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꽃으로 만개한 유월이다. 형형색색의 꽃들, 자연 속의 야생화는 야생화대로, 꽃집의 꽃은 또, 그런대로 무조건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꽃도 피기 위해선 인고의 시기를 보내야 하고, 그 인고의 시기를 지나야 망울을 터트린다. 난초의 꽃을 보려면 전 해 겨울부터 70일 이상 휴지기를 가져야 한다고도 한다. 그렇게 잘 관리해야 다음해에 꽃을 볼 수 있다. 불교의 육법공양에서 꽃은 수행을 의미하고, 수행의 상징을 부처님께 올림으로써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자 함이다.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자연 속에서 구도자 퍼포먼스사진·영상으로 시간
‘만(卍)’자. 영문은 ‘스와스티카(swastika)’. 그 어원의 의미는 ‘행운으로 인도하는’이다. 우리에게는 불교를 상징하는 한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부처님 가슴의 털 모양이 ‘卍’자 형상이며, 혹자가 전하기를 보리수 아래에서 수도할 때 붓다가 깔고 앉았던 풀의 모양이 그와 같았다고 한다. 이처럼 ‘만’자는 붓다의 가슴은 물론 손과 발에 새겨지며 만덕(萬德)을 의미하는 표시로 사용되었고 이후 불교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대만작가 소왕신 작품을 보고 회화작가서 서예작가로 전향부처와 수행 ‘卍’ 안에 담아젊은 불제
확언되지 않은 표현. 사실,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계량적 수치처럼 드러낼 수 있는가. 표영실의 그림은 내가 원하는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확장된다. 조심스러운 선, 결단력 있는 스침. 선명하지 않아도 분명 실존하는 형체들. 감정적 단어를 충분히 내포한 것이 가득찬 빈 공간. 절대로 낮게 느껴지지 않는 사고 우위의 감정들은 특정한 단어로 확정되어지기 보단 암시만으로도 괜찮을 만한 화면에 부여된 탁월한 특성이다.팽팽한 화면 속 삐딱한 불안분명하지 않아 더 풍요롭고선명하지 않아 더 어우러져모호한 배경이 유기체처럼 흐르며, 사라지는
풀 한포기 각황의 꽃, 삼매의 꽃…. 무심히 피어난 온갖 이름들이 어우러져 무성한 꽃들의 화엄 만다라를 피웠다. 다만 처음 보는 웃음꽃이고 흥미로운 만발이다. 김태연 작가는 전통이라는 아득한 시간의 질곡을 건너 자신만의 현대적 언어로 관음 보살상을 꽃피우고 있다. 마치 간다라에서 돈황, 경주에 이르는 상이한 궤적의 도상처럼 차분하고 시크한 이미지로 고대와 현대의 이미지를 적절히 가로 짓고 있다.낡고 오래된 흙의 질감 기반해돈황벽화를 보는 듯 묘한 감흥중앙아시아 벽화 묘미 살려내김태연은 흙 벽화기법으로 과거의 형식을 빌려
부처님오신날이 있는 오월, 일상에서 겪는 작은 미움과 짜증, 불평과 불만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짧은 상식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결국 고통의 원인이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게 아닐까.민속적 분위기 원시적 색채상상 표현하고 욕망 드러내이지적인 화풍에 대한 반란매일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인연(因緣)들이 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 작은 일들이 쌓이면 어떤 큰 인연이 될 것만 같아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아침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너무 얄미운 한 젊은 남자가 있다. 버스 앞문이 열릴
봄비가 내린다. 봄비 소리에 백곡이 잠에서 깬다. 그러고 보니 곡우(穀雨)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고 하는데, 연이은 비 소식에 올해는 풍년일 듯하다. 부정한 사람은 볼 수 없다던 볍씨는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손에 담겨져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본래 현상을 훼손하지 않고 예배 대상으로서 부처 구현향 피어오르듯 아지랑이 오르는 골목 지나 작은 건물들 앞에 이르렀다. 길 찾아 헤매는 손님 탓에 이민영 작가가 밝은 미소로 마중 나왔다. 좇아 올라간 작업실 안에 있던 여윤구 작가가 살가운 인사를 건넨다. 작업 중인
