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너무나 남루합니다. 왜 자부와 긍지로 살아야 할 출가수행자들이 수치와 수모를 감수하며 지내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종단 상황이 절박한데 원로 중진스님들께서 끝까지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우리는 가슴 깊이 존경하고 따를 수 없습니다. 종단개혁에 적극 나서줄 것을 거듭 호소합니다.”(도법 스님이 1994년 3월30일 밤 경찰에 연행됐다 풀려난 직후 중앙승가대 정진관에서 쓴 글, 선우도량 6호)1994년 3월31일 서울 안암동 중앙승가대 정진관에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 조계사구종법회에 참여했다 경찰에 연행됐
1994년 3월30일 서울 조계종 총무원 청사는 폐허로 변했다. 폭격을 맞은 듯 청사 유리창은 산산조각 부서졌다. 바닥에는 유리파편과 돌들이 나뒹굴었다. 전화와 팩스, 책상 등 사무실 집기류들이 널브러져 전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웅변했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소속 스님들이 강제 연행된 자리를 경찰이 대신했다. 경찰은 총무원 청사를 빼곡히 둘러싸고 삼엄한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조계사 안팎도 차단해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봉쇄했다.의현 총무원장, 3월30일폭력 얼룩진 총무원청사서3선 위한 중앙종회 강행규정부 동원해 반대파 차단설
1994년 3월26일 오전 조계종 총무원 청사가 위치한 서울 조계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는 이날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구종법회를 열기로 했다. 의현 총무원장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의현 총무원장은 범종추의 청사 진입을 막기 위해 정문에 두꺼운 철문을 설치했다. 창문마다 쇠창살을 달아 철옹성을 구축했다. 출입구는 건장한 규정부 스님들을 배치해 외부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차단했다. 오후 들어 조계사에 젊은 학인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전국승가대연합(전승련) 소속 스님
‘상무대 의혹’ 비판여론 확산궁지몰린 의현원장 3선 강행승가단체 종단개혁논의 ‘봇물’94년 1월 8개 단체 연대결의개혁방식 두고 단체간 이견출범날짜 못 잡고 ‘지지부진’중앙승가대, 검찰청 항의계기범종추 출범 확정…조직구성단식·비폭력 전제로 개혁추진“조계종 종단개혁의 주체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였다. 이들 단체는 주로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 층들로 구성됐다. 당면 과제로 김영삼 정부의 정치자금 문제해결과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를, 장기적인 목표로 불교의 체질개선을 내세웠다.”(유승무,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조기현 씨 상무대 공사비 챙겨80억 동화사 대불 불사에 시주정대철 의원 폭로로 처음 공개총무원장·정권과의 연루 의혹의현 스님 돈세탁 후 정치자금정치권·교계 강타한 최대 이슈의현 총무원장 사퇴로 이어져국정 조사권까지 발동했지만진상규명 못하고 불교계 상처1994년 2월26일, 불교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정대철 민주당 의원이 전날 국회에서 “상무대 이전 공사 과정에서 검은 돈이 대구 동화사 대불조성 불사에 흘러 들어갔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1994년 2월26일자 1면)에 따르면 정 의원은 이날 광주 상무대 교외이전사업 시
▲ 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이 세간의 여론을 이끌었다면 법보신문과 주간불교신문, 승가대신문 등 종단 내부의 개혁 흐름을 주도했다.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이 세간의 여론을 이끌었다면 교계언론은 종단 내부의 개혁 흐름을 주도했다. 특히 법보신문과 주간불교신문(주간불교), 승가대신문 등은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과 종단의 구조적 모순을 집중부각하면서 개혁 여론을 이끌었다. 개혁세력들이 종단개혁에 본격 착수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그러나 이들 언론이 종단개혁의 전면에 나서는
언론은 여론을 형성하고 이끈다. 언론이 무관의 제왕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보도는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중심축이 되기도 한다. 1994년 조계종 개혁의 최대 후원자도 언론이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많지 않았다. 의현 스님은 종단의 행정과 입법, 사법 등 모든 권한을 틀어쥐었다.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공권력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처음 종단개혁을 시작할 때 개혁세력 내부에서조차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회의적 반응이 나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에 이어 재가불자연합이 종단개혁에 가담함으로써 종단개혁 초기 총무원과 언론으로부터 ‘종권다툼’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박수호, ‘사회운동으로서의 조계종 종단개혁운동’, 동양사회사상 11집)재가불자는 1700년 한국불교사의 버팀목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고, 김대성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고려불교의 토대는 지식인 불자들이 다졌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불교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재가불자들의 지극한 신심이 무엇보다 컸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불교의 현실은 올바른 수행의 부재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기뻐하고, 나누는 실천행으로 새로운 승풍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 일은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야 하리라.”