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제도, 신참 출가자 교육 위해 마련권력 얻기 위한 사제 관계서 벗어나야 세월이 변하면서 인간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 대한 공양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의무였지만, 이제는 물려줄 재산 없는 부모는 대접 받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런 냉정한 계산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도 여지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스승은 더 이상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깨우쳐 주는 역할 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그 보다 오히려 자신의 발판이 되어 자신의 앞날을 열어줄 능력을 소유한,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권력을 쥔 스승을 더 선호하는 세상이다.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있는 없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야 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어찌 이 행
적절한 거문고 줄이 아름다운 소리 내듯바른 견해로 자신 돌아보는 여유 가져야 한 때는 열심히 사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치며 살기도 했지만,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고 보니 열심히 사는 것보다는 제대로 사는 것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다. 그리고 제대로 산다는 것은 의외로 적당히 산다는 것과 통한다는 사실에도 눈을 떠가고 있다. 양 극단으로의 치우침을 경계하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처럼, 인생 역시 지나치게 긴장하며 자신을 옭아매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너무 관대하게 자신을 방치하고 늘어지지도 않도록 할 때, 가장 무리 없는 충실한 삶이 실현되는 것 같다. 율장 「피혁건도」에는 지나친 수행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처님 당시, 소나라는 스님이 있었
자신의 능력 과장하는 건 도적의 마음부족함 인정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야지난 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학력 위조사건을 비롯하여, 새로운 정부가 탄생할 때마다 인사 검증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학력·경력 위조에 관한 보도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자신의 노력 이상의 것을 덤으로 얻고 싶어 하는 잘못된 욕망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학력 중시의 잘못된 사회 풍토라든가, 사람의 내면보다 외적인 조건에 더 쉽게 끌리는 일반적인 사회분위기가 더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자신의 경력을 속인다거나 혹은 사람들을 혼동 시켜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미묘한 표현을 사용하여 과장하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과 타협한 채 자신도
잡담, 삶 공허하게 만드는 무익한 것유익하지 않은 말은 가급적 삼가야 부처님 당시에 육군비구(六群比丘)라 불리는 여섯 명의 스님들이 있었다. 이들은 항상 무리지어 다니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율장의 주인공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다수의 율 조문이 이 스님들의 악행을 계기로 제정되고 있다. 날마다 날마다 어찌나 기절초풍할 나쁜 짓만 하고 다니는지, 그러면서도 또 어찌나 반성은 잘 하는지, 밉다기보다는 오히려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는 존재들이다. 아마 이들의 이런 묘한 캐릭터 때문에, 이들이 율장 성립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 스님들은 출가는 했지만, 출가자로서의 위의라든가 수행은 먼 나라 얘기였다. 어떻게 하면 맛 나는 음식을 보시
헛된 욕망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감각적 쾌락서 벗어나 주인이 돼야 부처님의 일대기를 전하는 몇 가지 불교문헌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율장 건도부 첫 장인좥대건도」(大度)는 초기불교교단의 성립과 발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범천권청 이야기, 두 상인의 공양, 녹야원에서 만난 다섯 비구와 그들에 대한 초전법륜, 그리고 야사라는 청년과의 만남 등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부처님의 존재와 그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져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로부터 우루벨라라는 곳을 향해 유행을 하고 계셨다. 잠시 유행을 멈추고 길을 벗어나
도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상대 관점서 이해하려는 마음 가져야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나 하나 이상의 공동체에 속하기 마련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시작된 우리들의 삶은 성장과 더불어 자의든 타의든 이런저런 공동체에 포함되어, 이를 통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기도 한다.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내용의 공동체가 존재하지만, 불교의 출가자들로 구성된 ‘승가공동체’는 특히 공동체생활의 진수를 보여준다. 구성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깨달음이라는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 하나 밖에 없다. 나이도 제각각이며, 세속에서 살아왔던 삶의 배경 또한 제각각이다. 피로 엮인 사이도 아니며, 특별한 이익이나 취미 활동을 위해 모인 사람들
‘화장실 사용 규칙’ 어긴 스님 참회‘화합포살’로 분열된 승단 재결합 서로 대립하다 결국 경계 안과 밖에서 나뉘어 개별적으로 승단회의를 개최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꼬삼비 스님들의 행동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신다. 한편, 분열한 꼬삼비의 스님들은 함께 승단회의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의견 충돌은 피해갈 수 있었지만, 식당이나 길가에서 마주치면 여전히 큰 소리로 말다툼하고 심지어는 멱살을 잡기도 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들을 불러 타이르셨다. 그러자 그 중 한 스님은‘이 싸움은 저희들의 일이니,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계십시오’라며 오히려 부처님에게 설교했다. 실망하신 부처님께서는‘승단이 분열하고 있을 때, 범부들은 제
견해차 있다고 상대방을 부정해선 안돼부동주, 상대 인정 통해 공존의 길 제시화장실의 물 사용을 둘러싸고 시작된 꼬삼비 스님들 간의 대립은 부처님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 결과,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한쪽 그룹이 경계 밖으로 나가 개별적으로 포살(布薩)을 하고 승단회의를 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한 절에서 한 솥밥을 먹던 스님들 간에 싸움이 벌어져 둘로 쪼개졌는데, 화합의 노력은커녕 함께 행동하지 않겠다며 한쪽 그룹이 독립해서 나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 스님으로부터 이 사태를 전해들은 부처님의 대답은 기묘하다. 그것은 만약 그들이 따로 따로 포살을 하고 승단회의를 한다 하더라도 만약 그 회의진행 방식에 있어 문제가 없다면, 다시 말해
화장실 물사용 규칙 어긴 게승단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 한 세상 살다보면 이리저리 부딪히는 일이 많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간에도, 동료 간에도, 여하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크고 작은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잠시 티격태격하다 웃으며 끝내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대단한 승리자로 빛나지도 않을 싸움에 얼굴 붉히고 심장까지 벌렁거리며 대립하다 마음 상하곤 한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화낼 일이었나 싶을 때가 많다. 그저 상대방이 자신의 판단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뿐이다. 상대방의 입장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내 잣대를 벗어나 제 멋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어떻게든 내 틀 속에 맞추어 내 입맛대로 요리하고 싶은 것이다. 이
과거·현재·미래 소통시키는 역서율장 이해 삶의 지혜로 승화시켜야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헬릿 카(E. H. Carr, 1892∼1982)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를 통해 한 말이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명확한 시간적 구분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 돌고 도는 것임을 암시한다. 즉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역사라는 뜻이다. 한편, 이 생각의 바탕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 인간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문명의 발달 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