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림산신도. 탱화장 브라이언 베리씨 작품. 짐승의 왕 호랑이는 죽는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다른 짐승에게 먹히지 않도록 온 힘으로 꼿꼿한 자세를 취하다 죽는다고 한다. 어둠 속에 먹이를 노릴 때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매섭다.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늠름함, 포효하는 울음소리는 공포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랑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잡으면 나라에서 상을 내렸다. 울산 동구 마골산 불당골에는 착호비(捉虎碑)가 있다. 말을 키우는 하급관리 전후장이 영조 22년(1746)에 호랑이 5마리를 잡아 ‘절충장군’ 직을 받았다는 거다. 그는 호랑이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영조 33년
▲우두나찰. 통도사성보박물관. 소는 수행자와 자주 얽힌다. 보은과 경전 간경의 공덕을 기릴 때 심심찮게 등장한다. 수행자가 환생한 까닭부터 보자면 이렇다. 조선 성종 3년 지리산 쌍계사엔 우봉 스님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지리산을 넘어 화엄사로 가던 중 몹시 배가 고팠다. 길가의 보리밭에 들어가 보리이삭 3개를 꺾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주인 허락도 없이 보리이삭을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복과 바랑을 벗고 바위 아래 숨겨두고 소로 변했다. 금생에 빚을 다 갚아버리겠다는 분연한 결단과 뉘우침에 따른 것이었다. 임자 없는 소는 보리밭 주인이 기르게 됐다. ‘업둥이’란 이름을 받은 소는 3년 간 부지런히 일
▲공주 갑사 공우탑. 사찰생태연구소 제공. 우직하고 성실함 때문일까. 아니면 선한 축생이라는 이미지 탓일까. 소는 사찰 창건 일등공신(?)이다. 사찰마다 창건 설화가 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이 바로 소다. 공주 갑사에는 공우탑이 있다. 죽은 소를 위해 세운 탑이다. 탑에 얽힌 소 이야기는 이렇다. 정유재란을 겪은 갑사는 화마로 앙상한 터만 남았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화엄의 높은 교학을 펼쳤던 도량의 황량함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인호 스님과 20여명의 스님들이 중창 불사의 원력을 세웠을 때였다. 뜻대로 불사가 진행되지 않자 인호 스님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꿈에 소가 나와 “불사를 돕겠다” 약속하고 사라졌다.
▲고구려 고분 오회분 5호묘 벽화의 염제. 농사의 신이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 중국 전설에 ‘염제(炎帝)’로 불리는 신농씨는 불로 음식을 익히거나 구워먹을 수 있게 해주고, 쟁기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가르쳤다. 때문에 농사의 신으로 숭상 받는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있다.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란 얘기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 역시 예로부터 땅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우리나라도 신농씨를 떠받들며 농사가 모든 일의 근본임을 잊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 오회분 5호묘 벽화에서 염제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다. 이른바
▲최호승 기자의 축생전 ‘무소유’ 법정 스님과 쥐의 인연이 흥미롭다. 스님의 수필집 ‘서있는 사람들’ 중에 나오는 해탈 쥐와의 인연담은 헌식(獻食)에서 비롯된다. 헌식이란 공양할 때 배고픈 중생 몫으로 음식을 따로 뒀다 나누는 일이다. 스님은 음식을 두던 헌식돌에서 으레 기다리던 큰 쥐를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자주 보게 되자 반가웠다고 회고했다. 곁에 다가와 음식을 먹을 만큼 서로 길이 들었다고. 어느 날 스님이 “여러 생에 익힌 업보로 흉한 탈을 쓰게 됐는데, 내생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하거라”고 말을 건넸는데, 기이하게도 다음날 쥐는 헌식돌 아래 죽어있었다. 스님은 착하게 살려는 생명의 근원은 한가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쥐와 관련된
▲지리산 홍서원 스님들과 공존하는 쥐. 겨울, 아랫목의 온기가 사라질 때면 으레 연탄불을 갈러 부엌 아궁이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덫에 걸린 쥐가 요동을 쳤다. “찍, 찍”하는 소리가 거북했다. 까만색 털과 여기저기 묻은 오물은 더럽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아직까지 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혐오스런 동물로 취급된다. 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우선 “찍, 찍” 소리와 시궁창이 연쇄적으로 상기되고 불결하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튀어나온 앞니와 꼬리, 온갖 더러운 곳을 밟고 다녔을 발까지. 어미 쥐를 줄줄이 따르는 그 많은 무리의 쥐들. 한 마디로 ‘불결 종결자’라고나 할까. 쥐에겐 불행할 따름이다. 다행인지 몰라도 우리가 불결하다
▲경남 함양 견불사의 코끼리. 코끼리는 사실 겁이 많다. 무섭고 위험스러운 포식동물들로부터 새끼를 지켜오며 오랜 야생생활을 해온 탓에 신중함도 자연스럽게 익히고 있다.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심을 보이기 일쑤다. 때문에 나이 많은 코끼리에 의지하며 무리 생활을 한다. 경험이 많은 코끼리는 그만큼 야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갖고 있으며 당연하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무리의 코끼리들은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먹이와 물을 찾는 지혜를 빌리는 셈이다. 진리를 갈구하는 우리 역시 한 무리의 코끼리 아닐까.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는 “거대한 코끼리 비루파크샤는 산과 숲을 비롯한 지구 전체를 머리로 떠받치고 있었네”라는
▲통도사 팔상탱화 도솔내의상. 세상에 몸을 나투기 전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호명보살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호명보살은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돼 마야부인의 오른쪽 갈비를 통해 태에 들어갔다. 열 달 후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했으며,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선언했다. “하늘과 땅 가운데 오로지 자신이 홀로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 불성을 가진 모든 중생이 존귀하다는 선언의 이 장면에도 코끼리가 등장한다. 흰 코끼리가 바로 부처님이다. 대부분의 코끼리는 회색이다. 다만 십만 마리 중 한 마리 확률로 흰 코끼리가 나온다고 동물학자들은 말한다. 흰 코끼리는 생전에 보기가 어려
▲파주 보광사 벽화인 기상동자도. 보현동자가 등에 올라 흰 코끼리를 몰고 간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 광고에 코끼리가 등장한 적이 있다. 지금도 동물원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는 동물이 코끼리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코끼리가 살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성인 코끼리 1마리는 하루 동안 나뭇잎, 가지, 풀, 과실 등의 먹이 300kg을 먹고 물은 70~80ℓ나 섭취한다. 참고로 코끼리는 10마리 이상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언제 우리나라에 그 존재가 알려졌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11년 2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일본 국왕이 코끼리 한 마리를 바쳤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이다. 사복시에서 기르게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