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는 마음이 만든 것이요육신 또한 항상 하지 않아 한 생각 쉬면 바로 보리수요쉬지 못하면 그대로 무명수 ▲중국 란주에 있는 병령석굴 입구. 4~5세기 북위때부터 시작돼 원나라때까지 1000년 넘게 조성이 계속 됐다. 지금은 184개의 석굴이 남아있다. 실크로드를 건넌 불교는 이 곳을 거쳐 중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儞諸方來者가 皆是有心이라 求佛求法하며 求解脫求出離三界하나니 癡人이여 儞要出三界하야 什麽處去오 佛祖는 是賞繫底名句니라 儞欲識三界麽아 不離儞今聽法底心地니 儞一念心貪은 是欲界요 儞一念心瞋은 是色界며 Ï
바른 견해 얻고자 한다면 결코 미혹당하지 말아야 부처·조사의 허명에 속으면 깨달음에선 영영 멀어져 속박하는 것 과감히 쳐내야 진정한 자유와 해탈이 가능 ▲중국 돈황 막고굴 입구. 인도와 서역을 거쳐 중국 서쪽 끝자락에 당도한 불교는 이곳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운 후 중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道流야 出家兒는 且要學道니라 祇如山僧은 往日에 曾向毘尼中留心하고 亦曾於經論尋討라가 後方知是濟世藥이며 表顯之說이라 遂乃一時抛却하고 卽訪道參禪하니라 後遇大善知識하야 方乃道眼이 分明하야 始識得天下老和尙하야 知其邪正하니 不是娘生下便會요 還是體究練磨하야 一朝自省하니라 해석) “여러
성인 따르고 범부 피하지만깨달음은 미추를 떠난 자리 선지식과 학인의 만남에도공부 따라 네 가지로 구분 입으로는 불교를 말하면서장사치 넘어선 승려도 많아 ▲맥적산 제4호굴. 북주(557~581)시기 개척이 시작돼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며 보수됐다. 절벽 면에 조성된 이 석굴은 북주 시대의 문학가이자 대도독이었던 이윤신이 개착했다. 4호굴은 일명 칠불각으로 불린다. 일곱개의 석굴에 각각 칠불을 봉안하고 나한상과 보살상을 협시로 조성한 석굴 가운데 하나다. 석굴을 지상으로부터 50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唯有道流의 目前現今聽法底人하야 入火不燒하며 入水不溺하며 入三塗地獄호대 如遊園觀하
부처님 육신통은 여섯 가지 경계에 미혹하지 않는 것삼계가 오직 마음이며 만법은 의식이 만든 환영일 뿐 ▲중국 용문석굴 중 북위의 대표작인 빈양중동 석굴의 석가여래. 선무제가 부황 효문제의 모습을 재현했다는데, 단아하고 자애로운 미소가 일품이다. 有一般禿比丘하야 向學人道호대 佛是究竟이니 於三大阿僧祇劫에 修行果滿하야 方始成道라하니 道流야 儞若道佛是究竟인댄 緣什麽하야 八十年後에 向拘尸羅城 雙林樹間하야 側臥而死去며 佛今何在오 明知 與我生死不別이니라 儞言, 三十二相八十種好가 是佛이라하니 轉輪聖王도 應是如來라 明知是幻化로다 해석) “일반적으로 머리 깎은 비구들이 학인들
▲소림사 경내 입설정 안에 있는 달마스님상. 道流야 諸方이 說有道可修하며 有法可證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오 儞今用處 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오 後生小阿師가 不會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하야 許他說事하야 繫縛他人하야 言道호대 理行이 相應하고 護惜三業하야사 始得成佛이라하니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해석) “여러분! 제방에서 말하기를 닦아야 할 도가 있고 깨우쳐야 할 법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법을 깨치고 무슨 도를 닦아야한다는 말인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어떤 물건이 모자란단 말이며 어떤 것을 닦고 보완해야 한다는 것인가? 후대의 못난이들이 잘 모르고 여우와 도깨비 같
▲선종의 이조인 혜가 스님이 눈속에서 자신의 팔을 베어 달마 스님에게 바치며 법을 구했다는 자리에 세운 소림사 입설정. 儞諸方에 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儞言六度萬行을 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도 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로 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해석) “그대들은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고 말하나 착각하지 마라. 설사 닦아서 얻을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유전의 업이다. 그대들이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 업을
경계가 수만 가지로 차별되지만 사람은 한사람천강에 비친 달 여럿이나 본래 달 하나인 이치 쓸데없는 생각 멈추고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면가는 곳마다 주인되고 서 있는 곳이 진리 된다 ▲중국 천수 맥적산 석굴 13호굴 삼존불. 1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은 자비롭고 인자한 상호가 미려하기 그지없다. 却見乘境底人하니 是諸佛之玄旨라 佛境이 不能自稱我是佛境이요 還是這箇無依道人이 乘境出來니라 若有人이 出來하야 問我求佛하면 我卽應淸淨境出하고 有人이 問我菩薩하면 我卽應慈悲境出하며 有人이 問我菩提하면 我卽應淨妙境出하고 有人이 問我涅槃하면 我卽應寂靜境出하야 境卽萬般差別이나 人卽不別이라 所以로 應物現形은 如水中月이니라
