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말처럼 철학적 형이상학이 결코 존재론이 아니다. 신에 관한 형이상학, 인간에 관한 형이상학,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 등의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형이상학이 바로 존재론은 아니다. 그 동안의 철학자들은 착각했다. 엄밀한 의미의 존재론은 명사적 개념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명사적 개념(존재자)으로 분류함은 곧 자연히 비교에 의한 판단과 감정적 호오의 선택을 하게 한다. 『신심명』을 다시 읽자. “지혜로운 이는 무위(無爲=인위적으로 작위함이 없음)하고,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자박하도다. 법에는 다른 법은 없고 망령되어 스스로 애착하도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어긋남이 아니랴.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지난 회에 우리는 일승(一乘)의 법을 보았다
승찬대사의 『신심명』을 먼저 읽어보자.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치하여, 번뇌가 끊어진 데서 소요하고, 생각에 얽매이면, 참을 어겨서 혼미해서 좋지 않느니라.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것인가?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六塵,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미워하지 말라.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正覺)과 동일함이라.’ 의식과 달라서 우리의 마음에는 자연이 부여한 신묘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곧 본성이다. 동식물에는 본능이라는 그런 능력이 있어서 그 본능이 살아가는 그들의 지혜를 동식물답게 부여하고 있다. 동식물들에 본능이 자연적이듯이, 인간에게 저 본성인 불성이 지극히 자연스런 도(道)다. 그런데 동식물들에게는 본능적 삶이 너무 에누리 없이 잘 진행되는데
다시 『신심명』으로 돌아가자. 불교가 도덕윤리적 차원의 행동방식의 교정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사고방식의 혁명이라고 전회에서 강조했다. 그렇다고 마음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마음의 구함을 애쓰는 일이라고 여겨선 안 된다. 승찬대사가 “진리마저도 구하기를 노력해서도 안 된다”고 언명했으니, 더구나 혁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선 안 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불교의 본질이 사고방식의 혁명이라고 해서 의식의 혁명처럼 그렇게 생각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예컨대 의식은 주관이 되고 대상은 객관화 되어 주객으로 이분화 되는 의식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말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고 주관은
불교적 수행이 도덕윤리적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다.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유교의 도덕윤리주의의 영향으로 세뇌되어 왔었기에 존재론적 사유에는 빈곤하고 도덕주의적 명분에는 대단히 강하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도적주의적 명분과 도덕적 행동성향은 다르다. 그러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계율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 일어난다. 부처님이 삼학(三學) 가운데 계(戒)를 제일 먼저 내세우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되든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또는 자연적으로 다른 존재를 괴롭히는 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계가 도덕윤리적 차원의 형식적 덕목의 준수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깊이
승찬 대사는 우리에게 『신심명』에서 다시 마음의 생리를 가르쳐 준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없느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유론적인 중생심’이다, ‘존재론적인 불심’이라고 나누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마음이 시비분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더 한심한 것은 불심은 좋고 중생심은 나쁘다는 판단 의식이다. 마음의 본디 모습은 불심인데, 그 불심이 세속의 생활 즉 사회생활로 말미암아 중생심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다시 그 본심인 불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중생심은 늘 이중적 생리를 띤다. 그 이중적 생리를 사람들은
지난 회에 이어서 설명을 계속한다. 사회적 욕망으로서의 소유욕을 우리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는데, 자연적 욕망으로서의 존재론적 욕망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림 그리기란 쉽지 않다. 이 자연의 존재론적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 이가 프랑스의 20세기 해체주의 철학자 조르쥬 바따이유(G, Bataille)라고 생각된다. 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끼리 교환하는 이른바 시장경제를 ‘제한경제’라고 불렀다. 제한경제는 상호 이익을 남길 목적으로 제한된 공급과 수요 안에서 주고받는 행위를 말한다. 거기에는 잘 계산된 절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세계는 그런 제한목적이 없는 무진장의 교환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태양은 빛을 무진장하게 비추고, 바다는 물을 무진장하게 나누어주고, 대지는 자양분을 역시 한없이 베푼다
