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자니 해맑게 물결도 없어/ 눈에 뵈는 형상들 빼곡도 하다./ 어이 굳이 많은 말 기다리리오./ 그저 봐도 뜻이 이미 넉넉한 것을.’ ‘우리 선시 삼백수’ 중에서.연꽃 향 가득한 7월의 연못작품 속에 시 한 구절 투영공존하는 생명 그리며 관조선시(禪詩) 한 수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무의혜심(無衣慧諶, 1178~1234)이 지은 ‘소지(小池·작은 못)’라는 시다. 나지막이 읊조린 선시의 여운이 가지 않은 채 작가는 말을 이어나갔다. 맑은 물에 비추는 형상은 무엇이던가. 한 그루의 버드나무인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새인가,
현대인들에게는 인격화된 붓다라는 전통적 도상보다는 붓다의 철학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오숙진 작가의 작업이다. 그의 작업은 회화라기보다는 소묘, 드로잉에 가깝다. 안료 물감으로 색채를 입히는 대신, 염료 잉크로 무수히 그은 선들이 다소 추상적인 검은색이다. 검은색의 명료함이라서 가볍지 않고 고요하고 반성적인 감흥이다. 본질은 변한다는 무상 진리기존의 만다라 형태 벗어나검은색의 열린 구조로 표현오숙진 작가에 따르면 인도 북동부 다르질링의 티베트 불교사원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마침 사원 내부에 울긋불긋한 형태의 불교 도상으로 장식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이라는 말로 바뀔 만큼 최근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가 뜨겁다. 생명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에 그만큼 깊숙이 들어와 어떤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있을까. 불가에서는 미물 하나에도 존재의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큰 의미에서 생명체에 대한 신비한 섭리는 아직 나에겐 끊임없는 물음표이다.개는 동료이자 친구같은 존재내면에 공존하는 이종의 의미상대입장서 보면 가치는 동일박장호 작가의 작품에는 사람들이 반려동물 1순위로 여기는 개가 등장
파리하게 머리 깎은 스님 한 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설법을 하고 있는 대상에 머무른다. 보이지 않는 대상, 그는 석가모니이다. 이 작품은 부처님의 일생을 담은 불전도(佛傳圖) 중 중생에게 설법하는 장면으로 짐작된다. 키질 석굴 푸른빛에 매료고증 통해 현상까지 담아이 작품은 쿠차의 키질 석굴 제219호굴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의 한 장면을 옮겨 그린 작품이다. 쿠차는 중국 돈황을 벗어나 비단길이 펼쳐진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에 위치한 고대 불교 왕국 구자(亀茲)를 말한다. 쿠차에 조성된 키질 석굴사원
최근 한 뉴스에서 백제 의자왕 시절 입었던 옻칠 갑옷 전시 소식을 들었다. 옻칠 갑옷은 당시 철갑옷에 비해 무게가 가벼운데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효과가 있어 군사의 위용을 높여주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옻은 수천 년 전부터 공예나 약용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오죽하면 색칠을 하거나 바를 때의 표현과 칠흑 같다는 말 또한 검은 빛의 옻칠에서 유래되어 전승되어 왔을까. 이런 사실을 이웃해서 현대 옻칠 회화 작가인 정상엽의 열정을 큰 틀의 문화적인 맥락으로 읽어낸다면, 동양다움의 표현 형식으로 옻칠이 이 시
푸른색의 국화 꽃잎은 여느 꽃과는 달랐다. 그냥 꽃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들여다보았다.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것일까. 정물화에서의 흰 백자에 담긴 노란 소국이나, 문인화에서의 사군자 중 하나로 그려진 것이 아니고서는 여류화가들의 작품에선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80년대 학번, 혹은 90년대 초까지 동양화과 대학입시에 국화가 자주 등장했기에 작품의 소재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하늘로 날아가 버릴 듯한 형상불에 태워 사라짐 아쉬움 표현문인화의 한 소재로 소박한 모습과 달리 찬
