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당에 맞서 항쟁 선언당고종, 신라 왕 관직 삭탈 수십만 병력으로 신라 공격고구려 멸망 후 6년간 지속 ▲ 신라의 당 축출은 단순히 신라가 백제 및 고구려의 옛 영토를 지배할 수 있게 됐다는 차원을 넘어 민족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림은 매초성전투 기록화. 전쟁기념관 제공 670년부터 신라와 당 사이에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고구려 및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라를 포함하는 한반도 전체를 정벌하려 했던 당의 야욕에 대한 신라의 항쟁이었다. 신라에서는 문무왕 9년(669)에 김흠순과 김양도를
670년 의상법사 귀국해서당의 신라 침략 계획 알려 명랑법사 제의로 사찰 건립문두루비밀법으로 적 퇴치 ▲ 당나라가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을 때 신라 명랑법사가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밀법을 개설하자 거센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항공촬영한 경주 사천왕사 발굴터.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한반도의 정복과 통치라는 본래의 야욕을 분명히 했고, 따라서 신라와 당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669년(문무왕 9) 5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듬해
▲ 나당연합군의 백제와 고구려 공격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태종이 죽은 649년으로부터 10여년은 당의 고구려 침공이 없었다. 그러나 전략이 바뀌었을 뿐, 당이 고구려 정벌 야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략이란 백제를 먼저 정벌하여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한 뒤에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것. 그래서 당나라는 백제를 정복한 660년 11월부터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661년 3월1일 당 고종은 여러 신하와 함께 낙성문(洛城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이라는 무용을 관람하였다. 둔영(屯營)에서 새로 가르친 이 무용은 한 명의 군인이 대평정(大平定)을 한다는 의미였는데, 오색 갑옷을 입고 손에
재산약탈에 인명살상까지당나라 군사 노략질 극심 흑치상지 등 부흥군 조직이례성 포함 20여 성 합류 ▲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주류성의 위치는 오늘날 부안 변산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주류성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는 부안 능가산 개암사. 이 절은 백제 무왕 때 창건됐으며, 대웅전이 보물 제292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사비성을 함락한 당나라 군사의 노략질은 극심했다. 소정방은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했다.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당군의 재산 약탈, 부녀자 겁략, 인명의 살상 등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를 목격한 백제의 흑치
당 고종 신라병합 밀령 내려백제 멸망 후 신라공격 시도 군사적 위협·내부분열 책동호시탐탐 신라의 허점 노려 ▲ 백제 부흥군이 활동하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임존성터. 예산군 제공 663년 주류성을 함락했지만 아직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은 버티고 있을 때 당의 장수 두상(杜爽)은 말했다.“칙명에 의하면, 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다.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동맹이 이루어지던 648년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당나라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지금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없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포천산 5비구·욱면비서방정토로 극락왕생원효 전생 도반인 사복모친과 땅속으로 열반 ▲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연화장세계는 비로자나불의 공덕에 의해 장엄된 화엄의 불국정토다. 사진은 연화장세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유명한 경주 불국사. 우리는 흔히 세계를 둘로 나눈다. 사바세계와 불국(佛國)세계, 예토(穢土)와 정토(淨土),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등으로. 그리하여 저쪽 언덕 서방정토로의 왕생을 꿈꾼다.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西方)까지 가셔서/ 무량수불(無量壽佛) 전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올려/ 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리는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 이 몸
양지스님은 서예·조각 등기예 두루 통했던 예술가장육존상 등 조성할 때면선남선녀들 앞 다퉈 도와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8년 7월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전(綠釉塼)을 3D 스캔(Scan)장비 등을 이용해 복원한 도상. 섬세한 조각과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으로 큰 관심을 모은 녹유전은 신라 고승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지(良志)는 7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신라의 고승이다. 대개 그의 행적은 선덕여왕(632~646) 때로부터 문무왕(661~680)때에 간간이 보이지만, 구체적인 전기 자료는 전하는 것이 없다. 양지는 주로 석장사(錫杖寺)에서 살았다. 이 절의 남쪽으로 신라 왕경(王京)이 내려나 보이기는
