불사’가 이루어지고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신군부 세력의 압력을 받아 자리를 강제로 떠났던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되고, 새로 들어선 총무원 집행부는 종단 역사에 볼 수 없었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승격하면서 행정 중심의 총무원이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업을 기획해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이렇게 새 출발한 포교원은 이듬해인 1995년에 ‘한국불교 중흥 제1차 5개년 포교사업계획’을 수립하고 1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이승만 정권은 1951년부터 개신교와 가톨릭에게만 군종장교 제도를 허용하고 당시 최대 종교였던 불교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이 어려움이 풀리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베트남 전쟁 참전에 따른 정부와 군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외부 요인 말고 불교계의 군종제도 진입과 군대 내 포교를 위해 애쓴 인사가 있었던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1967년 4월18일, 당시 국방부 인사국장 정승화 소장이 불교계의 군종 참여를 요구하던 대불련 대표들을 만나 ‘국방부의 군승제도 실시 원칙’을 확인하였다. 면담 자리에서 정승화
옛 스님들의 행적이 담긴 문서기록과 비문을 읽다보면 ‘사자사문(賜紫沙門)’이라는 표현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임금이) 자색 (법복)을 내려준 (명망 높은) 고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시대에는 출가수행자와 성직자도 왕에게 공식으로 인정받아야 자신이 속한 교단과 일반대중에게 그 위상을 드러낼 수 있었으므로, 이 ‘사자사문’이라는 표현만 갖고 “당시 불교가 너무 권력에 의존했다”고 비판할 것까지는 없다.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에, 그것도 다종교사회에 들어와서까지도 대통령을 전제왕조시절 임금과 같은 존재로 여기
이승만은 집권 시절(1948년8월~1960년4월) 장·차관 임용이나 군장성 등 정부 요직을 개신교인 위주로 인선했다. 불교인의 경우 사회부 장관 전진한(1948년8월~1948년12월), 내무부 장관 백성욱(1950년2월~1950년7월), 문교부 장관 김법린(1952년10월~1954년4월)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단 한 명의 장관도 임명되지 않았다. 이런 독재체제를 구축한 뒤 1954년11월 이승만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안’을 강행 통과시켜 종신 집권을 기도하였다.그런데 당시 이승만의 전횡에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1년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 군종 장교제도를 시행하였지만, 불교계의 참여 요구에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하던 정권은 기독교에 비해 20여년이나 늦은 1967년 4월18일 ‘군승제도 실시 원칙’을 확인하였고 그에 따라 최초의 군법사가 임관된 것은 1년 뒤인 1968년이었다.물론 불교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군종 장교제도 참여를 요구하였지만, 정부에서는 ‘자격자 부족‧기존 종교와 불화 우려‧종단 내 불협화음으로 인한 군내 악영향…’ 등을 불가 이유로 내세웠다. 한편 기독교계에서는 “불교가 무신론을 내세우기 때문
“일본은 국가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확장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거나, 도덕적 이상에 반(反)하더라도, 실현만 가능하다면 자신들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1927년 2월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반제국주의대회’에서 20대 청년 범산 김법린이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한 프랑스어 연설 중 한 대목이다. 범산이 각종 통계수치를 제시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민통치’를 조목조목 따진 이
“내 나이 열두 살 때(1910년)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통곡하는 어른들의 그 몸부림을 보았다. 그 분들의 서러워하던 그 모습이 내 인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던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평생 동안 조국독립의 염원이 유일의 신념처럼 몸에 배었을 것이다.” 1963년에 나온 ‘내 인생 편력의 회랑에서’라는 글에 실린 범산 김법린(이하 ‘범산’)의 회고다. 범산은 1919년 3‧1운동 거사 당시 만해 스님의 지도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출가사찰인 부산 범어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
1924년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용성 스님의 회갑연이 열렸다. 자리는 소박했지만, 불교 개혁과 민족 독립에 투신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스님의 환력(還曆)을 기리는 진심어린 축하가 각계 인사들에게서 울려 퍼졌다.용성 스님과 오랜 교분을 이어오며 뜻을 같이 했던 선암사 경운 스님과 통도사 경봉 스님은 “진리의 바다에서 신령스런 용처럼 경론을 번역하시고/ 율문(律門)의 맹호가 되어 선림(禪林)에 드셨도다/ … 뛰어난 노승들이 다 칭송할 뿐만 아니라/ 꾀꼬리와 제비도 참례하여 축하시를 읊고 있네.”(경운), “경전을 번역하여 육안을 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정부와 민간 각 분야에서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100년 전 이 운동을 계획하고 전국에서 큰 울림을 이끌어낸 불교와 천도교 등 종교계에서는 3‧1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앞으로 3‧1운동의 정신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평화와 인류화합에 기여하는 등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내놓고 있다.돌이켜보면 우리 불교계는 3‧1운동 과정에서뿐 아니라 그 뒤 수십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 강압 통치에 저항하다가 곤혹을 치르는 분들도 많았고, 적
지난 3월28일, 참석 대중이 많은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조계종 역사에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봉은사 일주문 환지본처를 위한 협약’ 체결식. 일주문이 본래 있었던 서울 강남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과 10여 년 가까이 이 일주문을 잘 지켜준 양주 오봉산 석굴암 주지 도일 스님이 총무원 문화부장 현법 스님과 함께 활짝 웃으며 “아무 조건 없이 일주문을 봉은사로 환지본처(還之本處)한다”는 협약을 체결한 것이다.조선 중후기에 꺼져가는 한국불교의 불씨를 살려냈던 봉은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뒤이은 혼란기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외부
