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무속신앙에 빠졌던 난, 이제 당당한 불자다.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진강 상류 인근 시골마을, 1960년 12월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주위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공무원 생활을 하시던 자상하고 배려 깊은 부모님의 4남1녀 중 장녀였다. 시골이지만 부족함이 없는 유복한 가정에서 집안어른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4개면에 한 곳 뿐인 중학교에 들어가 12km가 넘는 비포장 신작로를 버스 타고 통학을 했다. 이 시절에 내 기본적인 인격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버지
유년시절, 좋은 추억이 없다.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 지게를 졌다. 집 주변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 것 같다.등록금을 제 때 한 번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매번 혼났다. 하교 이후에도 늦게 남아서 벌을 서기도 했고, 교실 청소를 하기도 했다. 고학년인 6학년 때는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일도 속상한데, 그 당
난 얼마나 부처님께,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갔을까.조상 대대로 불교집안이었다. 소위 모태신앙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절에 갔다. 20대에는 절에 다니며 가족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안내했다.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다닌다. 내가 절에 다니면서 느끼는 행복을 우리 가족들도 같이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기도하는 게 좋다. 절에 가서 부처님을 뵙고 청정도량을 거닐면 참 마음이 편하다. 내 마음과 몸이 달라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1주일 동안 도시생활에 찌들어 지친 심신
그냥 절에 다닌다는 사실이 무의미했다.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확실하게 배우고 싶었다. 조계종 포교원 디지털대학 신도전문과정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항상 자비행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 자비행인지 모르겠다. 후회하고, 다짐하고, 참회하고, 바로잡고, 수행하고…. 참 어렵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할지 당황스럽다.과감하게 자신을 고통 받는 사람 자리에 놓아봤을 때 만일 똑같은 고통을 받는다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겪게 될지 가능한 생생하게 상상
늘 의문이었다.‘진정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진실한 내 실체를 알고 싶었다. 생물학적인 나, 사회적 역할로서의 나를 떠나면 난 진정 누구인가. 이 의문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의심의 덩어리로 더 커져만 간다. 요즘 인문학 강의가 많다. 명강의가 없진 않지만 나를 향한 갈증은 해소할 수 없다고 본다.어딘가 있을 것 같은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해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참선으로 찾아보려고 했다. 1700여년 넘는 시간 동안 선사들은 선방에서 기도와 선행, 참선으로 ‘그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