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와 장애인. 아무 관계도 없어보이지만 이 두사람 사이에도 특별한 인과가 존재하고 있다. 불교철학에서 한 낱말만 남기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연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잡아함경』의 말씀대로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 동쪽은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쪽과 ‘관계, 차이, 구조’ 속에서 “해가 뜨는 쪽”, “기세가 상승함” 등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실체를 보려 하지만, 모두 허상일 뿐, 거기 관계만 존재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 개미가 기어가고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그 순간에도 온 우주, 온 우주의 생명체와 사물들이 관계한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킬링필드’의 주인공 폴 포트가 캄보디아 인구 4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 이면에는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소수의 동질성을 지키려는 무모한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 나는 없는데 내가 있다고 집착하면 타인의 욕망을 점유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나를 지키고 강화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없다며 나를 버리면 나는 타인을 위해 오히려 나의 욕망을 절제하며 그를 그답게 하여 거꾸로 나를 존재하게 한다. 이런 역설을 이
메마른 강에어김없이 눈은 찾아와물길 따라 물향내 따라 나래짓하는데어느 샌가 왜바람 한 줄기눈송이, 송이 이 기슭 저 펄로밀어내고 내쫓고 내동댕이치다가아예 살얼음을 얼려놓았어도눈은,강가의 미관과 이별하느라 잠깐파르르 떨었을 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한 마디 말도 없이하나 둘 떨어져 강물을 이루누나. - 임진강에서 2 눈은 온갖 경계와 구분을 무너뜨려 하나로 만든다. 사진은 중국 항주 서호의 눈 내린 겨울 풍경. 필자가 임진강에서 지은 연작시 가운데 하나, ‘임진강에서2’이다. 자비 편에서 소개한 안도현 시인의 ‘겨울 강가에서’처럼 눈이 강물로 떨어져 녹는 것을 소재로 한 것은 같다. 하지만, 안도현의 시가 서양의 이항대립적 사고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
불교는 세상을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 관계를 모색하는 이가 수행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려다보면 내 몸이 보이고, 들여다보면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내가 있고, 올려다보면 꿈을 꾸는 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는가, 뭐라 말할 수 있는가?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볼까./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인생은 살기
“흔히 우리는 자비를 남을 위한 선행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비는 나를 위한 길이다. 자비는 연기에서 비롯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보듬어 안기 위해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을 펼쳤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왔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자비란 그리 거룩한 길이 아니다. 누구든 다른 이의 무게를 느끼고 그를 달갑게 맞으면 그것이 곧 자비의 길이다. 자비란 나 아닌 다른 이의 무게를 느끼는 데서, 나는 홀로 아무 것도 아니며 상대방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에 남아있는 이 거대한 석면불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관세음보살. 캄보디아 사람들이 생각한 충만한 자비의 얼굴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 동물이다. 자신, 자신의 범주에 들어온 자신의 형제와 자식과 부모가 잘되고 잘 살기를 원한다. 오로지 나만이, 나의 가족만이 남보다 더 출세하고,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갖기를 원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의 것을 채우고, 남을
내가 이미 불성을 품고 있으니 티끌만 거두어 버리면 청정한 하늘이 보이듯 무명에서 벗어나면 곧 바로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니 내 몸이 곧 부처요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유적은 옛 사람들이 상상하던 수미산 위의 극락을 지상 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향가 기행을 떠나자는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경주 남산을 찾았다. 용장골 어디쯤으로 기억한다. 호젓하게 완상하자는 욕심으로 일행을 저만치 따돌리고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찾았다. 바위에 새겨진 불상의 선을 따라 눈을 옮기다가 불상 앞에 처음 섰을 때보다 더한 감동에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거기 너무도 푸른 하늘이 바위를 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푸름을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한 번 가면 누구든 되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극락이다. 