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법명은 지눌(知訥)이고 황해도 경서(京西)의 동주(洞州)사람이다. 일찍이 자호를 목우자(牧牛子)로 하였다.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인 광우(光遇)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이었고, 어머니 조씨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이었다. 스님은 태어나서 병이 많았고 의사의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출가로써 서원을 하니 곧 병이 나았다. 나이 8세에 조계(曹溪)의 운손(雲孫)인 종휘(宗暉)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고 오직 도를 좇았으며 지조가 뛰어났고, 당당
보조국사의 역사적인 평가는 어떨까? 가장 널리 알려진 평가는 정혜결사(定慧結社)이다. 이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가 있다. 일단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르침 중심의 교종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선종으로 흐름을 바꾼 것이다.잠들었던 선풍 다시 진작어두웠던 조사의 달 밝혀고려후기 선종 부흥 계기사찰은 세속 피해 산골로신라 말에 선종이 유입되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교단은 다시 화엄종, 법상종, 천태종과 같은 교종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고려후기에 보조국사가 주도한 정혜결사는 교단의 흐름을 교종에서
보조국사의 생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김군수(金君綏)가 찬한 ‘조계산수선사 불일보조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이다. 이 비문은 스님이 입적하고 제자 혜심국사의 주도아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선나는 마음의 고요함 의미가섭 의해 마음으로 전해져불설은 아난에 의해 계승돼고려후기 중요쟁점으로 부각“선나의 근원은 가섭에게서 나왔고 달마는 그것을 중국에 전하였다. 그것을 전하는 이는 전하지 않음으로써 전하였고, 그것을 닦는 이는 닦지 않음으로써 닦았다. 잎에서 잎으로 전하여 지고 등에서 등으로
퇴굴심(退屈心)이란 어떤 목표를 향하지 않고 자신감의 결여로 뒤로 물러나 스스로 굽히는 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장부로서의 기개가 보이지 않는 비굴한 자세를 말할 때 사용한다. 보조국사는 대승의 근기가 없어 스스로 불성이 갖추어졌음을 믿지 못하고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른 가르침이란 외부에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고, 금생이 아닌 다음 생을 기약하여 염불을 닦는 경우이고, 화두참구를 하면서 사량분별로 얻고자 하거나 반대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태도를 총칭하여 사용한다.절대적 존재 상정하거나다음
필자가 처음 불교를 접한 고등학교 시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언구에서 의심을 했던 기억이 있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면서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면 그것은 곧 아래로 중생을 구함이 아니고, 반대로 아래로 중생을 구하면 곧 위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설사 뛰어난 근기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랜 업장을 생각하면점수의 방편을 버릴 수 없어진정한 수행, 돈오·점수 통합그래서 지도교사에게 이점을 질문했더니, 그게 가능하다고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해가 되
‘수심결’에서 보조국사는 정혜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구분한다. 기준은 관찰의 힘이 강한가 열등한가, 습기의 장애가 깊은가 얕은가이다. 정혜가 이미 자성에 갖춰졌다면 새롭게 다시 익힐 이유가 없다. 이런 경우 깨달음의 돈오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번뇌가 깊다면, 그래서 관찰의 힘이 약하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점수의 길이 필요하다. 비록 자성이 그대로 정혜임을 깨달아 별도의 수행이 요청되지 않지만, 대치문(對治門)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돈오만 주장하면 적응력 문제점수만 주장하면 통
정혜를 함께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란 어떤 의미인가? 먼저 선정을 닦고 나중에 지혜를 개발하는가? 아니면 지혜를 개발하고서 나중에 선정을 닦게 되는가? 정혜쌍수는 선정과 지혜의 선후가 아니라, 동시에 함께 수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혜등지(定慧等持)란 용어도 사용한다.돈오는 심성에 대한 깨달음점수란 현실 문제 대처방안인간 성품 본래 청정하기에함께 이뤄지는 정혜등지여야지관, 혹은 정혜의 선후문제는 부처님 당시에도 거론된 관점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anna)의 관계에 대
자성(自性)이란 사물의 본래적인 스스로의 성품을 의미한다. 본래적인 성품이란 의미로 본성(本性)이라고도 하고 진정한 성품이란 의미에서 진성(眞性)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다른 사물과 구분되는, 그것을 그것이 되게 하는 본래적 성질로서 본질(本質)이다. 예를 들면 불의 본질은 ‘태움’이다. 무엇인가를 태울 수 없으면 불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물의 본질은 ‘젖음’이다. 무엇인가를 젖게 하는 것이 없으면 물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자성, 본래적 성품 의미마음은 청정·고요하지만잡초두면 계속 자라기에끊임없는 수행이 요구돼그러면 마음의 본성은
정혜는 자력(自力)의 길이다. 선정과 지혜는 타인이나 외부의 힘에 의해서 개발되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수행된다는 점에서 자력문(自力門)에 속한다. 마음의 고요함과 지혜로움은 다른 사람에 의해 내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혹은 주도적 학습에 의해 내면에서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선정은 호흡과 같은 특정한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지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신의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개발된다.선정은 집중·지혜는 관찰로 개발정혜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해보조, 자력문 입장서 결사 추진타력 기초한 벽련사결사 비
보조국사의 정혜쌍수(定慧雙修)는 국사교과서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수행론이다. 정(定)이 마음의 고요함을 의미한다면, 혜(慧)는 지혜의 작용을 말한다. 보통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서는 지관(止觀)이란 용어를 잘 사용하는데, 선불교에서는 정혜(定慧)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 용어가 서로 다른 개념은 아니다. 처음 수행할 때는 ‘지관’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수행이 깊어지면 ‘정혜’라 하고, 궁극에 이르면 ‘열반과 해탈’이라고 부른다.지는 특정한 대상에 집중해번뇌가 사라지게 하는 수행관은 존재함 그대로 관찰해객관적 그대
오늘날 ‘선’과 더불어서 ‘명상’이란 용어가 서로 함께 사용돼 혼란스럽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다. ‘선(禪)’이란 용어는 범어 ‘디야나(dhyana)’, 팔리어 ‘쟈나(jhana)’의 음역이다. 영어권에서는 이것을 ‘meditation’으로 번역해 사용한다. 모두 ‘마음을 고요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수행법’과 동의어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가르침을 포함하지만 오히려 보다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 용어이다.진리는 본래 구족된 가르침오직 깨달음에 의해 도달돼 배우는
“성문(聲聞)은 마음 마음에서 미혹(迷惑)을 끊고자 한다. 능히 끊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살도음망(殺盜淫妄)을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모두 성품[性]을 따라서 일어난[起] 까닭에 일어남은 곧 일어남이 없다. 그 당처(當處)가 문득 고요하다. 어찌 다시 끊음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생각이 일어남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딜까를 두려워라’고 했고,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 깨달으면 곧 그것은 없다’고 하였다.”인연 다하면 소멸하는 번뇌애착한다면 상당 기간 존재줄을 뱀으로 착각한 두려움 줄이라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