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없는 터전…『화엄경』 강설, 구름처럼 사람 몰려해동화엄 근본 도량…가람 배치 미타정토 따라 건립 태백산 영주 부석사의 전경. 의상 대사는 선묘룡의 신통으로 이곳에 화엄도량의 터전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영주의 봉황산 중턱에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이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로 13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부석사의 창건설화는 이렇습니다.귀국 후에 산천을 편력하던 의상은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의 접근도 어려운 곳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이곳은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인데도 어찌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양양 낙산의 관음신앙, 의상 대사로부터 시작『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창건설화 담겨 조선후기 대표 화가인 김홍도의 『금강산도화첩』에 수록된 낙산사 전경.문무왕 10년(670),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일차적으로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조정에 알렸습니다. 조정에서는 고승 명랑(明朗)의 자문에 따라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670년부터 시작된 당나라의 신라 침략은 67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신라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여러 전투 중에서도 당의 육군을 괴멸시킨 매초성전투와 해군을 대파했던 기벌포전투는 유명합니다. 675년의 매초성 전투에서는 당나라 군사 20만명을 상대로 18회나 싸워 신라가 모두 승리했고, 다음해의 기벌포전투
“스님께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며 대사를 성취하겠다”는 선묘의 서원은 속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 깃들어 있어 일본 『화엄연기회권』에 실려있는 선묘와 의상의 만남.의상이나 원효가 활동했던 7세기의 한반도는 전쟁의 먼지가 사방을 덮고 있었고, 당나라와 일본까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의상이 도당 유학길에 올랐던 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이듬해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나라로부터 귀국을 서둘렀던 바로 그해에 당나라는 신라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동아시아 세계를 휩쓸고 있던 그 어렵던 시절에도 의상은 흔들림 없이 구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구도자에게도 조국은 있었고, 그 조국이 외침으로 위태로울 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던 것
금정산서 7일 독경 신중 힘으로 왜구 쫓아中, 남산율종 창시 지엄도 신중 공양에 감탄스님에 대한 민중 의식 존경을 넘어 숭배로의상대사가 수학한 종남산의 정업사 도선율사탑.의상이 지상사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660년대의 종남산에는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조(祖)로써 유명한 도선(道宣 : 596667)이 살고 있었습니다.의상에 비해서 29세나 연상이었던 도선은 의상이 종남산에 이르렀던 661년에 이미 6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에는 의상이 도선의 초청을 받아서 공양을 대접 받았다는 설화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의 처소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웃에 도선율사가 있어서 항상 천공(天供)을 받는데, 매양
많은 분량의 초고여러번 압축 끝불에도 타지 않는7언30구로 집대성스승 지엄 지도로 불후의 명저 남겨표훈 등 제자들에끊임없이 전승돼의상 스님이 집대성한 『화엄일승법계도』. 안광석선생 화엄연기 참조.의상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고, 전하는 글 중에는 짧은 게송(偈頌)이나 발원문(發願文)이 대부분인데, 법성게(法性偈)를 비롯하여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투사례(投師禮) 등이 그것입니다. 그의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1권,『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1권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법계도』 이외에는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저서들은 일찍부터 유통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법
625년 신라 귀족 김한신의 아들로 탄생38세에 入唐…종남산에서 지엄과 조우일본의 고산사(高山寺)에 묘오에(明惠)가 1206년경 원효의 진영과 함께 봉안했던 의상의 진영. 지금도 고산사에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전한다.의상(義相)은 진평왕 47년(625)에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구도적 천성이 역연했던 의상은 나이 19세에 왕경에 있는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8년 연상인 원효와 만나 함께 구도의 세월을 보내지만, 그의 가계나 스승, 그리고 국내에서의 수행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이 무렵 구도의 열정에 불타던 신라의 젊은 구도자들은 중국으로의 유학을 꿈꾸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용감한 젊은이는 머나먼 천축을 향하기도 하였다. 의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