육신을 이고 가서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곳이 고향이라면, 영혼이 비상하여 영혼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곳이 극락이다” 진정 고향이 그리운 이유는 그곳에 어린시절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대한민국불교사진연합회 허건영 회원의 작품 ‘동자승의 나들이’. 현대인의 삶의 소외와 고독의 연속이다. 우리 집 창으로 관악의 푸른 능선이 보이고 집 안에 아내가 한 달 이상을 걸려 한 땀 한 땀 수놓은 전통 보자기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어느 동네의 몇 평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듯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하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은 화려한 신라의 미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토왕생을 발원했던 신라인들의 기원은 솔직하고도 소박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우리들 삶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과 같다. 그 찰나의 순간, 덧없이 사는 삶이기에 서럽고 슬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들 생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좀더 달콤한 향락을 맛보고자 우리의 욕망은 이글거린다. 그 불을 재조차 남김없이 소멸시키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달아 이제/서방 거쳐 가시리잇고/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여쭙는 말씀 함씬 사뢰소서//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두 손 모아 합장하옵고/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아무리 부자라도 고통은 있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부족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리 고통 속에 지내다 결국 죽을 것을 생각하면 서럽다. 나도 서럽고 너도 서럽다. 우리도 서럽고 천여년 전 신라인들도 그 서러움을 느끼고 그를 벗어날 길을 모색하였다.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웃는 수막새’는 경주 영묘사터에서 출토됐다. 영묘사는 공덕을 지어 극락에 왕생하길 발원한 수많은 백성들의 노동으로 완성됐다.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설움 많아라/설움 많은 우리네여/공덕 닦으러 오다 향가 중 ‘풍요’다.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많아 지금 경주 두두리들 자리에 영묘사를 짓고자 장육존상을 모시러 하
“무지개는 꿈과 이상이며, 강철은 현실의며 의지이다.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작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확고하며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조국 독립의 꿈을 꾸는 것이다.…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로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중생과 더불어 살기 위해선 전적으로 나를 버려야 한다. 사진은 작가 여동완 씨의 ‘비가 오는 중에도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 일찍이 시인 윤동주는 노래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 가야 겠다.//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육바라밀이란 다름이 아니다. 모든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지언정 자식은 결코 부모와 같지 않다. 경험을 통해 완성되지 않은 부분들을 채우며 끝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회원 김우영 作 '난 심심해'. 아들을 키우다보니 유전자라는 것에 새삼 감탄한다. 지능지수뿐만 아니라 성격에서 버릇까지 똑같다. 별스런 것까지 유전자에 다 있어 어느 때엔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하다. 나의 체세포를 떼어내 복제인간을 만들면 그들은 똑같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상당하지만, 분명 경험을 통하여 학습하고 깨닫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재수를 하지 않았어도 겸손한 인간이 되었을까. 내가 치매를 앓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지 않았어도 실존적 자각을
모든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기에 더욱 빛난다. 연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면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탄할 것인가.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회원 박익진 씨의 사진 ‘겨울 연밭’ 봄날은 갔다. 그리 산천을 흐드러지게 수놓던 꽃들은 모두 지고 없다. 6월, 여름이 왔다. 녹음 짙은 숲을 바라보며 봄날의 회한에 젖고 싶은 가슴엔 지훈의 ‘낙화’가 제격이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허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괴테는 “하
죽지랑은 빼어난 용모의 화랑이었다. 아마도 그의 얼굴은 경주 곳곳에 남아있는 불상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 흐드러지며 절정을 이루면서 산천을 수놓던 꽃들이 진다. 신록들이 처음의 푸름과 신선함으로 어루만져 주지만 온 세상을 생기로 번쩍이게 하던 그 새잎들도 곧 낙엽이 되어 하나 둘 사위어 가리라. 울고 싶은 만추의 하루다. 늦은 봄날 천여 년 전의 신라에서도 무상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이가 있다. 지나간 봄 다일 것이매/안 계실사 울 시름/두두룩함이사 좋아 끼치신/얼굴이 해를 셀수록 헐어가는구나//눈안개 돋을 지경의/만나기 어찌 상상이나 하리//郞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누추한 거리에 잘 밤 있으리. 신라 효소왕(孝昭王: 692~702