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설명하기 전과 후의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귀엽고 세련된 느낌의 그림에서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일반적 미술작품 속에서 돋보이는 특징이 있는 ‘사이’의 작품이 아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애인의 특징인 ‘차이’를 보려는 듯한 경우가 더러 있다.마카펜 활용해 수를 놓듯 채색소재는 동물·자전거 타는 사람선입견·편협에 대한 반성 계기예술은 종교처럼 일반적인 사회구성원의 직업군을 특정하지 아니한다. 물론 보다 전문적일 수는 있다. 아름다움에 관해 보이는 것 이외의 계량적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이라 출가자 중에 작업에 몰두하는 분을 모시고자 발원하면서 작업과 수행이 일행으로 이루어지고 간절한 기도의 정향(定香)이 작품으로 성취되는 수행자를 찾아 나섰다. 인천의 굴포천역에서 내려 걷자 교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건넨다. 사경으로 불보살 형상 표현글자크기 2mm에 농담까지 사경화로 법당 장엄 발원해“하나님 믿으세요.” 건물마다 작은 교회들로 몸살이다. 이윽고 건물 3층 포교당으로 오르자 지호 스님의 작업실이자 불법을 일구는 도량이 반겨준다. 작업실에는 스님의 손을 타고 밭고랑을 흐르는 가갸거겨의 숱한 불음(佛
이기숙 작가를 다시 만난 것은 작년 2016년 6월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갤러리H에서이다. 늘 끊임없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작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2006년 이후 한동안 작업을 못하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붓을 들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부터 항상 쉼 없이 작업을 하고, 늘 새로운 뭔가를 완성해 내기 위해 질주하던 작가가 작업을 쉬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의 형상 단순화시켜 이미지화소박한 배경에 명쾌한 색으로 유희육아의 과정 속에서 아이의 자폐증상은 작가로 하여금 온
무심한 선사(禪師)의 방을 엿본다. 삭발한 선사가 꼿꼿이 앉아있다. 이마에 패인 가로주름과 찌푸린 듯한 미간의 주름살에서 참선의 공력이 읽혀진다. 태산처럼 고요하다. 백색의 내포에 옅은 회색의 장삼을 입고 있다. 장삼 위로 붉은색 가사를 걸친 선사는 한 손에 염주를 쥐고 다른 한 손은 주장자를 세워 잡았다. 그 모습 조용하고 편안하니, 곧 안온(安穩)한 사찰의 선사 그대로다.무한겁 시간 속 수백번 붓질진영이 지닌 오랜 시간 공유충북 보은 법주사에 있는 ‘연담당 세홍 대선사 진영’을 현상모사한 작품이다. 진영은 선승의 초상화를 말한다
왜 기계일까? 보이는 것은 성스러운 대상으로 다뤘음에 틀림없는 불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이보그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계적 장치가 눈에 들어온다. 붓다의 예민한 미소와 차가운 사이보그의 촉감이 하나의 형상에 담겼다. 이 흔치 않은 경험은 중앙대와 동대학원에서 아카데믹한 조각을 전공한 왕지원 작가의 작품들이다. 게다가 붓다의 얼굴을 한 사이보그들은 화려한 기계적 장치인 나사와 볼트 등의 골조를 굳이 숨기지 않고 화려하게 움직인다. 마치 생(生)을 꿈꾸는 사이보그처럼, 활(活)하고 싶은 예술가의 창작 욕구처럼. 붓다를 꿈꾸는 인간의
박진홍은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우연히 전시 중인 작가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그가 소개한 영상 작품에서 한 폭의 청명함이 노니는 푸른 극락세계의 미묘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전승되는 전통화가 아닌 TV 모니터 속에 한가로운 연꽃과 물고기 영상 작품은 짙은 청색 배색을 바탕으로 한 단색의 간결함과 절제된 영상미를 함축적으로 뽐내고 있다.모니터에 공존의 생명력 부여현상과 허상의 관계를 되묻다잘 알려진 대로 비디오 설치 작품은 백남준 작가의 ‘TV 부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은 최소한의 오브제를 사용하여 불교사상을
따뜻한 햇살과 쌀쌀한 바람이 묘하게 공존하는 계절이다. 힘든 계절이 가고 금방이라도 좋은 날이 올 것 같다가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 바람은 ‘아직도?’ 라고 묻게 한다. 올 듯 말 듯, 2월에서 3월이 그렇다. 나무 위 상처 틈서 핀 꽃치유의 과정이자 자비심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한 박재철 작가의 그림에는 차가운 도시의 보도블록 위의 식물들, 동네 어귀에 허술한 공간위에 핀 꽃, 작고 수수하기만 한 눈길 한번 주기 어려운 풀꽃들이 그 어느 화려한 꽃들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등장한다. 전통회화에서 화훼(花卉)와 초충(草蟲)은 오랜 시