사문 싯다르타가 마가다국 라자가하(王舍城) 근방 네란자라(尼連禪) 강기슭에 있는 핍팔라(pippala) 나무 밑에 정각한지 어느 날. 음력 12월8일, 미혹(迷惑)으로부터 진리를 찾았다. 성도(成道)의 진리, 바로 ‘연기(緣起)’다. 이때 법열 가득한 말씀은 ‘자설경(自說經)’의 ‘보리품(菩提品)’에 전한다. 스미소니언 방문 중 불화 흥미부처님 가르침 끊임없이 고민연기의 의미 대좌를 통해 표현‘일구월심 사유하던 수행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말씀은 게송이 되고
서울 조계사 부근 한 미술관에서 1층부터 3층까지 전관을 ‘기억의 간격’이라는 주제로 가득 채운 작품을 보았다. 그중에서 불화(佛畵) 도상을 차용한 ‘열반도’와 ‘반야용선도’ 등의 몇 작품으로 작가의 ‘기억’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불교라는 전통의 도상 안에서회귀·윤회하는 기억의 조각들기억은 지금의 적나라한 현실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그간 전통 수묵화를 이 시대의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주로 한지에 얼룩진 흔적이 퍼지는 자연스러운 추상성을 견지하는데, 화면의 곳곳 여백에 세밀하게 그려 넣은 작은 인물들을 통해
온갖 꽃으로 만개한 유월이다. 형형색색의 꽃들, 자연 속의 야생화는 야생화대로, 꽃집의 꽃은 또, 그런대로 무조건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꽃도 피기 위해선 인고의 시기를 보내야 하고, 그 인고의 시기를 지나야 망울을 터트린다. 난초의 꽃을 보려면 전 해 겨울부터 70일 이상 휴지기를 가져야 한다고도 한다. 그렇게 잘 관리해야 다음해에 꽃을 볼 수 있다. 불교의 육법공양에서 꽃은 수행을 의미하고, 수행의 상징을 부처님께 올림으로써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자 함이다.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자연 속에서 구도자 퍼포먼스사진·영상으로 시간
‘만(卍)’자. 영문은 ‘스와스티카(swastika)’. 그 어원의 의미는 ‘행운으로 인도하는’이다. 우리에게는 불교를 상징하는 한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부처님 가슴의 털 모양이 ‘卍’자 형상이며, 혹자가 전하기를 보리수 아래에서 수도할 때 붓다가 깔고 앉았던 풀의 모양이 그와 같았다고 한다. 이처럼 ‘만’자는 붓다의 가슴은 물론 손과 발에 새겨지며 만덕(萬德)을 의미하는 표시로 사용되었고 이후 불교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대만작가 소왕신 작품을 보고 회화작가서 서예작가로 전향부처와 수행 ‘卍’ 안에 담아젊은 불제
확언되지 않은 표현. 사실,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계량적 수치처럼 드러낼 수 있는가. 표영실의 그림은 내가 원하는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확장된다. 조심스러운 선, 결단력 있는 스침. 선명하지 않아도 분명 실존하는 형체들. 감정적 단어를 충분히 내포한 것이 가득찬 빈 공간. 절대로 낮게 느껴지지 않는 사고 우위의 감정들은 특정한 단어로 확정되어지기 보단 암시만으로도 괜찮을 만한 화면에 부여된 탁월한 특성이다.팽팽한 화면 속 삐딱한 불안분명하지 않아 더 풍요롭고선명하지 않아 더 어우러져모호한 배경이 유기체처럼 흐르며, 사라지는
풀 한포기 각황의 꽃, 삼매의 꽃…. 무심히 피어난 온갖 이름들이 어우러져 무성한 꽃들의 화엄 만다라를 피웠다. 다만 처음 보는 웃음꽃이고 흥미로운 만발이다. 김태연 작가는 전통이라는 아득한 시간의 질곡을 건너 자신만의 현대적 언어로 관음 보살상을 꽃피우고 있다. 마치 간다라에서 돈황, 경주에 이르는 상이한 궤적의 도상처럼 차분하고 시크한 이미지로 고대와 현대의 이미지를 적절히 가로 짓고 있다.낡고 오래된 흙의 질감 기반해돈황벽화를 보는 듯 묘한 감흥중앙아시아 벽화 묘미 살려내김태연은 흙 벽화기법으로 과거의 형식을 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