용장골 마애불은 평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옛 신라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정토까지 이어지는 곡선의 시간이 어우러져 있다. 시간은 우리의 삶에 깊이 스미어 있다.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이 통째로 변할 정도로. 허기진 그리움에 떨다/용장골 부처 앞에 서면/바위 속 부처는/달빛과 어울려/춤을 추다가/또 춤을 추다가/빛 되어 정토로 오르고//달도 멈추는 그 찰나/九世가 하나. 필자가 지은 ‘시간’이라는 시다. 경주 남산 용장골 마애불상은 원융미(圓融美)와 질박함이 어우러진 불상이다. 질박하면 미천하고 원융미가 빼어나면 온화함과 평안함을 잃기 마련인데, 이 불상은 거룩하면서도 소탈하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그시 감은 눈과 수려하게
「목민심서」를 저술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자살하는 사람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삶을 영위한다.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내고 난 후 유일하게 기댄 자식마저 교통사고로 잃고 몸마저 동네 폭력배에게 유린당한 여인마저 살아간다. 산다는 것이 죽음보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눈덩이처럼 빚만 쌓여가는 살림 속에서도, 곧 과로사로 죽을 정도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천대 속에서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늘 고통인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과도 거의 매일 싸우면서도 사람들은 “다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난 때는 알아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부조리하다. 누구나 이상과 꿈을 바라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세조는 온 몸에 생겨난 종기 때문에 평생을 고생했다. 그 역시 죄업을 씻고자 불사에 매달렸으며 오대산 상원사는 그런 세조의 후원으로 중창됐다. 『장아함경』 「사문과경」 편을 보면 아자세왕 설화가 나온다. 중인도 마다가국의 빈비사라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걱정하며 신에게 기원하였는데, 어떤 관상가가 와서 말하기를 “비부루산에 있는 선인이 죽으면 태자가 탄생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빈비사라왕이 그때를 참지 못하고 선인을 죽이니, 곧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였다. 선인의 원한이 깃들어서인가. 장성한 태자는 새 교단을 조직하려는 야심을 품은 제바닷타의 꾐에 넘어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왕을 죽이고 어머니를 가두는 패륜을 범하고 왕
“장애에 굴하지 않는 잣나무처럼 절의를 지켰던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과 지절의 정신을 환기함과 아울러 자신도 그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비전을 품겠다는 노래” 기파랑은 경주 남산 너머로 보이는 저 옛 신라의 들판을 누비던 화랑이었다. 지금 세상은 타락의 극에 달한 느낌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보면 수십, 수백 억 원의 뇌물을 먹은 것이 드러났는데도 반성의 빛이 전혀 없다. 예전엔 불륜 행위를 하다가 걸리면 본부인에게 끽 소리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맞는 것이 당연한 풍속도였지만, 이제는 본부인보다 더 당당한 자들이, 외려 본부인에게 이혼하라고 협박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닌 모양이다. 돈 몇 만원에,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사람을 여럿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다. “서울
“파리는 거미에게 잡아 먹혀 거미가 되고 거미가 된 파리가 소화되어 거미줄로 변한다. 살려고 몸부림을 치던 벌레들은 이것을 깨달은 연후에는 다리가 썩는 줄도 모르고 참선하는 스님처럼 얌전히 거미의 처분을 기다린다.” 인도의 갠지즈 강가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이 노파에게 윤회는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전략…) 거미의 뱃속에는 파리가 열 마리, 모기가 스무 마리, 개미가 서른 마리, 벌이 다섯 마리, 무당벌레도 한 마리……, 그들은 모두 이 컴컴한 지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꿈이어서, 한데 모여 마라톤 회의를 벌인 결과 거미줄이 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가 막힌 묘안을 생각해냈으니, 그리하여 거미줄에는 보이지 않는 파리가 스무 마리, 보이지
윤회의 관점에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티베트에서는 윤회를 거듭하는 세계를 만다라로 표현하곤 한다. 사진은 작가 여동완 씨의 작품 중 일부. 이제 관악에도 봄빛이 가득하다. 시냇물 돌 틈 새로 버들치는 기지개를 켜고 개구린 퐁당퐁당 뛰어들며 파문을 그린다. 그 파문에 버들개지는 움을 틔우고 여린 이파리 세상 구경하러 얼굴을 내미는데 개나리와 진달래는 갈색의 여백에 노랑과 분홍 점을 흐드러지게 수놓았다. 춘흥에 젖어 절로 콧노래를 부르다가 멈춘 뜻은 “꽃 잔치의 절정에서 낙화를 떠올렸기 때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에서 그칠까.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