사대는 인연화합 의해 조합된 것이를 알아야 경계 휘말리지 않아 법문을 듣는 주체는 육신 아니며육신을 능숙하게 부리는 그 사람 ▲중국 마안산 계태사. 사진은 중국 스님들이 계를 받았던 계단이 있는 선불장 전경. 問, 如何是四種無相境고 師云, 儞一念心疑가 被地來礙하며 儞一念心愛가 被水來溺하며 儞一念心瞋이 被火來燒하며 儞一念心喜가 被風來飄하나니 若能如是辨得하면 不被境轉하고 處處用境이라 東涌西沒하며 南涌北沒하고 中涌邊沒하며 邊涌中沒하야 履水如地하며 履地如水하나니 緣何如此오 爲達四大如夢如幻故니라 해석) 물었다. “무엇이 네 가지 모양이 없는 경계
부처님은 의지함이 없는 곳에서 출현명칭·글 집착하면 지혜 눈 장애받아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법문 듣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중국 뤄양 용문석굴의 봉선사 대불. 問, 如何是眞正見解오 師云, 儞但一切入凡入聖하며 入染入淨하며 入諸佛國土하며 入彌勒樓閣하며 入毘盧遮那法界하야 處處皆現國土하야 成住壞空하나니라 해석)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참되고 바른 견해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여러분은 다만 언제 어디서나 범부의 경지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경지에도 들어가며 더러운 곳이나 깨끗한 곳에도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도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면 경계에 떨어져부처가 바로 중생이고 중생이 바로 부처 깨달음은 지금 이순간, 시간 필요치 않아일체의 시간 속에 특별한 법은 따로 없어 ▲중국 하북성 정정시 임제사 대웅전. 問, 如何是佛魔오 師云, 儞一念心疑處가 是箇魔니 儞若達得萬法無生하면 心如幻化하야 更無一塵一法하야 處處淸淨하나니 是佛이니라 然이나 佛與魔는 是染淨二境이라 約山僧見處하면 無佛無衆生하며 無古無今하야 得者便得하야 不歷時節이요 無修無證하며 無得無失하야 一切時中에 更無別法하니 設有一法過此者라도 我說如夢如化하노니 山僧所說이 皆是니라 해석) 어느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와 마구
▲소림사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불상과 달마상. 山僧說法은 與天下人別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이 出來目前하야 各現一身問法하되 纔道咨和尙하면 我早辨了也니라 老僧이 穩坐에 更有道流하야 來相見時 我盡辨了也니 何以如此오 祇爲我見處別하야 外不取凡聖하며 內不住根本하야 見徹하야 更不疑謬니라 해석) 산승이 설하는 법은 천하의 사람들과 다르다. 예를 들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눈앞에 나타나 일신을 나투어 법을 묻기를 ‘화상에게 도에 대해 묻습니다’ 하자마자 나는 바로 알아차린다. 노승이 가만히 앉아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만나면 나는 바로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나는 견해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밖으로 범부와 성인을 따로 취하
▲중국 선불교의 시원인 숭산 소림사. 사진은 소림사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 示衆云, 我有時에는 先照後用하며 有時에는 先用後照하고 有時에는 照用同時하며 有時에는 照用不同時니라 先照後用은 有人在요 先用後照는 有法在요 照用同時는 耕夫之牛하며 奪飢人之食이니 敲骨取髓하고 痛下鍼錐요 照用不同時는 有問有答하며 立賓立主하야 合水和泥하야 應機接物이니 若是過量人인댄 向未擧已前하야 起便行이라 猶較些子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말했다. “여러분! 나는 어느 때는 먼저 비추고 나중에 쓰며, 어느 때는 먼저 쓰고 나중에 비추며, 어느 때는 동시에 비추고 쓰며, 어느 때는 비춤과 씀을 동시에 하지 않기도 한다. 비춤이 먼저고 씀이 나중일
아라한과 벽지불은 화장실의 똥오줌 보리나 열반 나귀 매는 말뚝에 불과 부처를 구하려는 마음 일으키는 순간 생사윤회의 커다란 조짐이 될 뿐이다 ▲중국 선종의 시원인 소림사 입구. 道流야 心法이 無形하야 通貫十方하야 在眼曰見이며 在耳曰聞이요 在鼻齅香하고 在口談論하며 在手執捉하고 在足運奔이라 本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一心이 旣無하면 隨處解脫이로다 山僧의 與麽說은 意在什麽處오 祇爲道流가 一切馳求心을 不能歇하야 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해석) “여러분! 마음이라는 것은 형상이 없어 시방세계를 관통 한다. 눈에 있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어 듣