“두 견해에 머물지도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도 말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여기서 언급된 본 마음은 앞장에서 언급한 ‘귀근득지(歸根得旨=근본으로 돌아가 마음의 본 뜻을 얻음)’와 같은 시각에서 이해돼야 한다. 마음이 외부의 자극으로 맞고 틀리고 하는 판단과 시비를 일으키면 마음은 그 외부의 자극으로 마음의 본디 성향을 잃게 된다고 승찬대사는 말한다. 우리는 그 마음의 본디 성향을 욕망이라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한국불교의 일반적 가르침과 약간 벗어난 듯한 생각을 개진하였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는 욕망을 탐욕으로 봐서 그 욕망을 독(毒)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을 그런 독으로서만 생각하지 않는다. 욕망은 세친(世親) 보살의 『유식삼십송
우리는 불심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생활은 돈, 권력, 명예, 지식 등과 같은 소유를 상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기에 물들지 않고 어떻게 불심을 닦아 나가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저와 같은 소유들을 외면하고 멀리하면, 그것은 승찬대사가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소유를 멀리하면 오히려 소유에 빠지고, 공을 좇으려 하면 오히려 공을 등지는 역설에 빠지는 결과를 빚는다. 불심을 닦는데 마장인 성욕을 사갈시(蛇蝎視)하여 그것을 멀리하면 더욱 그 성욕이 나를 뒤쫓아 온다. 그래서 공의 도리를 추구하여 절대고독을 찾으러 가면, 나는 무기(無記)의 상태에 젖어들어 불심과 까마득히 멀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불심을 전파하기 위하여 마치 기독교도가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핵심은 중생심은 소유론적이고 불심은 존재론적이라는 구분이다. 소유론적인 생각은 늘 나 중심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데, 존재론적인 불심의 사유는 나 중심의 사유화(私有化)는 사라지고, 앞의 설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공동존재의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 있다. 이 공동존재를 지향하는 존재론적인 공동적 사유가 그렇다고 공동체적인 공동소유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적 이념을 방편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승찬 대사가 말한 ‘견유몰유(遣有沒有=소유를 버리려고 하면 소유에 빠짐)’는 이미 지적한 바이다. 한자의 ‘유(有)’를 때로는 소유로, 때로는 존재로 번역되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있다’가 때로는 ‘가지고 있다’나 ‘가지다’로 혼융된다. 이 모든
사회생활 속에서의 대자적인 중생의 심리상태를 자연생활 속에서의 즉자적인 중생의 심리상태가 안고 있는 불심으로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 이처럼 사회생활 속에서 사회적 중생심을 자연적 불심으로 확 바꾸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요체겠다.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은 이른바 중생이 되지만, 그 사회생활에서 겪는 각각의 고통과 갈등과 긴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중생의 와각을 과감히 깨고 부처의 모습으로 화현하기를 발원한다. 사회생활은 인생살이의 시공(時空)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생살이를 결정한다. 사회생활은 인생살이를 결정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에겔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서로서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다툰다. 그 다툼은 주인의 자리에 오르려고 혈투를 벌린다. 이것이 역사 현장에
지난 회에 마음 상태를 철학적으로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나누어 구분했다. 인간이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고 자연 속에서 홀로 있으면 거의 대부분 불심을 간직하게 되지만, 사회생활을 통하여 남들과 엉켜 살게 되면 미음이 소유욕으로 끄달려 울렁거리게 됨으로써 중생의 심리상태를 갖게 된다. 전자가 변증법적 용어로 즉자적인 심리상태이고, 후자가 대자적인 상태라 부른다. 인간은 누구나 대자적인 사회생활을 밟아야 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흠결이 많은 중생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또 스스로 중생임을 자각하는 중생심리가 역설적으로 부처의 존재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된다. 중생심이 불심을 향하게 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불심은 깨어있지 않았기에 중생심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즉자적인 마음은 추상적
지난 회에 불심은 사심이 없는 중생의 마음이라고 언명됐다. 사심이 없는 마음이라는 말을 많은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즐겨 쓴다. 그러나 그 말은 대개 인기나 득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토해내는 수작에 불과하다. 중생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호오와 친소의 감정을 안가질 수 없다. 불심을 오랫동안 닦아 온 이들도 사회생활에서 요동치지 않고 사심 없는 마음을 그대로 지탱하기가 아주 어렵다. 부처의 마음은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다. 오로지 불심은 텅빈 마음에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한 마음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불심은 중생이 이해하기에 너무 아득하거나 까마득하다는 느낌을 훨씬 덜 갖게 될 것이리라. 우리는 보통 ‘성불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하지만, 정작 무엇이 부처인지 생활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