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하는 수많은 생들의 긍정, 그것은 수많은 생을 반복하여 사는 힘의 긍정이다. 그때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힘을 긍정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사상과 매우 가까이 있다. 극락이든 구원이든, 현세를 떠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현세적 삶 안에 있으며, 그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사는 것임을 말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무아·윤회 모순으로 보이지만윤회란 영원한 시간 반복해돌아오는 무아라는 잠재력이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그런데 불사의 삶은 그가 살아가는 여러 생의 삶을 관통하
알다시피 윤회의 관념은 불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도의 전통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카스트라는 강력한 신분제가 있는 사회에서, 많은 경우 현재의 삶을, 날 때부터 고정된 신분과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참고 견디며 살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현재의 네 삶은 과거에 네가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것이고, 미래의 네 삶은 지금 네가 사는 삶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그래야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말야.’ 원래 ‘의지적 활동’을 뜻하는 ‘업’이란 말이 자신
보르헤스의 소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사의 삶이란 무언가를 다룬다. 로마 시대의 군단장이었던 주인공 마르코 플리미니오 루포는 불사의 강 하구에 있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걸 찾아 나선다. 갖은 고초 끝에 드디어 그는 그 강물을 마시고 불사의 인간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의 불락 교외에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어떤 얘기를 필사했고, 사마르칸다 감옥 마당에서 수없이 장기를 두었으며,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며 수많은 생을 살게 된다(‘죽지 않는 사람들’, ‘알렙’, 민음사, 13~35).윤회하
어떤 소리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이기에 어떤 소리도 아닌 ‘소리 자체’와, 우리의 귀를 끊임없이 울리며 오는 모든 소리들 전체, 여기서 진제와 속제의 둘 아닌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여기에 하나의 체(體)와 수많은 상(相)들을, 그 상들의 다종다양한 용(用)을 대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개념에 익숙한 이라면 실체의 한 속성과 수없이 많은 양태들의 세계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든무엇으로 규정되는 순간본체 아닌 일부만 드러나잠재된 가능성까지 볼 때하나의 본체 이해하게 돼그런데 공성이 모든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 시끄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를 가르는 명료하고 뚜렷한 기준은 없다. 예전에는 ‘화음’이라고 불리는 소리, 즉 ‘음악적 소리’와 화음 아닌 소리, 즉 비음악적 소리가 음정 같은 개념에 의해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기 ‘현대음악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 Varèse)는 망치질 하는 소리나 사이렌소리도 음악적 소리로 사용하고, 소닉 유스(Sonic Youth)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
연기법은 어떤 것도 그것이 기대고 있는 연기적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진다고 설한다. 본성이 달라지니 규정도 달라질 것이다. 가령 달걀이 어미의 따뜻한 품속에 들어가면 병아리가 되겠지만, 냄비의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면 삶은 달걀이 된다. 똑같은 달걀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한 생명체의 ‘알’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음식물의 재료다. 다른 본성을 갖고 다른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달걀이 한 생명체가 됐다가때론 식재료가 되는 것처럼모든 규정은 조건이 만들어조건 지우면 뭐라 할 것 없어그런데 그런 연기적 조건에 처하기 이전이라면 어떨까? 어
이런 횡단적 사고의 방법을 흔히들 말하듯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을까? 변증법 또한 유와 무, 동일성과 차이 같은 상반되는 대립개념이 서로를 전제하고 필요로 함을 말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항적인 대립개념을 ‘종합’하여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며 ‘지양’한다. 두 대립개념을 종합하여 제3의 것을 만들어내곤, 그 안에다 이전의 두 범주를 보존해둔다. 그런 식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을 ‘화해’시켜 종합적인 중간을 만들곤 거기에 ‘더 높은 것’의 자리마저 부여한다. 반면 중도의 횡단적 사유는 두 개의 이항적인 개념 모두가 무의
사회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면, ‘양변’이라고 명명된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여장을 한 남자는 남녀의 양변을 넘어서 있다. 물론 그가 ‘정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참과 거짓을 가려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가 왜 남자이면서 여장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저 거기다 ‘거짓’이나 ‘악’과 같은 범주를 들씌우고 말뿐이다. 사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이면서 남들과 다르게 여장을 했다는 점이고, 그렇게 한 이유를 아
개별 악기에 집중하다보면오케스트라 소리를 놓치듯중도는 명료‧뚜렷함을 위한인식의 극단 넘어선 상태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인식이나 판단의 ‘명료함과 뚜렷함’을 진리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명료함(clearness)이란 개념이나 인식의 내포가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뜻하고, 뚜렷함(distinctness)이란 외연이 확실하여 내부와 외부가, 그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구별됨을 뜻한다. 가령 여자 옷을 입은 남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스럽다는 점에서 명료하지 않기에, 남성임을 가린 ‘거짓’에 속
도를 깨친 이가 아닌 한, 자신의 척도를,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게 옳은 생각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일수록 내려놓기 어렵다. 도를 체득하지 않고선 분별을 떠나 사는 건 불가능한 걸까? 적과 동지를 가르고, 호오미추를 가르는 동물적 본성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예술이란 관념을 버리면모든 것이 예술이 되듯이분별 떠난 분별 가능하면모든 존재 의미 볼 수 있어흔히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대개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 숙
