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으로 귀의하며 청하옵니다. 대자비로 근본을 삼아 일체 중생을 구호 하고자 재산과 양식이 되시고 병이 들어 앓는 이에게는 어진 의사 되시며 길을 잃고 헤매는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치고 어두운 밤중에는 밝은 횃불 되시며 빈곤한 이에게는 보배창고 되시어 모든 중생 골고루 풍요와 이익을 주시 옵니다. 이 부분은 청사(請辭)로써 청하는 삼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밝히는 문장이다. 부처님을 비롯한 삼보는 자비를 몸으로 삼는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과 해탈이지만 보다 큰 목적은 자비의 구현에 있다. 보통은 자비를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표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깊다. 자비라는 말에서 자(慈)는 기쁨으로 일으키는 사랑이고 비(悲)는 불쌍해서 일으키는 사랑이다. 가엾은 중생에 대한
그러므로 사바세계 사천하 중 남섬부주의 동양 대한민국 00에 위치한 이 절에서 지금 지극한 정성으로 불공 하며 발원하는 재자 00등은 이 인연 공덕으로 소원을 이루고자 금월 금일에 삼가 법의 자리를 마련하고 조촐한 공양 구로써 제망 중중하여 다함이 없는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옵니다. 경건하온 작법지어 신묘한 가피를 바라옵는 저희들은 싱그러운 향을 살라 청하오며 옥 같은 공양구로 재를 준비 하였으니 공양은 비록 적사오나 정성은 애절 하옵니다. 부디 자비의 거울을 돌리시어 굽어 살펴 주옵소서. 삼가 일심으로 세 번을 청하옵니다. 어느 법회 단체에 초청을 받았을 때 부처님께 직접 향을 사다 올리거나 쌀, 과일등과 같은 공양을 바친 적이 있는 불자님은 손을 들어 보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놀라운 일은 이백여
가지가지 방편을 열어 항상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건져 주시니 구하는 것 이루기는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원하는바좇아 주심은 맑은 물의 달빛과 같습니다. (開種種方便之門 導茫茫沙界之衆有求皆遂如空谷之轉聲無願不從若澄潭之印月) 대승의 가르침에 응화 비진(應化非眞)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난 부처나 보살, 법이나 승은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형상을 지니고 우리에게 오신 부처와 말로써 설해진 가르침과 이를 따르는 스님들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나타난 거짓 모습들로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대승의 가르침에서의 삼보는 그 겪이 달리 한다고 하였다. 진실된 부처와 진실된 가르침과 진실된 스님은 인간으로 나오기 이전, 말로 표현되기 이전, 바로 법계에 두루한 성품이다.
앙유 삼보 대성자 종진정계 흥대비운 비신현신 포신운어 삼천세계 무법 설법 쇄법우어 팔만진로(仰惟 三寶 大聖子 從眞淨界 興大悲雲 非身現身 布身雲於 三千世界 灑法雨於 八萬塵勞): 우러러 생각하니 불·법·승 큰 성현은 진여의 청정한 세계에서 대비의 구름을 일으키어 삼천 세계 두루하고 몸이 아닌데 몸을 나타내시고 법이 없는데 법을 말씀하시어 팔만사천의 번뇌를 비가 내리듯 하여 씻어 주시옵니다. 유치는 삼보님을 초청하는 이유를 아뢰는 말씀이다. 여기서는 삼보가 세상에 어떻게 나타며 어떻게 존재 하는지를 밝힌다. 불교, 그 중 대승의 가르침의 입장에서는 삼보란 단순한 인간으로써의 부처나 말씀 그리고 스님들의 범주를 벗어난다. 대승의 가르침에 의하면 삼보는 부처님이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시기 이전부터 법계의 성품으
나무 불타부중 광림 법회 (南無 佛陀部衆 光臨法會) / 나무 달마부중 광림법회 (南無 達摩部衆 光臨法會) / 나무 승가부중 광림법회 (南無 僧伽部衆 光臨法會). 보소청청진언:〈나무 보보제리 가리 다리 다타아다야〉 삼보통청은 거불(擧佛)의식으로 시작된다. 거불은 부처님을 비롯한 삼보를 받들어 청한다는 뜻이다. 알다시피 삼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배로 부처님인 불보와 가르침인 법보와 스님인 승보를 가리킨다. 불과 법과 승을 보배로 비유하는 까닭은 중생들의 모든 괴로움이 이 삼보를 통하여 비로소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삼보가 이 세상에 출현 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중생들은 생사의 긴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고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 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보를 지칭 할 때에는 석가모
삼보통청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삼보를 널리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축원하는 의식이다. 언제부터 해 왔는지는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삼보통청을 행하기 전에 천수경을 독송하고 네 가지의 진언을 암송한다. 네 가지 진언은 몸과 입과 마음을 맑히는 진언인 정삼업진언(옴 사바바바 수다 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 공양 올릴 단을 열었음을 알리는 진언인 개단진언(옴 바아라 놔로 다가 다야 삼마야 바라 베사야 훔) 단을 설치하였음을 알리는 진언인 건단진언(난다 난다 나지 나지 난다 바리 사바하), 법계를 깨끗하게 하는 진언인 정법계 진언(나모 사만다 못다남 람)이다. 이는 모두 삼보님들을 청하기 위해서 사전에 준비하는 의식들로 법당 안 부처님 앞에만 단을 설치하고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닌 공양을 올리고자 삼보님들을 초청하
불교를 학문적으로 공부한 분들에게 한국 불교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 같이 통불교라고 대답 한다. 통불교란 하나의 사상 혹은 몇 가지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불교가 아닌 모든 사상이 고루 깃 들여져 있는 불교를 말한다. 굳이 과거의 불교 역사를 돌아 볼 필요도 없이 현재 한국 불교의 모습만 보아도 이 같은 말은 틀리지 않다. 바르게 수행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선을 표방하는 종단, 법화경을 표방하는 종단 , 화엄경을 표방 하는 종단 , 열반경을 표방하는 종단, 염불을 표방하는 종단, 밀교를 표방하는 종단 등 수많은 종파가 존재하는 모습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불교가 통불교임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불교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의례와 의식에 관한 부분이다. 그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