100년 전인 1919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해 중일전쟁 악화에 따라 충칭(重慶) 등으로 옮겨 다니며 민족의 숨을 이어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이하에서는 백범)는 23살이던 1898년 충남 마곡사에서 하은(荷隱) 스님을 은사로 출가, 원종(圓宗) 스님이 되어 수행자 생활을 하는 등 불교와 인연이 깊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해방 뒤 고국에 돌아와 마곡사와 여주 신륵사 등을 방문한 기념사진이 남아 있다. 1947년 9월23일에 신륵사를 찾은 것은 3‧1운동에 대중들이 적극 참여했던 데 대한 보은의 의미가 있었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운동과 불교개혁 분야에서 큰 자취를 남긴 용성 스님에 대해 최근 새롭게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다행이다.용성 스님은 독립운동과 도심포교를 비롯한 불교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주 귀한 자취를 남겼다. 이 모두가 선구적인 역할이었던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문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불사에 원력을 세워 실천에 옮겨서 ‘경전 한글화의 주춧돌’을 놓은 것은 특히 빛나는 일이다. 용성 스님이 경전 번역에 뜻을 두게 된 것은 3‧1운동 직후 투옥돼 1921년 5월에 풀려날 때까지 겪은 옥
김복진(1901~1940, 이하 정관(井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서양미술 작품은 거의 없다. 불교에 귀의하여 불모(佛母, 불교 조각가)가 된 뒤 조성한 ‘김제 금산사 미륵불’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미완)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 입상’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소림원 미륵입상’ 등 뛰어난 불상이 남아서 그를 빛내준다.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은 서양조각 재료인 석고를 썼고, 또 다른 대표작인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1939년 조성을 시작하여 머리 부분만 완성한
효당(曉堂, 1904~1979) 스님을 ‘한국 다도(茶道)의 권위자’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그보다는 독립운동과 교육 불사에 남긴 자취가 훨씬 클 것이다.효당은 1916년에 고향 사천의 다솔사로 출가해 이듬해에 해인사지방학림에 입학했다. 출가 3년 뒤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영남지역에 배포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고, 1922년에 일본 유학을 떠나 1933년에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중인 1923년 박열(朴烈) 등과 함께 일제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들이 모여
1975년 5월1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시에 들어온 북베트남군이 승전 선언을 하면서 수십년 간 치열한 전투를 이어온 남·북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 끝났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반공산주의 진영의 맹주를 자처하던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의 막강 화력이 강한 민족주의 의식으로 무장한 북베트남군과 남부 게릴라(베트콩)들의 끈질긴 저항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유신 독재체제를 영원히 이어가려던 박정희의 계획이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이른바 ‘긴급조치’를 연달아 내놓아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어도 대학생을 비롯한
해방 이후 수십년 동안 한국불교는 갈등과 분쟁이 이어지면서 내부 안정을 기하기조차 어려웠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 불교계와 교류를 통해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 평화와 인류 화합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해외 교류를 추진했던 점은 높이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전 세계 불교도들의 연합체인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이하 WFB)’에 1960년대 초반의 어려운 상황에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다져온 바탕 위에서 1990년 서울, 2012년 여수와 2016년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늘 직경 50cm가 넘는 큰 목탁을 들고 보통 염주알보다 몇 배나 큰 염주를 돌리는 스님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빨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이 스님, 언제인가부터 홍도라는 법명보다 ‘방울스님’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홍도(1935~1979) 스님은 한창 활동해야 할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연을 다했지만, 현대 한국불교 포교 역사에 그가 남긴 자취는 크고 넓고 깊어서 ‘작은 체구로 짧은 삶을 멋지게 회향하고 떠난 큰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동
흔히 ‘서산마애삼존불’이라고 부르는 서산 보원사 마애불은 오랜 세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1959년 4월, 당시 부여박물관장 홍사준과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 등이 용현리 계곡 위쪽에 있는 보원사지 조사를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우연히 만난 나무꾼이 아니었으면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이제는 산림이 우거지고 나무꾼도 사라져서 아예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때 홍사준과 나무꾼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고 전해온다. “이 근처에 불상이나 사람이 새겨진 바위가 없습니까?” “바로 저 위의 큰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지낸 이후락(1924~2009, 이하 HR)은 숱한 사건의 주역 또는 배후 인물이었다. 3선 개헌‧10월 유신 강행과 김대중 납치사건 등 현대사의 비극과 치욕에는 박정희와 그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HR는 1972년 5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두 달 뒤인 7월4일에는 남북한이 합의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그 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공동위원장을 맡는 등 남북대화 역사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HR이 2009년 10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