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 표현이라는 정의는 르네상스 이후에 나타난 인식이다. 미술이 발생한 배경을 기능 면에서 이해한다면 사실 ‘알림’과 ‘기억’이라는 목적이 더 컸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보다는 그림이 훨씬 대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전통 기법 따르는 섬세한 묘사그림 자체로 회화적 가치 출중김정희·권돈인이 지은 찬문엔학문·예술서 이룬 뛰어난 경지고스란히 드러나 깊은 감흥 전해선사의 가르침·모습 담아내는진영의 본래 목적에 충실히 부합미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이런 기능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분야
예술을 뜻하는 Art의 어원은 ‘어깨’라는 뜻의 Arm이다. 튼튼한 어깨와 솜씨 있는 손길로 잘 만든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공예’ 또는 ‘기술’을 의미했다. Art는 대략 18세기 말에야 지금처럼 예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공예는 ‘힘’을 의미하는 독일어 Kraft에서 파생된 Craft로 대체되었다. 어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공예의 특질은 예술이라는 바탕 위에 기능성과 편리성이 더해진 데 있다. 조각이나 회화 등 여타 분야보다 공예 작품이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불교미술로 보면 이 기능성
장엄(莊嚴)은 불교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사전적으로 ‘웅장하며 위엄 있고 엄숙함’을 뜻하는 이 말은 ‘훌륭하게 배열한다, 짓는다, 꾸민다’는 의미인 산스크리트어 ‘vyu -ha’에서 비롯되었다. 장엄이라고 하면 흔히 채색이나 도안 같은 장식(裝飾)을 먼저 떠올릴 것 같다. 그런데 장엄은 장식에서 나아가 상징이고 도설(圖說)이기도 하다. 장엄을 잘 해석하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얻을 수 있으니, 어쩌면 불교미술을 해석하는 ‘키워드’는 양식이 아니라 장엄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장엄이 가장 잘 표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환란은 끊이지 않았던 외세의 침략일 것이다. 강화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왕조가 외세에 버티는 최후의 보루 노릇을 했다. 한편으론 그만큼 외적의 침략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등사(傳燈寺) 같은 명찰이 온전히 전하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전등사의 여러 건물들은 충실한 중건과 수리에 힘입어 오늘날에도 그 원형이 대부분 보존되고 또 다른 많은 유물들도 전해와 역사의 보고 역할을 단단히 해내고 있다. 그 중에도 대웅보전은 조선시대 중기에 지은 유서 깊은 건물인데
절마다 나름의 분위기가 있어서 거기에 갔을 때 느껴지는 기분이 다 다르다. 법당이며 누각 그리고 탑 들어선 것이야 다 한가지니 무슨 별다른 느낌이 있으랴 싶지만, 실제론 절 마당에 들어섰을 때 마음에 확 와 닿는 첫 인상은 모두 다르다. 마치 사람마다 얼굴이 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마다 풍기는 인상이 다르고 개성이 제각각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림으로 예를 든다면 영암 도갑사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담담한 필묵과 여백마냥 청초함이 가득하고, 영주 부석사는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말쑥하다. 또 해인
문화란 기후풍토 같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고 민족 또는 국가 구성원 간의 정서 및 심정적 유대감이 많이 작용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문화 간 특질이나 차이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상대적 우월을 논하는 건 불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래도 불교문화로 범위를 좁혀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인도나 중국보다 불교를 늦게 접했으니 도입 초기에는 아무래도 불교 선진국으로부터 배울 게 많았을 것이다. 불교미술을 보더라도 불교가 공식 인정된 4세기 후반부터 한동안은 인도나 중국의 그것을 따라가기 바빴을 게 당연하다. 그러면 우리 불교미술이 세계에 내놓아도
미술 용어는 아니지만 어떤 모습이 썩 보기 좋다는 뜻으로 ‘근사하다’라는 단어가 있다. ‘그럴 듯하게 괜찮거나 훌륭하다’는 뜻인데 사람이나 사물 어디에든 쓸 수 있다. 어감도 좋아 마치 맛있는 음료를 마신 것처럼 입에 부드러운 느낌이 착 감긴다. 사람한테 이 말을 쓰면 더욱 실감난다. 예를 들어 남자에게 “저 사람 근사한데!”라고 말하면 풍채도 좋고 상대방을 푸근하게 감싸주는 중후한 사람을 뜻하는 것 같다. 적어도 중년 남성에게 이만한 칭찬이 또 있을까? 사실 ‘근사(近事)’란 말은 불교 용어다. 산스크리트 말로 ‘Upa-saka’
‘당서(唐書)’에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易創業難守成)’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든 처음 이루기는 쉬워도 이를 꾸준히 지켜나가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문화재에도 이런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감탄하면서 또한 그를 위해 쏟아 부었을 작가의 엄청난 고뇌에 맘속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현대인으로서 이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일 역시 작품의 감상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임을 느낀다.1658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장전서 보제루로 이전 보관대부
우리 미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을 음미해보면 우리 미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우리 미술사 연구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등 탁월한 언어로 우리의 미를 표현했고,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문화가 억압받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미술 연구를 자신의 사명처럼 여겼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선(線)의 미’라고 했다. 그밖에 ‘소박미’나 ‘해학미’ 같은 말들도 우리 미술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다. 저마다 깊은
