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선 물 자체가 귀해 물항아리 대신 꽃 활용 스투파는 가득찬 항아리사리알 담는 알과 같아 인류 역사상 그림이 액자 속에 들어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은 근래의 일이다. 서양화의 원조는 성당 벽화나 천정화였다. 마찬가지로 불교 절집은 사방 안팎 위아래에 그림이 가득하다. 답사를 다니다 간혹 마주치는 스님과 그림 얘기를 나누자면 “그런 건 몰라도 돼” 하는 퉁명스러운 답을 가끔 듣기도 한다. 그림은 문자 보다 더 효율적인 종교 교리를 나타내는 교육적인 수단인데, 안타깝게도 천년 이상의 우리 불교가 흘러내려오면서 원 뜻을 잃어버린 채 그림 문맹이 되고 말았다. 절집에 가면 항아리에 꽃이 가득한 그림을 자주 볼 수 있
껍질 깨져야 새생명 탄생깨달음 얻는 과정과 같아 알모양 용기 조성된 이유사리항아리, 자궁에 비견 ▲6. 연화병머리초 단청에서의 석류동과 항아리 민주점. 울진 불영사. 우리 사리는 대부분 항아리에 들어있다. 탑의 사리는 속 항아리에서부터 바깥 함까지 겹겹으로 고이 모셔져 있다. 금이나 은제 항아리, 혹은 녹색 유리 병(목이 좁고 긴 것을 병이라 한다) 속에 들어있다(그림1, 그림2). 모두 다 당시에는 최고로 귀한 물질이었다. 왜 항아리일까? 인도에서는 물이 귀하다. 몬순기(6~9월)의 여름 몇 달을 제외하고는 가뭄이 심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볼 석굴사원은 반드시 물 저장 수조가 필수다. 또 지하 우물의 깊이와
인도 원어 ‘안다’의 일본식 번역이 ‘복발’사리 묻은 곳에 대한 무례…오류 수정해야 1. 산치 스투파의 일본어 번역 그림. 위에서, 앞에서 본 그림. 오류의 원흉. 2. 탑 꼭대기의 복발. 남원 실상사 탑. 한국에서 탑 연구를 했다하는 책 첫머리에 반드시 들어가 는 그림이 바로 지금까지 본 산치 스투파의 도면이다.(그림1) 인도의 원전 영어권 도면을 근대학문 초기에 일본 학자 누군가가 한자로 번역해 넣은, 오류의 원흉 도면이다. 복발(覆鉢), 기단(基壇), 산개(傘蓋), 평두(平頭), 요도(繞道), 난순(欄栒), 간(竿) 등 쉽지 않은 한자어를 독자들은 일단 그림에서 숨은 글자 찾기를 해보기 바란다. 오류 원인은 두 가지,
▲산치 대 스투파. 울타리 난간으로 둘러싼 둥그런 반구형 돔. 동서남북 4방위의 탑문. 꼭대기에 유골함이 있고 양산으로 고귀함을 표시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셨다. 즉 열반에 드셨다. 제자들이 인도 전통 장례에 따라 장작불에 화장하고 남은 뼈와 재를 항아리에 수습하여 8개 부족이 나누어 가지고 가서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최초 스투파 근본 8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막강한 통일 군주 아소카왕이 다시 꺼내어 8만4천개로 나누어 전국 방방곡곡에 스투파를 널리 보급하였다.그 숫자를 액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아주 많이’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치 스투파는 유명한 아소카왕의 돌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3세기에 처음 설립된 것이다. 산치 스
▲승원 폐허에서 바라다 본 대 스투파. 드넓은 인도 대륙 어디서부터 풀어나갈까 생각했는데, 본격 답사 첫 기착지 산치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 한국 불자들이 자주 가는 8대 성지에는 비켜나 있으나 생전에 꼭 가보아야 할 곳이다. 동아시아 탑의 영원한 고향이다. 한국 탑 관련 책 앞머리에 반드시 등장하는 산치 대 스투파가 바로 거기에 있다. 동시에 백 년 전 일본인 학자들이 멋도 모르고 이름붙인 용어를 해방 후 7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학자들이 그대로 베껴 쓰고 있는 오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1818년 영국 장군이 발견 시작 전 독자들이 알아야 할 기초, 층층 쌓아올린 동아시아 불탑을 탑이라 부르는데, 원조 인도 불탑
인도땅 2만7천km 누비며 불교유적 조사잘못된 동아시아 불교 이해 바로 잡을 것 이희봉(62)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는 서울대 건축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건축역사 및 이론을 전공하면서도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했을 정도로 역사와 문화에도 조예가 깊다. 수차례 인도 현지답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한 불탑과 불교사원 등에 대한 사실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이희봉 교수의 인도 불교·힌두교 유적 답사지. 다 알다시피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다. 한국 불교는 초기 인도로부터 직접 들어온 증거도 상당히 있지만 수면아래 묻혀있고 공식적으로 중국으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