하늘은 만월(滿月)을 단장시켜 사방불을 마련했고, 땅은 명호(明毫)를 솟구어 하룻밤에 열렸도다.교묘한 솜씨로 다시금 만불을 새겼으니, 부처님의 풍도를 삼재(三才, 하늘·땅·인간)에 두루 퍼지게 하리.타출로 입체적 공간 표현‘쓰임’을 위한 공예 지향‘삼국유사’ 제3권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의 마지막에 적힌 찬시(讚詩)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4)이 당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만불산(萬佛山)을 조성토록 공장에게 명하였다. 침단목(沈檀木)을 새겨 만든 만불산에는 온갖 산천의 형상 안에 만불
몇년 전 변대용 작가의 전시 제목인 ‘당신의 위로와 위안’ 앞에는 생략된 문장이 있다. 아마도 ‘당신의 상처와 아픔’ 정도의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위로와 위안은 상처와 아픔이라는 선행(先行)이 있어야만 가능한 단어다. 상처와 아픔은 사회적이거나 공동의 사건일 수도 있으나 다분히 개인적 경험의 행태(行態)로 무한 생성되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치의 가치를 보증한다. 상처의 경험시 필요했을 위로라는 구조.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어 굳이 오늘의 예술로 꺼내 말하기 회피하는 이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작가는 놀랍게도 구상
움직일까 말까 두렵다. 한발 한발 딛고 일어선 만큼 되돌아 갈 수 없는 생(生)의 보폭, 잔뜩 움츠린 아픔이 매달리 듯 세찬 바람으로 스민다. 봄이 온다. 기지개 펴듯, 지난 산란의 아픔이 봄의 전령 되어 따숩도록 비춘다.개구리·개구리알에 빗대어6년간 108번뇌 시리즈 작업우울감 속 내재된 긍정 표현권금영의 개구리는 긴 겨울의 동면과 봄 사이에서 주저하는 번뇌를 던진다. 개구리의 원래 형태인 알 무더기의 끈끈함으로 무한 증식하는 변이적 모습은 우두커니 우리 삶의 생태와 엇비슷함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 성체가 되기 전의
소한(小寒)이다. 시작된 추위에 바람이 차다. 살갗 에는 어느 날, 나는 삼청동 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시선 머문 창가로 걸어가 앳된 얼굴의 전수민 작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며 긴 시간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쾌하고 유익한 시간을 담은 사담(私談)이었다.전수민의 ‘염원(念願)’을 본 것은 신년 정초다. 정유년의 새해를 맞이하여 저마다의 기원을 담은 세화(歲畵)가 한옥갤러리에 걸려 있었다. 하이얀 바탕에 알록달록한 진채(眞彩)로 채색된 색의 향연이다. 색의 아름다움은 대비에 의해 구현된다. ‘염원’이 그랬다. 화
미(美)의 사전적 의미는 ‘아름답다’이다. 그 외에도 ‘착하다’‘좋다’, 파생되어 ‘옳다’까지 해석이 가능한 단어다. 불교회화는 언제부턴가 전통적인 형상의 규칙만을 고수한 전통불화와 종교 형상을 벗어난 탈불화에 대한 심리적 경계가 자리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의 시원은 종교적 경험과 깊이 연루되어 있으며, 최초의 예술은 주술적인 것과 종교의례 가운데의 노래와 춤, 그림 등의 혼합된 복합체로서 미지의 세계에 대응하는 삶의 한 방식으로써 잉태되고 태어났다.진지하고 온전한 모사로변하지 않는 재료의 진정성간절함 마음 그림으로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이다.” (백남준, 1961)순간순간 바뀌는 생각들관찰하고 작업으로 반응오늘날 미술에서 솟아나는 종의 다양성은 과거 이념을 초월하고자 하는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해묵은 담론은 그 자체로 일품 장맛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신진 작가들에게 동질의 경향성과 주장들은 수거의 대상이 되면서 점차 다양한 매체와 소재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창작하기 위해 회화, 설치, 조각, 퍼포먼스 등에 이르기까지 종합적 예술을 향해 광범위한 노정은 그 자체로 미완의 장엄이라 할만하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