실권 장악한 연개소문도교숭상 불교는 배척사찰 빼앗아 도관 사용종교갈등으로 국론분열 ▲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승인 보덕 스님이 함흥 반룡산의 방장실을 전주 고대산으로 날려 옮겼다는 비래방장(飛來方丈) 설화가 전해지는 전주 경복사지(전라북도기념물 제108호) 고구려 영류왕 7년(624)에 당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함에 왕과 국인이 그것을 들었다. 이듬해인 625년 고구려에서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어 도교 배우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 무렵 당 황실은 노자를 숭배하였는데, 특히 625년에는 도선불후(道先佛後)의 규정을 공식화함으로
당 고종 661년 평양으로 출병신라도 북벌군 편성해 당 지원고구려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당 퇴각하며 신라에 암호 전달 ▲원효가 당시의 신라왕실이나 귀족들과 유대가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권력을 비호하고 비위를 맞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효는 궁중이나 귀족들의 집을 드나들기보다는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 됐지만 그렇다고 왕실이나 귀족을 굳이 멀리할 필요도 없었다. 그림은 분황사 소장 원효대사 진영. 원효(617~686)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다. 한반도는 전쟁의 와중에 휩싸여 있었고, 지루한 전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풍진 세상에서 일생을 보냈던 원효, 그는 비록 출가 수행자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국가 사회의 현실과 등
300~350년 인도서 성립100권 분량의 유식 논서구법승 현장법사가 번역당태종이 직접 서문 작성 ▲국보 제244호 초조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17. ‘유가사지론’은 인도의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 현장(602∼664) 법사가 번역해 천자문의 순서대로 100권을 수록한 것으로 11세기 고려시대에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다.(명지대 박물관 소장) 실크로드는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진 길이다. 동서 불교문화의 교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불전(佛典)의 전래와 역경(譯經)이다. 여러 경전 중에서도 ‘유가사지론’의 경우는 인도로부터 신라까지 전해지는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300~350년경에 성립된 ‘유가론’
의정의 ‘서역구법고승전’에 신라출신 구법승 7명 등장 7세기 전반부터 성지 순례 나란타대학서 유학하기도 ▲돈황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위치한 고창국. 수많은 구법승들이 거쳐갔던 고창국은 이제 그 잔해만이 남아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보리심은 큰 바람과도 같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선재동자가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칼산에 올라가 불속으로 몸을 던지듯, 구도자는 보리심을 등불삼아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넘는다.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한 구도자에게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라의 구법승들도 역시 그랬다. 7세기 전반부터 그들은 히말라야산맥을 넘었고, 천축의 여러 성지를 순례했으며, 나란타대학에
명문가 출신…조실부모눈물 흘리는 꿩보고 출가 중국 각지서 7년간 수행황제도 비단하사 등 예우 ▲신라의 삼국통일과 불교 토착화에 큰 기여를 했던 자장 스님의 진영. 자장(慈藏)은 7세기 전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 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고승이다. 그는 무림(茂林)의 아들로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郎)이었다. 무림은 진골 출신으로 높은 요직을 지냈으나 늦게까지 아들이 없음에 불교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고 아들을 낳으면 불교계의 중요한 인물로 삼겠다고 축원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사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그는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다. 자장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
나당연합군 660년 7월동과 서에서 각각 진격계백결사대 신라와 대치화랑 앞세운 신라가 승리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궁녀들이 백마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낙화암. 의자왕은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충신의 간언도 듣지 못했다. 그는 신라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642년 7월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8월에는 대야성을 불태웠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 등 7성을, 그리고 655년 8월에는 신라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계속된 승전보로 의자왕은 신라를 주머니 속의 물건인양 생각했다. 655년 2월 태자궁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656년 3