▲중국 숭산 소림사의 탑림. 소림사를 거쳐간 역대 스님들의 사리와 비석이 모셔져 있다. 大德아 三界無安이 猶如火宅이라 此不是儞久停住處니 無常殺鬼가 一刹那間에 不揀貴賤老少니라 해석) “여러분! 삼계는 편안하지 않아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이곳은 그대들이 오래 머무를 곳이 못된다. 무상(無常)이라는 사람을 죽이는 귀신이 한 찰라 사이에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나이 먹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 가리지 않는다.” 강의) 삼계(三界), 즉 중생세계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표현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중생세계를 불타는 집으로 비유한 것은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입니다. 일체가 영원하지도 항상(恒常)하지도
▲중국 임제사 경내에 들어선 장경루. 師乃云, 今時學佛法者는 且要求眞正見解니 若得眞正見解하면 生死不染하야 去住自由하야 不要求殊勝하나 殊勝이 自至니라 道流야 祇如自古先德은 皆有出人底路니라 如山僧指示人處는 祇要儞不受人惑이니 要用便用하야 更莫遲疑하라 如今學者不得은 病在甚處오 病在不自信處니 儞若自信不及하면 卽便忙忙地하야 徇一切境轉하야 被他萬境回換하야不得自由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말했다. “오늘날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진정견해(眞正見解)를 갖춰야 한다. 만약 진정견해를 얻을 수 있다면 생사에 물들지 않고 가고 옴이 자유로워져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이뤄진다. 수행하는 사람들이여! 옛
▲임제 스님의 사리와 발우가 모셔져 있는 임제사 청탑.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師云 三要印開에 朱點側이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 漚和爭負截流機리오 問, 如何是第三句오 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 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삼요(三要)라는 도장을 찍으니, 아직 도장의 인주가 나타나게 찍지를 못했다. 붉은 점이 나타나지 않음이요. 이리저리 따져서 주관과 객관을 나눔을 용납하지 않는다.” “제이구의 경지는 어떻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문수가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
▲나무로 조성된 임제 스님의 상이 모셔져 있는 법유당. 법의 젖, 또는 법이 흐르는 대지라는 의미다. 上堂 僧問, 如何是劍刃上事오 師云, 禍事禍事로다 僧이 擬議한대 師便打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칼날 위의 일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칼날은 반야, 혹은 지혜를 말합니다. 번뇌와 망상을 베어버리는 지혜의 칼날입니다. 말 그대로 반야(般若)의 검(劍)입니다. 검인상사(劍刃上事), 즉 칼날 위의 일은 사량과 분별이 모두 떨어져 나간 경지를 뜻합니다. 그런데 한 스님이 검인상사를 물어오고 있습
▲임제사에 들어가기전 문 앞에서 바라본 전경. 임제 스님의 사리를 모신 청탑이 우뚝 솟아있다. 上堂에 有僧出禮拜어늘 師便喝한대 僧云, 老和尙은 莫探頭好로다 師云, 儞道하라 落在什麽處오 僧이 便喝하니라 又有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이 禮拜어늘 師云, 儞道하라 好喝也無아 僧云, 草賊이 大敗로다 師云, 過在什麽處오 僧云, 再犯을 不容이로다 師便喝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니 어떤 스님이 나와서 절을 했다. 임제 스님이 문득 할(喝)을 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 의
▲임제사 전경. 사원 초입에 서있는 ‘청탑’ 안에는 임제 스님의 사리와 가사, 발우가 모셔져 있다. 復云, 此日法筵은 爲一大事故니 更有問話者麽아 速致問來하라 儞纔開口하면 早勿交涉也니라 何以如此오 不見가 釋尊云, 法離文字며 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 爲儞信不及일새 所以今日葛藤이라 恐滯常侍 與諸官員하야 昧他佛性이니 不如且退니라 喝一喝云, 少信根人은 終無了日이로다 久立珍重하라 해석) 임제 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를 위한 것이니, 다시 질문할 사람이 있는가? 속히 질문을 해라. 그러나 그대들이 입을 열기만 하면 본질과는 아주 멀어지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임제 스님의 할은 사량과 분별 끊어내는 활발발한 방편이다. 선불교는 역사적인 질곡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상황을 견뎌내야 하는 백성들의 입장이라면 하루하루가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급박한 시절에 성불(成佛)을 하려면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수행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백성들 입장에서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이때의 불교는 고통에 빠진 사람을 지금 당장 위로하고 고통에서 건져내기 위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부처가 돼야 합니다. 그것이 선불교의 정신입니다.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