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핵심은 중생심은 소유론적이고 불심은 존재론적이라는 구분이다. 소유론적인 생각은 늘 나 중심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데, 존재론적인 불심의 사유는 나 중심의 사유화(私有化)는 사라지고, 앞의 설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공동존재의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 있다. 이 공동존재를 지향하는 존재론적인 공동적 사유가 그렇다고 공동체적인 공동소유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적 이념을 방편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승찬 대사가 말한 ‘견유몰유(遣有沒有=소유를 버리려고 하면 소유에 빠짐)’는 이미 지적한 바이다. 한자의 ‘유(有)’를 때로는 소유로, 때로는 존재로 번역되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있다’가 때로는 ‘가지고 있다’나 ‘가지다’로 혼융된다. 이 모든
사회생활 속에서의 대자적인 중생의 심리상태를 자연생활 속에서의 즉자적인 중생의 심리상태가 안고 있는 불심으로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 이처럼 사회생활 속에서 사회적 중생심을 자연적 불심으로 확 바꾸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요체겠다.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은 이른바 중생이 되지만, 그 사회생활에서 겪는 각각의 고통과 갈등과 긴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중생의 와각을 과감히 깨고 부처의 모습으로 화현하기를 발원한다. 사회생활은 인생살이의 시공(時空)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생살이를 결정한다. 사회생활은 인생살이를 결정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에겔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서로서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다툰다. 그 다툼은 주인의 자리에 오르려고 혈투를 벌린다. 이것이 역사 현장에
지난 회에 마음 상태를 철학적으로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나누어 구분했다. 인간이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고 자연 속에서 홀로 있으면 거의 대부분 불심을 간직하게 되지만, 사회생활을 통하여 남들과 엉켜 살게 되면 미음이 소유욕으로 끄달려 울렁거리게 됨으로써 중생의 심리상태를 갖게 된다. 전자가 변증법적 용어로 즉자적인 심리상태이고, 후자가 대자적인 상태라 부른다. 인간은 누구나 대자적인 사회생활을 밟아야 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흠결이 많은 중생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또 스스로 중생임을 자각하는 중생심리가 역설적으로 부처의 존재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된다. 중생심이 불심을 향하게 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불심은 깨어있지 않았기에 중생심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즉자적인 마음은 추상적
지난 회에 불심은 사심이 없는 중생의 마음이라고 언명됐다. 사심이 없는 마음이라는 말을 많은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즐겨 쓴다. 그러나 그 말은 대개 인기나 득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토해내는 수작에 불과하다. 중생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호오와 친소의 감정을 안가질 수 없다. 불심을 오랫동안 닦아 온 이들도 사회생활에서 요동치지 않고 사심 없는 마음을 그대로 지탱하기가 아주 어렵다. 부처의 마음은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다. 오로지 불심은 텅빈 마음에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한 마음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불심은 중생이 이해하기에 너무 아득하거나 까마득하다는 느낌을 훨씬 덜 갖게 될 것이리라. 우리는 보통 ‘성불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하지만, 정작 무엇이 부처인지 생활 속
지난 회에 『신심명』을 도덕윤리적 사유로 대하지 말고, 존재론적 사유로 읽으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소한 충고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불교의 독법이다. 불교는 절대로 기독교나 유교처럼 도덕종교나 사상이 아니다. 불교의 수행은 행위의 도덕화를 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자적(개별 명사적) 사고방식이나 소유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존재론적 사고방식을 일상생활의 도(道)로서 터득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불교가 한없이 난해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존재자적 사고방식은 분별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세상의 대상들을 개별명사로 하나하나 생각하는 것이 존재자적 사고방식이다. 중생들은 이런 분별로 일생을 보낸다. 소유적 사고방식은 사회생활을 ‘나’ 중심으로 엮어가는 태도를 말한다. ‘내’가 늘 그 모든 소유
다시 『신심명』의 원문을 보자.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마음의 병이 되나니(違順相爭 是謂心病),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不識玄妙 徒勞念靜).”혹시 독자들 중에 원문의 진도가 늦고 설명이 많다고 걱정하는 분이 있겠으나, 그것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충분한 사전 설명으로 원문 진도가 뒤에 빨리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승찬 대사의 『신심명』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사유를 권장하지, 도덕주의적 사유를 설파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는 도덕주의적 순수주의에 너무 얽매어 사유의 깊이와 소견의 창조적 힘을 빠뜨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경향이 짙다. 이것이 한국의 병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말은 불교의 계(戒)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물음을
우리가 증득하고자 하는 불성은 결국 열린 본능인 셈이다. 자연 자체가 곧 본능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은 본능의 힘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나간다. 오직 인간만이 열린 본능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 존재방식에서 하나의 역설이 성립한다. 본능은 곧 자연인데, 열렸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본능은 자연의 필연적 법이다. 열린 본능은 인간이 자연의 필연적 법이고, 동시에 자유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불성은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필연적 법이고, 또한 자유의 지혜로운 사용임을 뜻한다. 불성이 깨달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은 연기법이고, 마음의 무한 자유는 공(空)의 반야다. 후에 우리가 이 자연의 필연법과 공의 반야를 음미하겠지만, 하여튼 자연의 연기법은 자연 존재방식의
