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황태자 어머니뛰어난 지혜와 인품으로궁인서 황귀비까지 출세 아관파천 이끈 숨은 주역“인재 불사가 나라의 미래”진명·명신여학교 등 설립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895년(고종 32년) 10월. 조선의 국모가 시해됐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흉도들의 짓이었다. 이날 새벽 일본군과 경찰의 비호 아래 궁궐에 침입한 흉도들은 곧장 명성왕후의 침실을 습격했다. 조선 침략의 걸림돌인 명성왕후를 제거할 목적이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던 조선의 국모는 그렇게 일본의 칼 끝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당시 극에 달했던 일본의 횡포를 극명하게 드러낸 치욕적 사건인 동시에, 역사상
기생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극심한 흉년땐 천금 희사해제주민 1000여명 구휼 나서 정조, 이타행 전해듣고 탄복조정 대신들 칭송도 이어져불교성지 금강산 유람 이례적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만덕은 마치 꿈을 꾸는 듯 했다. 배를 향해 내딛는 걸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육지로 향하는 순간이다. 한 평생 간절히 바랐지만 불가능하리라 믿어왔던 일이었다. 만덕에게 바다는 반평생 의지해 온 삶의 터전인 동시에,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굴레였다. 당시만 해도 제주 여성은 관의 허가 없이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제주도의 인구감소를 막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제약이기도 했다.
지친 조선군 위해 밥 보시행주대첩서 의병으로 활약말년엔 재산 사찰에 희사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비릿한 피 내음이 북한산 자락을 휘감았다. 곳곳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에게 패전의 흔적이 역력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진영을 온통 뒤덮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퇴로조차 막혀버린 패잔병들에겐 일말의 희망조차 없어 보였다. 선조 26년(1593) 1월,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1년이 돼가던 시점이었다. 그동안 왜군의 기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조선군은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과 연합, 평양성을 탈환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한양을 눈앞에 둔 벽제관 전
희빈 장씨 중상모략으로억울하게 폐위돼 쫓겨나궁궐 안팎서 눈물로 한탄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간이 장수하고 단명함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왕후는 그 드높은 덕(德)에도 명이 짧았으니 그 이치가 어찌 이리도 냉혹한가.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도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왕후께서는 험하고도 위태로운 사태를 몸소 겪으시고도 품위와 덕을 잃지 않으셨다. 옥과 같은 행실에는 허물이 없었고 죽은 뒤 그 가치가 더욱 드러나니 신하와 백성이 진실로 찬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이조판서 이여) 숙종 27년(1701) 8월14일. 인현왕후 민씨가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뛰어난 외모에 현숙함 갖춰15세때 선조와 혼인 했지만사랑 받지 못한 외로운 신세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스산한 밤공기가 내전을 훑고 지나갔다. 멍하니 흔들리는 촛불을 응시하던 어린 신부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하다.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피는가 했더니 이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혹시나 남편의 발걸음일까 작은 바람 소리에도 설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남편과 성대한 혼례를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런데 정작 남편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제 막 시집온 꽃다운 신부에게 남편의 무심함은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하고
남편 죽은 후 오언관과 교우사회적잣대 넘어선 도반 돼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산속에서 체포한 자들의 신원이 매우 미심쩍다. 신분을 숨기고 거짓으로 친족행세를 하더니, 각자 결혼할 때의 사적과 집안 노비들에 대해 매우 자세히 말한다. 그러나 간간이 사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괴이하게 여긴다.” 광해군 6년, 조정에 수상한 자들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안음현(지금의 경남 함양)의 덕유산 자락에서 체포된 세 사람에 대한 내용이었다. 남자 한명과 여자 둘이었는데 남자와 여자는 스님의 행색이고 나머지 한 여성은 그들을 따르는 신도라 했다. 이들을 체포한 안음현 방백(감찰사)은 “지난해 도적질을 하고 도망한 자로
경빈·희빈 등쌀에 숨 죽이다아들 낳은 후 정쟁 본격 개입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초목의 씨앗은 싹을 틔우기 위해 겨우내 땅 속에서 봄이 오길 기다린다. 흙과 양분, 물과 햇빛 등 모든 것이 충족되는 최적의 순간, 씨앗은 비로소 흙을 밀고 올라와 한줄기 싹을 틔운다. 조선시대 수렴청정을 통해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의 삶도 이 와 다르지 않았다.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랜 세월 숨죽이며 훗날을 도모해 왔기에 그녀는 비로소 왕권을 넘어선 강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문정왕후 윤씨(1501~1565). 그녀는 18세 꽃다운 나이에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입궐했다. 첫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원자
뛰어난 학식의 여성정치인 아들 왕 만들어 권력 쟁취 며느리 윤씨 폐서인 주도 연산군 잔인한 보복 요인돼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연산군 즉위 10년(1504) 3월의 어느날 밤,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왕의 배다른 동생인 이항과 이봉을 잡아와 곤장을 치라는 왕의 전교가 내려진 것이다. 신하들은 혼비백산했다. 한밤중에 대군들에게 형벌을 내리다니. 그러나 이미 연산군은 포악할대로 포악해져 있었다. 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변고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밤이 깊어 대부분의 신하들이 퇴청했음에도 숙직 승지 두 명이 다급히 옥졸들을 대동하고 왕명에 따랐다. 장을 80대씩 치고 나자 이번엔 다시
세조, 즉위 후 피부병 시달려 세자 급사하고 예종도 단명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친족을 죽였다는 패륜의 낙인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을 밀어내고 조선 제7대왕으로 즉위한 세조는 평생을 역창과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았다. 즉위 3년째에는 세자가 급사했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아들 예종마저 스무 살에 죽었다. 왕실의 잇단 변고를 지켜본 이들은 세조의 죄업이 그 원인이라 수군거렸다. 세조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한 이는 바로 아내 정희왕후 윤씨였다. 그녀는 남편의 극심한 피부병과 정신질환을 돌봤을 뿐 아니라, 이후 세자와 예종 두 아들의 죽음으
조선 최초 간택으로 왕비돼 15세때 연하인 단종과 혼인 숙부 왕권 야망에 노심초사결혼 1년반 만에 왕위 이양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여인의 울음소리가 언덕을 휘감고 내려와 마을을 덮었다. 그 슬픔은 깊고도 묵직했다.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도 함께 통곡했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은 여인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했던 민초들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여인이 매일 올라 눈물짓는 언덕배기는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렸다. 떠나간 남편이 머문 곳이 동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그녀의 기구한 삶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서럽고 아픈 사연으로 점철돼 있다.
태종 셋째아들 충녕과 혼인1년 만에 왕자비에서 왕비로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소헌왕후 심씨에게 1418년은 끔찍하리만치 다사다난한 해였다. 남편 충녕대군이 갑작스레 왕세자가 됐고, 3개월 만에 조선의 왕이 됐다. 그리고 다시 3개월 만에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전락했으며 그녀 스스로도 폐비의 위기를 감내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극단적인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끔찍한 세월이었으며 왕비가 된 기쁨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드러내지 못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10년전, 열네 살이었던 그녀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
이방원이 꾸민 ‘왕자의난’에한순간 오빠 둘·남편 잃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399년, 조선의 공주가 출가했다. 왕이 직접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유교적 이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들 모두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속세를 등지려 하는 공주의 기구한 삶이 가엾고 애달팠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그녀는 조선 최초의 왕실 출가자다. 어머니를 여읜지 2년 만에 왕위찬탈의 희생양으로 두 오빠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비운의 공주이기도 하다. 경순공주의 출가는 그녀의 돈독한 불심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