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는 성월(城月)이라는 스님의 진영(眞影)이 있다. 문경 김룡사에 있다가 근래 직지사로 모셔왔다는 이 진영은 19세기 후반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영을 들여다보면 10폭짜리 병풍을 배경으로 가사와 장삼을 갖춰 입은 스님이 앉아있다. 오른손에는 굵직한 염주를, 왼손에는 주장자를 쥐고 있다. 스님의 뒤편으로 책 더미와 그 위에 한문으로 쓰인 경전이 펼쳐져 있고, 안경도 놓여있다. 오른 쪽에는 필통이 있고 그 안에는 여러 자루의 붓과 봉투, 두루마리가 촘촘히 꽂혀있다. 이 진영에서 유일한 글은 왼쪽 위의 ‘摠
지난달 말 조계종 중진스님들이 발제자로 참여한 만행결사 대중공사는 중흥과 쇠퇴의 중대 기로에 선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자리였다. 이날 심각하게 논의된 것 중 하나가 출가자 감소였다. 1991년 출가자가 517명으로 2002년까지는 매년 400~500명이 꾸준히 출가했다. 그러나 2003년 373명으로 떨어진 것을 기점으로 크게 감소하더니 2016년 157명이었고, 올해는 131명에 그쳤다.이날 공개된 통계에는 출가자 감소 외에 또 다른 심각성을 보여준다. 남성출가자에 비해 여성출가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10월14일 남양주 수진사에서 벌어진 방화사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기독교인이 언제라도 들이닥쳐 사찰에 불을 지르는 것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 더욱이 방화범은 2년 전부터 사찰을 드나들며 크고 작은 행패를 자행해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했었기에 더욱 그렇다.현대불교사는 훼불과 법난의 역사였다. 불교계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희생양이었고 사찰은 공격 대상이었다. 기독교계는 사실상 그 배후이자 주동자였다. 기독교인에 의한 사찰 방화와 훼불은 해방 직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금껏 되풀이 되는 고질병이다.고 민영규 연세대 명예교수가
법보신문이 얼마 전 불교계 오피니언을 대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관련 설문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 응답자의 81.9%가 찬성을 표명했고, 반대는 3.6%에 그쳤다. 이는 불교계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적극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이유로는 ‘불교의 평등정신에 부합한다’가 가장 많았고, ‘현대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두 번째였다. 두 답변 모두 뭇 존재는 평등하고 현대사회는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통했다.불교는 세상의 어떤 종교와 철학보다 평등을 중시한다. 이 같은 내용은 수많은 불경과 논서들에
더불어민주당과 대한의사협회가 9월4일 공공의료 확충 정책 입법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의료계 파업 해결 단초가 마련됐다. 그러나 중환자들마저 방치한 14일간의 의료계 파업에 많은 국민이 실망하고 분노한 것은 분명하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醫)’가 중시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불교에서도 의술은 대단히 중시됐다. 부처님의 여러 호칭 중 하나가 대의왕(大醫王)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잡아함경’에는 부처님이 4가지 법을 성취했기에 가장 위대한 최고의 의사인 대의왕으로 불린다고 설명한다. 첫째 어떤 병인지 잘 아는 것
불교에서 절은 하심(下心)이다. 몸과 마음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교만한 마음을 조복시키는 수행법이다. 절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지극히 공경하는 행위임은 불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대표적이다. 비구였던 그는 길거리를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항상 절하며 찬탄했다. “저는 당신을 깊이 공경합니다. 당신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평등사상이 보편화된 현대사회에도 흉내내기 어려운 일이지만, ‘법화경’이 편찬된 시기가 2000여년 전이라는
호남지역에 폭우가 잇따르던 8월8일 소떼가 섬진강 범람을 피해 구례 사성암을 찾았다. 15마리가량의 소들이 침수된 축사를 탈출해 해발 531m의 사성암까지 피신해왔다. 축사와 사성암과의 거리는 약 1km.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오려면 1시간은 됨직한 거리였다. 물난리를 피해 뚜벅뚜벅 걸어 올라온 소들이 마애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는 유리광전 앞마당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폭우를 뚫고 사찰을 찾은 이색 참배객들.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연신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에 지붕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기세고, 바닥에
“불교는 어렵지 않고 어렵게 말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에요. 쉬운 말을 난해하게 얘기해서 그런 것이지 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불교계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이런저런 불교계 얘기로 시작해 출판과 포교 얘기로 이어졌다. 한 분이 “쉬운 불교를 지나치게 어렵게 얘기하는 게 우리 불교계 풍토”라고 토로했다. 불교 강연이나 법문할 때 생소한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책을 쓰는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 못한 부분은 얼렁뚱땅 넘기거나 복잡하게 쓰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했다. 쉽게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은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당신이 부처님입니다.” 불자라면 자주 접하는 말이다. 비록 지금은 미혹에 시달리는 범부중생이지만 위없는 깨달음을 이뤄 고통을 여의고 최상의 지혜와 자비로 중생을 이끌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아기부처님이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선언했듯 부처님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훌쩍 넘어섰다.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계·천상계라는 육도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또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부처님이 인간일까. 이 질문은 소나무가 식물인지 코끼리가 동물인지를 묻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 오히려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부처님이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출가해 깨달음을 얻고, 전법 활동을 펼치다 입적했음을 안다. 최근 출간되는 불서에서도 부처님을 인간적으로 서술한 서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듯 불교계에서도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하지만 ‘부처님=인간’이라는 명제가 역사를 넘어 불교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쉽게 규정 내리기 어렵다.불교의 오랜 전통에서 부처님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70년 전 한반도는 현생에 펼쳐진 지옥도였다. 일제강점기 35년의 모진 세월을 건너자 강대국들 이해관계에 휘말려 남과 북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국군과 경찰 14만1000명, 미국·터키·프랑스·네덜란드·콜롬비아·타이 등 16개국 유엔 참전군 3만8000명, 북한군 52만명, 중국군 14만9000명, 남북한 민간인 52만명 등 모두 138만명이 무참히 죽어갔다. 그 희생자 한명 한명이 누군가의 부모였고 자식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가파른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잘사는 나라’에 편입됐지만 수습되지 못한 숱한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포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2010년 5월31일, 낙동강 둑에서 세납 47세의 문수 스님이 스스로를 불살랐다. 소신공양을 위한 장엄한 의식 절차도 없었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글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휘갈겨 쓴 것 같은 유서는 70여자에 불과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부정부패의 온상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4대강 사업을 당장 접으라는 준엄한 질책이었다.당시 이명박 정권은 한반도 대운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