(선우도량 창립취지문, 1990.11)해방 이후 현대 조계종사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950~60년대 비구·취처승간의 갈등을 시작으로 1970~80년대 종권을 둘러싼 대립까지 조계종은 숨 가쁜 세월을 건너왔다. 1990년대 들어서도 권력과 이권을 좇는 일부 스님들간의 대립과 반목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의 창립은 종단개혁을 외면하고 더 이상 통일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다는 시대적 인식에서 비롯됐다.”(김봉준, ‘94년 불교개혁운동의 반성적 점검’, 불교평론 8호) 1970~80년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사회 민주화 세력들은 1990년대 들어 변화를 고민했다. 1987년 ‘6·10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사회민주화가 어느 정도 실현됐다는 판단에서였다. 민주화 세력들이 인권과 복지 분야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최대 화두는 민주화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권력은 이 땅의 민주주의 싹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정치권력의 독점은 물론 사회곳곳에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독재 권력에 기댄 재벌의 성장은 사회 구조적 모순을 가져왔다. 때문에 군부독재권력을 몰아내는 것은 시대적 요구였다. 이런 민주화의 흐름은 1987년 ‘6·10민주항쟁’을 이끌어 냈고, 결국 군부독재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반 민중들의 열망으로 이끌어낸 민주화의 힘은 사회에 참여민주주의의 싹을 틔웠다.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부활시켰고,
“사부대중이 모두 평등한 교단을 건설하고 생활 속의 신불교를 정립하기 위해 맡은바 소임을 다할 것이다.” (한국재가불자연합, 창립선언문)1994년 7월23일 조계종 개혁의 중심에 섰던 재가자들이 ‘한국재가불자연합(재가연합)’을 발족했다. 종단개혁의 여망을 모으고 실천의지를 결집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조직체가 필요했다. 전국 40여개 재가단체 3000여명이 동참한 재가연합은 ‘종단운영의 사부대중 공동참여’를 기치로 내걸었다.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불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출재가의 역할을 나눠
1994년 7월27일 오후,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속개된 제6차 조계종 개혁회의에서는 뜻하지 않은 설전이 벌어졌다. 비구니 참종권을 두고 비구·비구니 스님들간의 공방이었다. ‘개혁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주된 안건은 총무원장 선출방식을 결정하는 종헌개정이었다.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할 것인지, 간선제를 채택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그러나 논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직선제를 도입하면 강원 학인들과 비구니들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하는데 그럴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된다”는 무착 스님(원로회의 사무처장)의 발언이 신호탄
“그동안 총무원장 1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삼보정재가 운영돼 왔다. 종단이 불안정할 때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종단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각 사찰의 주관적인 조건과 판단에 따라 정재를 처분해 왔다. 이런 악습을 바로잡고 삼보정재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 법제로서 그 전기를 마련하였다.”(조계종 개혁회의, ‘종단개혁불사 백서’)1994년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린 개혁세력들이 우선적으로 추진한 과제는 사찰재정 공개였다. 정치예속화와 함께 불투명한 재정 관리는 종단이 풀어야 할 오랜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종단개혁 이
근현대 한국사를 들여다보면 정치와 종교는 오랜 기간 공생의 관계였다. 정치는 표를 모으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고, 종교는 정치를 기득권 유지의 배경으로 활용했다. 정교유착은 적지 않은 곳에서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 때마다 종교계에 남발한 선심성 공약은 원칙과 형평성을 무너뜨려 사회갈등의 원인이 됐다. ‘단물’에 익숙해진 종교계도 점점 더 정치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1994년 종단개혁은 불교가 정치권력에 예속화된 것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의현 스님은 선거 때마다 스스로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보로 종단
1994년 4월13일 조계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산성처럼 견고하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이날 새벽 1시 서울 조계사를 에워싸고 있던 경찰병력이 철수를 시작했고, 더 이상 버팀목이 사라진 의현 스님은 결국 새벽 5시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8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였지만 ‘종단을 개혁하겠다’는 사부대중의 원력은 넘어서지 못했다. 스님은 이날 대각사에서 “사직원을 종정에게 제출했다”는 짤막한 말만 남긴 채 잠적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3월26일 실천불교전국
▲ 1994년 종단개혁운동은 종단 권력에 맞서 스님들과 재자불자들이 새로운 한국불교를 갈망하며 분연히 일어난 일대 사건이었다. 사진은 1994년 4월13일, 스님과 불자들이 개최한 범불교대회. 민족사 제공1700년 한국불교사에서 개혁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는 그 시대 불교계가 대중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각과 반성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불교교단의 치부를 도려낸 자정운동'에 따르면 근대 이전 불교개혁은 주로 결사(結社)의 형태로 나타났다. 고려시대 불교의 세속화를 혁신하고자 했던 보조국사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