지난 회에 우리는 자연적 본능과 사회적 지능(사회적 본능과 뒤섞인), 직관을 훑어보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중생은 자연적 본능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 지능과 직관의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중생과의 차이는 전자가 열려 있는 자유의 존재방식을 구비하고 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회에 언급된 내용은 살려고 하는 욕망을 인간 만이 미결정적인 자유를 통하여 실현한다는 것이다. 용수(龍樹)보살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언급된 지혜의 원천으로서의 미결정성이 곧 인간의 자유를 상징한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지능과 직관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들이 자유롭다는 것은 곧 맹목적으로 한 곳에 묶여 있지 않고, 대상과 영역이 무한대로 가변적이라는 것
자연생활과 사회생활을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또 사회생활을 외면하고서도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성과 사회성의 두 가지 상반된 행동지침을 선천적으로 안고 살아간다. 여기에 인간의 허약성과 위대성이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허약성은 인간의 불완전한 자연성과 불완전한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어느 한 곳에 축을 박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늘 부동(浮動)하는 가변성을 말하며 위대성은 인간의 자유스러움을 말한다. 부동하는 가변성이 다른 한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생애를 스스로 연출하게끔 한다. 동식물들에게는 거의 대동소이한 생활의 방식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지상에 태어난 인간에게는 거의 같은 인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허약성
지극한 도(道)는 우리가 간택심과 애증심을 버리면, 순간적으로 직관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어린 아이도 그냥 그대로 알 수 있는 것이 도(道)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티끌만큼이라도 취사(取捨)하는 간택심과 싫고 좋은 애증심을 일으킨다면, 그 순간에 그렇게 쉬운 불도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승찬 대사가 말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내 몸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누비고 있는 사실과 한 몸이 되고, 내 마음이 우주 삼라만상의 마음과 함께 느낀다면, 내 몸과 마음은 우주의 몸과 마음과 하나로 연계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가 부처라고 부르는 분은 삼라만상의 사실적 우주실상을 온전히 증득하고, 무한한 우주의 삼라만상을 그 마음에서 하나로 느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불신(佛身)은
불교가 교주의 주관적 신념이나 우주의 객관적 사실이 아님을 지난번에 언설되었다. 도(道)와 진리가 주관적 신념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변하면, 그런 신념을 편 교주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신앙의 대상으로 탈바꿈하고 절대자로 둔갑한다. 절대자는 내가 좋아하면 신이 되고, 내가 싫어하면 우상이 된다. 신은 좋고, 우상은 나쁜 것으로 변한다. 좋은 절대자는 신이고, 나쁜 절대자는 우상이다. 따라서 신의 경배는 신앙으로 변하고, 우상의 숭배는 미신이라고 배격된다. 신과 우상과의 사이에, 신앙과 미신과의 사이에 다만 내가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마음의 차이 밖에 없다. 불교는 이런 감정의 호오(好惡)를 배격한다. 신과 우상, 신앙과 미신 등의 차이를 강조하는 기존 종교의 주장을 불교는 주관적 변덕 이상이 아니라
사람들은 노자,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를 인류의 오대 성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들의 사상을 숙고하면 노자와 붓다, 그 밖에 다른 성자들의 사상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다른 성자들처럼 그들아 생각한 진리를 설파하려고 하지 않고, 이 세상의 근원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다른 성자들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리는 내가 교설하는 것이니, 다르게 생각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노자와 붓다는 그들이 말한 진리를 생각하라고 설파하지 않고 세상의 불변적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실을 알기 위하여 특별한 학문의 습득이나 신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도 않았다. 단지 마음이 어떤 것에 의하여 집착당하지 않으면 된다고 역설했다. 노자가 가르치는 도도
지난 회 끝에 한국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이성의 발판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라는 언명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깊이는 이 글의 전개과정에 불변의 지남으로 작용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말은 한국인의 평균적 마음이 깊지 못함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신심명』은 마음의 깊이를 계발(啓發)하는 명저(名著)라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신심명』을 원문과 성철 큰스님의 번역을 동시에 보면서 철학적으로 음미해 보기로 하자. 1)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오직 간택함을 꺼려할 뿐이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다.(至道無難 唯嫌揀擇)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이라.(但莫憎愛 洞然明白) ○ 철학적 해석부처님이 깨달은 이 우주의 원리가 난
편협한 단답주의-과격한 감정주의가 한국병이성 아닌 마음 깊은 사유만이 유일한 ‘처방’ 지난 1회 깅좌에서 서양철학자들의 이름들이 나오기에 거기에 익숙하지 않는 이들은 생경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들을 잘 몰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종종 그들의 이름들이 등장할 터인데, 이 글의 내용상 본질적인 것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서양철학과 동양사상은 전혀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분들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불교사상은 동양 전통사상이므로 순수하게 동양식으로만 사유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금방 무너져버리는 단견이므로 재고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런 생각은 순혈주의나 순수주의의 어리석음에 비유됨직 하다. 인도불교가 중국문화에 유입되어서 더 풍요로워지고 변혁되어
인류는 이상향을 찾아 끊임없이 대립·갈등佛法 철학적 해석으로 현실의 불국토 제시 앞으로 법보신문에 선가(禪家)의 3대 조사인 중국 수나라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연재할 것이다. 이미 출판사 장경각에서 성철 큰스님의 표준 번역과 쉬운 해설이 나와 있는데, 다시 덧칠을 하는 것이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생산하는 것 같으리라. 이 글은 성철 큰스님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다. 필자의 몫은 세속의 학문인 철학의 차원에서 승찬 대사가 우리의 마음에 새겨준 부처님의 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터득해야할 것인가를 세상에 밝혀 대중들의 공명을 얻어 보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이 동서융합시대에 인류의 지남(指南)으로 생활화되어 불국토가 막연한 인류의 관념적 이상으로 투사되지 않고, 생각이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