모든 분별은 척도를 갖는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르는 기준, 정사미추를 가르는 기준이 없다면 분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다고 끌어당기는 것이나, 싫다고 밀쳐내는 것이나 모두 척도의 힘에 의한 것이다. 분별이란 그 척도의 힘, 척도의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힘이나 권력이란 말은 결코 은유나 과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쁜 얼굴에 대한 분별의 척도는 턱을 깎고 코를 높이는 물리적인 권력마저 행사한다. 연애도 취업도 그 예쁜 얼굴에 맞추어야 쉬워지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선 엔간한 일엔 눈물을 흘리지 않아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가려 선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至道無難 唯嫌揀擇).” 3조 승찬 스님이 쓴 ‘신심명’의 첫 문장이다. 조주 스님이 자주 언급하여 더 유명해진 문장인데, 100칙으로 된 ‘벽암록’에는 이 문장과 관련하여 조주 스님이 등장하는 공안이 4번이나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달마대사 얘기에 이어 제2칙으로 언급된다. 가려 선택함(揀擇)이란 선악호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도’라고 명명된 지혜는 선악호오, 미추정사(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을 요체로 한다는 말이다
모든 중생은 공동체다. 각각의 중생이 공동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각각의 중생들이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공동체란 구성요소들의 공생체다. 즉 뜻하지 않은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미생물의 공생은 이런 공동체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잡아먹으려는 행위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게 실패한 이후, 홍색세균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넘에게 에너지를 생산해주고 그로부터 영양소를 얻는다. 그러면서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이 된다. 잡아먹은 넘은 반대로 영양소를 주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어느
개인과 전체, 개체와 집단, 혹은 개인과 공동체는 근대 사회의 정치나 경제는 물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립개념이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는 그런 대립을 표현하는 이념적 지향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런 지향은 인간의 본성, 아니 생물의 본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도 한다. 가령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인간이란 이기적 본성을 가진 존재임을 가정하며, 다른 생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반면 ‘전체란 부분의 합을 넘어 선다’고 보는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인간이나 생물들의 사례를 주
존재 그 자체가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다. 전에 어떤 건축가는 대학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유명한 대가에게 배울 기회가 있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 이름도 몰랐겠지만, 나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만들려는 것이 그의 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과 집중을 했고 그것이 내가 건축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비약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을 주었지만, 미스는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을 준 것이다. 자신이 준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채, 누구에게
타얼사만큼은 아니지만, 불화의 주인공인 보살들 역시 화사하게 성장(盛裝)한 차림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가령 일본 카가미(鏡) 신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는 내가 본 어느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그림인데, 거기서 관음보살은 옷부터 목걸이와 관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불상들이 수행자의 더없이 소박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알다시피 보살이란 ‘보시’의 이타행과 짝이 되어 대승불교의 전면에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다. 정확하게 ‘선물’ 내지 ‘증여’를 뜻하는 보시는 육바
중국 청해성에 속해 있는 시닝의 타얼사는 티베트 불교 개혁의 주역이고 달라이라마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총카파를 기념하며 만들어진 사원이다. 총카파의 탄생지에 만들었다는 대금와전(大金瓦殿)은 지붕의 기와를 전부 금으로 칠을 했다고 하여 더 유명한데, 안내자에게 들으니 기와를 칠하는 데 금 850kg이 들었다고 한다. 거의 1톤에 가까운 금을, 실내의 불상이나 전을 장식하는 데 쓴 게 아니라 비바람에 일 년 내내 노출된 기와에 칠해놓았다는 말에 다들 당혹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뿐만 아니라 절 안에 있는 수많은 ‘걸게
‘자아’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일정한 사고패턴이나 제한된 행동패턴을 형성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매우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적절한 대처의 방식(이를 ‘행동도식’이라고 한다)을 찾게 되면, 적은 에너지를 들여 편하게 행동하게 된다. 이런 행동도식들이 모여 ‘나’의 일정한 행동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행동패턴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매번
‘카게(影)’란 일본어로, 그림자란 뜻이다. ‘카게무샤’란 말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적들의 정탐에 대처하기 위해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 성주와 같은 중요한 이를 대신하게 하는 ‘무사’를 뜻한다. 구로자와의 영화 ‘카게무샤’는 전국시대 유명한 가문의 성주인 다카다 신겐의 카게무샤가 되어 살았던 한 도둑을 둘러싼 얘기를 다룬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적의 공격에 가문이 몰락할 것을 예감한 다케다 신겐은 3년간 자신의 죽음을 감추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적의 정탐이 있을 것이기에, 그들을 속이려면
변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으려는 이런 시도를 두고,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적 고통이니 개인이 감당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치유적 관점을 가진 ‘종교인’이라면, 애착과 집착이 낳는 그런 고통을 특별한 개인들의 병적 증상이니 그 애착과 집착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반복이 동일함 규정하지만동일함 속에는 차이가 존재차이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무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그러나 동일성의 사유, 동일성의 욕구가 산출하는 고통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필연적 무지의 또 하나의 특징을 지적해야 분명해진다.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