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태허(圓同太虛)하야 무흠무여(無欠無餘)어늘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부여(所以不如)라, 둥글기가 태허공(太虛空)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리는 마음 때문에 여여(如如)하지 못합니다.”그러나 태허공은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취하고 버림만 없으면 대자유라 이름하여 태허공이라고 한 겁니다. 둥글다고 하면 우리는 평면에 그려진 원을 생각합니다.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는 원은 존재원리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취하고 버림에 익어 있어서 그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그러나 평면의 원은 둥글지 않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증애심만 없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다”하시고 바로 뒤를 이어서“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벌어진다고 못을 박아 놓습니다.뭇 중생들이 생각하기를 “아! 도가 쉽구나. 우리가 이미 도안에 있고 그 도는 완벽하게 갖추어 있으니 언제라도 보게 되겠지.”, 이런 당치않은 생각을 할까봐 염려하는 노파심이 역력히 보입니다. 벌써 말에 떨어진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스승들만이 갖는 대자비심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도를 바로 보려거든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嬚揀擇)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 신심명 첫 구절이며 신심명 대의가 다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 만큼 지극한 도에 대해서 가능한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요. 그런데 지극한 도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려니 부득이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
신심명(信心銘)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선종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璨, ?~606년) 선사께서 지은 선어록입니다. 1000년도 훌쩍 넘은 그 시절, 이처럼 아름다운 글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지구라는 별에 오셔서 평생을 가르치신 내용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평생을 길에서 사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중생을 위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중도연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명쾌하게 설하셨는지 지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