▲부여 정림사는 백제 사비천도 무렵인 6세기 중엽 창건돼 백제 멸망 때까지 융성했던 백제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백제를 정벌했다는 글귀를 써 넣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신라, 당 연호 사용 등긴밀한 관계 지속 노력김인문 당서 외교 활약백제·고구려 병합 공모 648년 겨울 당 태종과 신라 사신 김춘추 사이에 합의된 내용은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벌한 뒤에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당나라에서는 군사 20만 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김춘추는 복장(服章)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청했다. 그리고 동반했던
아름답고 쾌활한 성격지혜와 용기 두루 갖춰신라 고립 타개 위해고구려·일본사신 자청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642년 대야성의 함락으로 신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춘추가 팔을 걷고 나섰다. 그는 국왕에게 자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보겠다고 했고 왕이 이를 허락했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638년 10월과 11월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해 와서 양국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642년 8월에
당태종, 대제국건설 위해수양제 이어 고구려 침략 안시성서 양만춘과 격전50만으로 토성 쌓아 공격 ▲고구려 양만춘이 당태종에 맞서 싸웠던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요녕성 해성시 영성자산성.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제공.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당 태종의 즉위 이후다. 631년(영류왕 14) 당의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동북쪽의 부여성으로부터 발해만의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16년에 걸쳐 쌓았다. 640년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을 정복한 당은 고구려로 관심을 돌렸다
늙고 가난한 연인의아버지 대신해 종군주변 유혹 뿌리치고약속 지켜 백년해로 ▲1980년대에 새로 지은 경주 흥륜사.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로 보기도 한다. 문화재청 제공. 7세기 신라에 있었던 사랑 이야기 두 토막. 하나는 진평왕 때 가실과 설씨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지귀라는 청년의 이야기다. 진평왕(579~632) 때 경주 율리에 설씨녀(薛氏女)가 살았다.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평민 집안의 딸이었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품행이 얌전했다. 그를 본 사람은 모두 그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였지만 감히 가까이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자장, 왕실요청에 급히 귀국중국서 만난 신인 거론하며80m 규모 목탑 건립 제안선덕여왕 적극 수용해 완성 ▲자장 스님의 건의로 1년 만에 건립된 황룡사 9층탑은 1238년 몽골 침략 때 불타 버렸다. 사진은 황룡사구층목탑 터. 문화제청 제공 642년 8월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했고, 고구려와 모의하여 신라가 당나라로 통하는 길목인 당항성(黨項城)까지도 위협했다. 고립무원의 신라는 사직의 보전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군사원조를 청했지만 실패한다. 이듬해인 643년 정월 신라에서는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유학하고 있던 자장(慈藏)을 귀국시켜 줄 것을 황제에게
원한으로 백제와 내통…김춘추 딸·사위도 사망신라는 대야성 패배로 국경지역 대부분 상실 ▲대야성 인근에 위치한 합천 연호사와 함벽루. 연호사는 642년 와우선사가 대야성 싸움에서 숨진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장렬하게 전사한 장병 2000여의 영가를 위로하기 위한 사찰로 전해진다. 합천군 제공 백제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600년에 죽자 그 아들 장이 왕위를 이었는데, 곧 무왕이다. 그는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출했다. 그는 재위 42년 동안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602년 8월 신라 아막성을 공격한 후 636년 5월까지 10회를 선제공격했다. 신라는 605년과 618년 두 차례 백제를
진평왕 맏딸로 왕위 계승왕위 반대 모반 등 직면 당태종도 여왕폐위 제안신라정치에 심각한 영향 ▲대구 부인사 숭모전의 선덕여왕 어진. 선덕여왕이 창건했다는 부인사에서는 지난 1986년부터 매년 음력 3월15일 선덕여왕 숭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부인사 제공 진평왕의 맏딸 덕만(德曼)은 632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왕이다. 나라 사람들은 그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하지만, 여왕의 즉위는 처음부터 여러 문제에 부딪혔을 가능성이 많다. 선덕여왕 즉위 1년 전인 631년(진평왕 53)에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일으킨 모반사건을 선덕여왕의 즉위 문제와 관련지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