시대(時代)란 어떤 기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한다. 어느 시대마다 당시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를 ‘동시대적(同時代的)’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시대라는 말에 상응하는 미술사적 표현을 찾아보면 ‘양식(樣式)’이라는 용어가 곧바로 떠오른다. 양식은 한 시대의 미술에 나타난 고유한 표현을 뜻한다.17세기 후반 남편 잃은 여인이내생서 백년해로 약속하며 조성보는 사람 압도하는 위엄 대신감싸주려 다가오는 듯한 모습양식사에 얽매여 해석하기보다당대 희망·정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객관적 관찰의 결과일까, 아니면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개인적 마음작용일까?18세기 철학자들이 미학(美學)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미(美)를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 숱한 연구가 이어져왔다. 지금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을 만큼 어려운 논제이지만 요즘은 미(美)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예를 들면 ‘황금비율’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처음 주장했고,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정립한 이 이론은, 선분(線分)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미(美)’를 표현하는 어휘는 알고 보면 꽤 다양하다. ‘아름답다’는 미에 대한 직역이자 가장 보편적인 말이고, ‘멋있다’도 아마 이와 거의 동격일 것이다. 그밖에 ‘곱다’ ‘예쁘다’ ‘말쑥하다’ ‘늘씬하다’ ‘중후하다’ ‘우아하다’ 등도 역시 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들이다. 이 중 ‘단아하다’는 말이야말로 한국적 미를 가장 엇비슷하게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한다. 화려한 무늬장식 최대한 절제‘단아함’ 표현 걸 맞는 문화재따뜻함과 정교함 잘 어우러져 석등은 무명까지 밝히는 성보한국적 불교문화의 대표 유물근대 이전 석등 300여점
문화재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참 어렵다. 문화재를 겉으로 본다면 ‘멋’과 ‘역사’가 핵심이지만, 실상은 인간 삶의 갖가지 흔적과 자취가 그 속에 어우러져 있어서 간단히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겉만 아니라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런 경지에 오르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삶의 흔적이 담겨 있기에 감흥도 따라 있기 마련이어서, 감흥이 없는 문화재는 화석 같아 보인다. 역사와 감흥이 담긴 문화유적 중 하나가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아닌가 한다. 문무대왕이 승하한 681년에 조
대중은 문화재를 학술의 관점에서만 보는 걸 불편해 한다. 그보다는 문화재에서 즐거움을 느끼길 바란다. 문화재를 ‘공공의 자재(資財)’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다. ‘학술’이라는 말로 포장된 난해한 존재, 전문가에만 독점당한 문화재여서는 분명 곤란하다. 문화재라는 말에 너무 뻣뻣하게 굳어버리지 말고 자유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은 창의적 관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대답하기에 ‘대략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부여 정림사지 탑과 더불어가장 오래된 목조형태 석탑 삼국유사에 무왕·선화공주600년 창건했다고 기록 2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담과 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고학을 원용해 보면 적어도 청동기부턴 주거지에 이런 담과 문의 시설이 발견된다고 한다. 담과 문은 둘 다 외부와의 격리를 의미한다. 담장이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외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고, 문은 나가고 들어가는 출입을 목적으로 하지만, 안과 밖을 구분하거나 차단하는 목적이 더 강한 것 같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물론 사전적(辭典的)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야 그럴 지도 모르지만 이 문이 불교의 터울 안에 들어오면 여기에 좀 더 철학적
우리 사찰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사찰을 창건한 창건주에 관한 것인데,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무려 200개 가까운 사찰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효(元曉, 617~686) 스님은 그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150곳 정도 사찰의 창건주로 나온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원효와 의상 두 성현이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기 때문일 것이다.두 스님이 활동한 연대가 7세기인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가장 진지
불교미술의 다양한 장르 가운데서 가장 흔히 보는 것 중 하나가 범종(梵鍾)일 것이다. 어느 절이든 대개 마당에 커다란 범종이 걸린 종각 혹은 종루가 있기 마련이이니까. 종각에는 범종만 있는 게 아니라 운판(雲板)·목어(木魚)·법고(法鼓)가 함께 있어 이 네 가지 공양구(供養具)를 한데 불러 ‘사물(四物)’이라고 한다. 쓰임새는 모두 당목이나 채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이지만 각자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으니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그래도 전각 이름이 종각이듯이 이 사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범종일
대웅전이나 극락전 같은 전각은 불교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보배가 그득히 담긴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그 안에는 갖가지 다양한 작품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광채를 발하고 있다. 전각 자체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불국토를 만들고 있으니 이런 전방위적 장엄은 당연한 일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의 영산회상 불국토를, 극락전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미륵전은 먼 훗날에 출현하여 사바세계를 제도하는 용화세계를 표현한 곳이다. 한 마디로 전각은 그 자체로 경전에 나오는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번뇌가 없는 상락정토(常樂淨土)를 묘사한 것으로 보면 된다.수미
옛날 사람의 글은 기회 되는 대로 찾아서 읽는 편인데 주로 사찰의 역사와 관련된 사적기나 시(詩)들을 자주 본다. 지은이 중에는 스님도 있고 내로라하는 유명 문인들도 있다. 어떤 이는 마지못한 듯 약간 건성으로 쓰고, 어떤 이는 자신이 유학자임을 잊은 듯 불교와의 오묘한 이치에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진정한 마음은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이라 그런 글을 읽으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밤새워 도란도란 얘기하는 느낌이 든다. 고금의 세월을 뛰어넘은 대화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지금 소개하는 이는 조선시대 후기 문예의 황금기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화려한 보석에는 열광해도 진흙 속의 진주는 잘 못 본다. 누가 원석을 잘 골라 멋지게 ‘커팅’해 보여주면 좋아하지만, 스스로 원석을 찾아나서는 수고로움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보석을 예로 들었지만 사찰에서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로군요”하는 감식이 나와야 관심을 보이지, 스스로 나서서 문화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려는 적극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사리탑과 탑비가 그렇다. 홍련암 가는 길목의 언덕 한 귀퉁이에 삐뚜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