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대로 진언(眞言)의 전수를 허락하신다니 한없이 기쁩니다. 변함없는 두터운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진언과 천태가 나란히 잘 전수되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의 배려까지 받게 되니 제 마음이 더 없이 굳건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인도하기 어렵고, 또한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도는 너무나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언과 천태의 양종은 서로 통할 뿐 아니라 궁극적인 가르침의 경지도 하나일 것입니다.” 일본 헤이안 불교 두 거목편지 주고받
“대덕화상이시여, 멀리 거센 바다를 건너 이 나라에 오셔서 참으로 저의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깨우침 없이 짐이 이 도다이지(東大寺)를 세운지 어언 10여년이 지나 이제 계단(戒壇)을 세우고 계율을 받아 지니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계를 받고 율을 전하는 모든 일을 화상께 맡기겠습니다.” 일본 45대 천황 쇼무(聖武, 701~756)는 종종 사는 게 버거웠다.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절대 권력의 자리도 때때로 부질없어 보였다. 아버지 몬무천황(文武天皇)은 그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음의 병이 깊었던 어머니 미야코도
“작별한지 20여년에 흠모하는 지극함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 구름 자욱한 머나먼 만리길,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한하노니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을 강연하고 법계의 무진연기를 드날리시어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 되게 하신다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이로써 부처님께서 여래가 입멸하신 후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돌려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690년대 초 태백산 부석
“지난해 사신이 돌아와 정법장(正法藏)께서 입적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승의 입적 소식에 제 마음이 쪼개지는 것을 억누르려 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 배는 고해(苦海)에 침몰했고, 천신과 사람들 모두 눈을 잃은 듯합니다. 어찌 이리도 통한의 슬픔이 빨리 왔단 말입니까.”653년 여름, 장안 자은사(慈恩寺)에 머물던 현장(玄奘, 602~664)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낮이면 여러 유능한 역경승들과 불경을 번역했고, 저녁이면 매일 2시간씩 학승들에게 경론을 강의했다. 자신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탓에
“요즘 말법 중생은 마음이 엷어서 은혜와 절의(節義)를 쉬이 배반하고, 쉽게 은사를 싫어해 홀로 지내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정에 이끌려 법에 어긋나니 네가 악도에 떨어질까 염려된다. 어찌할 수 없어 네가 늘 가까이 해야 할 경계의 글을 지어 안부를 대신한다. 잊지 말지니, 바로 너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오히려 천 마디의 좋은 말을 초월하는 것이니라.” 칠순을 넘긴 도선(道宣, 596~667)은 제자 자인(慈忍)을 떠올릴 때면 가슴 밑바닥에 슬픔이 흥건히 고였다. 도선은 자인이 자신의 곁에 머물며 계율부터 익히기를 원했다.
“도를 닦았다면 중생을 제도해야 합니다. 자기 몸만을 깨끗하기 위해 홀로 은둔한다는 것은 내가 듣고 배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마땅히 고통 받는 세상 사람들 속으로 나와 그들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야 하지 않겠습니까.”승옹(僧邕, 543~631)은 숲속 생활이 좋았다. 비를 겨우 막을 수 있는 초막이었지만 부러울 게 없었다. 배가 고프면 솔잎과 산나물을 먹었다. 목이 마르면 샘물을 마시면 됐다.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고라니가 신기하듯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손바닥을 펴면 작은 새들이 내려앉아 노래도 불렀
고국 멸망시킨 젊은 정복자의간곡한 수계 요청 받아들이며두 사람의 깊은 인연 시작‘총지보살’ 법명 받은 양광평생 스승 삼겠다고 다짐십수 년간 교류하며 교화유마의 삶 살기 염원하며‘유마경소’ 집필해 전달유마거사의 꿈 등진 수양제침략전쟁 등으로 민심 이반“대왕께서는 국법을 지키면서 더불어 불교를 바로잡아 죄 지은 자는 다스리고 죄 없는 이를 공경한다면 공덕이 무량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본래 직접 뵙고 말씀드릴 일이지만 기회가 없으므로 창졸지간에 유촉으로 남기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불법과 국토와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능
550년, 홀로 수행한 거사혜가에게 자기공부 점검혜가 “참되고 그윽한 이치”향거사 깨달았음을 인가마니주를 자갈로 알더라도활연히 깨달으면 참된 보배무명과 지혜는 언제나 평등만법이 그러한 줄 알 것 강조"본래 마니주(摩尼珠)를 잘못 알아 기왓장이나 자갈이라고 했으나 활연히 깨달으면 바로 참된 보배입니다. 무명과 지혜가 평등해서 차이가 없으니, 만법(萬法)이 모두 그러한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여워서 이 글을 짓나니 자신이 부처와 차별이 없음을 관(觀)한다면 어찌 피안의 무여열반을 다시 찾을
법화경 최고 권위자 법운18살 소명에게 강론 요청극구 사양하다 결국 승낙22명 대덕·고관들 앞에서‘이제설’ ‘법신론’ 강설송곳 같은 참석자 질문에명쾌한 자기 논리로 답변31살에 병으로 돌연 사망‘금강경’ 32장 나눈 당사자‘문선’은 중국문학 원천 평가“전하께서는 태어나면서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높은 식견에 묘한 말씀은 속세를 벗어납니다. 매번 경을 논하는 자리에 다녀올 때면 그 묘한 말씀에 심취되고는 합니다. 빈도(貧道)가 비록 어려서 갈 곳을 알았다 하나 장성해 도업(道業)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거듭
504년 양무제 불제자 선언공무 바빠도 아침저녁 예불511년 승려 육식 금지 선언동아시아불교 새 전통 마련동태사 등 수많은 사찰 건립지나친 숭불에 반발도 커져부대사 농사지으며 큰 깨침양무제에게 선의 참뜻 설명아무리 백성 위한 일이라도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 당부 “삼가 나라의 주인 구세(救世)보살에게 아뢰나이다. 이제 상·중·하의 선(善)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잘 받아 지니옵소서. 상급의 선이라 함은 가슴을 비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집착하지 않음을 으뜸으로 합니다. 중급의 선은 몸을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여기며 나라를 다스
권력 등지고 여산 정착한당대 최고 지식인 유유민젊은 천재 승조 저술 읽고새로운 주장에 매료됐지만‘무지=반야’ 개념에는 의문승조 격의불교 이해 비판공이 무와 다른 점 역설“경에서 진실한 반야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께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 더 이상 집착 마시고 지극한 이치를 찾으셔야 합니다. 만법이 한결같이 순수한 진여의 세계임을 평등하게 관찰하십시오. 지극히 텅 빈 무상(無相)의 법신(法身)이 곳곳에 있으며 단절된 무(無)가 아님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옳음이 없는 데서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나 일치함이 없는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편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보편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불교가 시작된 이후 스님들은 편지에 의탁해 마음을 전했다. 인도 나가르주나(용수보살)가 남인도 지역의 왕이었던 고타미푸트라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스님들의 편지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 속에는 진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가 하면 진리에 대한 논쟁과 추상같은 경책도 있다. 지난 2004년 ‘옛 스님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연재됐으나 지면상 짧게 소개됐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보다 충실한 내용으로 편지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들을 소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