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몹시 목이 마르구나.’황폐한 무덤 속에서 잠을 자던 원효(元曉,617~686)대사는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다. 곁에서 의상(義湘,625~702)대사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항구로 향하던 두 사람은 직산(?山:천안)에서 밤을 맞아 무덤 속에서 눈을 붙였다. 이번 유학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도 그들은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인 요동에서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목숨은 건졌지만
“너희 나라 왕은 인도(天竺) 석가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할 것이다.”자장율사, 당나라 유학 도중선덕여왕 요청에 신라 귀국대국통 되어 황룡사탑 건립왕실권위 회복하는 데 일조‘금낭화’는 조화로움 돋보여괴석을 배치해 안정감 배가말을 끝낸 문수보
계정혜 삼학에 의지해 남을 위해 헌신한다면 처처가 모두 화장세계다~ 허운대사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에몸이 크게 상했던 허운대사고난의 나날들 계속됐지만중창불사에 매진하며 정진‘유민도’ 걸작 그린 장조화문화혁명으로 수모 당해도예술인의 정신 잃지 않아“그런 사람이 없단 말씀입니까?”허운(虛雲,1840~1959)은 노스님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와 함께 있던 문길(文吉)은 누구란 말인가. 1882년 7월 보타산에서 시작해 오대산에서 끝난 3보1배 순례는 3년 만에 끝났다. 총 길이 4천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5번
적막한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예찬(倪瓚,1306~1374)이 그린 「용슬재도(容膝齋圖)」는 그에 대한 대답이다. 바스라질 것 같은 낮은 언덕. 메마른 나무 다섯 그루.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빈 정자. 오직 그것만이 전부다. 움직임이라고는 바람 한 점, 구름 한 조각 감지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볕조차 땅에 발을 뻗으려면 결심이 필요하다. 고요가 깨지는 쨍그렁 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지 않으려면 말이다. 근경(近景)뿐 만이 아니다. 중경(中景)의 아득한 강과 원경(遠景)에 누워 있는 무심한 산도 마찬가지다. 침묵의 소리
운문선사, 사량분별 버리고스스로가 체득할 것을 강조한 글자로 된 일자선으로학인들 망상 해결해주기도구름처럼 유랑했던 황공망직접 보고 그려내는 대신사색으로 마음에 산수 담아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가 주장자를 세우더니 다음과 같이 물었다.“15일 이전은 그대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를 한 마디로 말해 보라.”운문선사는 기다리지 않고 대신 대답하였다.“날마다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운문문언은 소주(蘇州) 가흥(嘉興)출신으로 속성은 장(張)씨였다. 어려서 가흥 근처 공왕사(空王寺)에서 지징(志澄) 율사에게 출가했다. 그
민왕(閩王)이 물었다.“짐은 지금 절을 짓고 복을 닦으며 보시를 하고 스님들을 출가케 하여 모든 악업을 짓지 않고 선행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속해 나간다면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선종 황금기에 활동한 설봉17세에 출가해 만행을 하다암두선사 만나 깨우침 얻어‘시십마’ 화두로 진리 전해달마대사를 만난 양무제가 했던 질문과 비슷한 내용이다. 설봉의존선사(雪峰義存, 822-908)가 대답했다.“성불할 수 없습니다. 한다고 하는 생각이 있는 마음(有作之心)은 모두 윤회하는 것입니다.”“조사와 부처님이 나온 뒤로는 어
드디어 임제다. 그동안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의문 나고 미심쩍었던 부분을 일시에 제거해 준 나의 위패스승이다. 아니다. 임제선사가 아니다. 종광 스님이다. 임제선사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해 시무룩한 나를 위해 종광 스님은 친절하게 해설해줬다. 유치원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정확한 해설이었다. 종광스님이 강설한 『임제록(臨濟錄)』이란 책을 통해 나는 임제선사의 의발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임제록』은 임제의 법문과 말씀을 정리한 어록이다. 전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꼈다. 임제는 자비로운 짚신선사 수월스님과 함께 내
“어디서 왔느냐?”누워서 쉬고 있던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가 물었다. 남전선사는 백장회해, 서당지장과 함께 마조도일선사의 선맥을 이었다. 사미의 신분으로 남전선사를 찾아온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이 대답했다.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누워 계신 여래는 봅니다.” “너는 주인 있는 사미냐, 주인 없는 사미냐?” “주인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주인이냐?” “정월이라 아직도 날씨가 찹니다. 스승님께서는 존체를 보존하소서.”조주,
황벽희운(黃檗希運,?~850)선사는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출신이다. 어릴 때 고향 근처의 황벽산에서 출가했다. 이마 사이가 우뚝 솟아 마치 살로 된 구슬(肉珠) 같았다. 목소리는 낭랑하고 부드러웠으며, 뜻은 깊고도 담백했다. 백장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전등록’에는 백장선사가 황벽선사를 인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희운, 황벽산에서 출가해백장선사에게 인가 받아재상을 지낸 제자 배휴는선종 확산에 지대한 기여어느 날 백장선사가 황벽선사에게 물었다.“어디를 갔다 오는가?”“대웅산(大雄山) 밑에서 버섯을 따고 옵니다.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는 마조도일의 제자다. 속성이 왕씨(王氏)인데 어릴 때 속세를 떠나 삼장(三藏)을 두루 공부했다. 마조선사가 교화를 펼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과 함께 입실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날아가는 오리 때문에 마조선사에게 코를 잡혔던 백장선사는 강서성 홍주의 대웅산(大雄山)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그 후 대웅산은 백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백장선사, 선원청규 제정해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규정자신도 힘든 노동 이어가며‘일일부작 일일불식’ 실천백장선사는 야호선(野狐禪)과 관련된
당(唐) 개원(開元,713~742) 년간의 일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이 전법원(傳法院)에 머물면서 매일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다. 남악회양 대사는 그의 근기를 알아보고 물었다.도일, 남약회양에게 심인 얻어개원사에서 남종 선법 펼쳐내한반도 선종 역사에 큰 영향비바람 풍경 그린 ‘강촌풍우도’삶의 폭풍 언제나 곁에 있어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작용“스님은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부처가 되려고 합니다.”대사는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도일이 물었다.“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거울을
“무릇 사문이란 3천 가지 위의(威儀)와 8만 가지 세행(細行)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大德)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혜능대사 만나 견성한 영가확철대오 경지 노래로 읊은‘증도가’ 지금까지도 애송돼김농의 대표작 ‘향림소탑도’열심히 청소하는 사미 표현마음 때 청소해 깨달으려면무한한 노력이 뒷받침돼야혜능대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영가(永嘉, 665~713)가 조계산(曹溪山)에 도착했을 때 혜능 대사는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있었다. 객승이 남의 문중에 찾아왔으면 예를 갖추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데 영
"이게 무슨 뜻이야?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누가 장난친 건가?"혜능, 홍인대사에게 법 받고16년 동안 몸 숨긴 채 살아보림사로 돌아와 법을 설해헌종이 ‘대감선사’ 칭호 내려대중들이 벽 앞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웅성거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 힐끗거리는 사람, 무시하며 지나치는 사람 등 반응도 다양했다. 홍인(弘忍)대사가 다가오는 줄도 모를 만큼 소란은 계속되었다. 홍인대사는 양쪽에 적힌 게송을 쳐다봤다. 오른쪽에 적힌 게송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에 신수(神秀)상좌가 적은 게송이었다. 얼마 전에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중국 정토교의 대성자 선도‘관무량수경’에 감동 느끼고도작에게 염불왕생법 받아말법시대서 생사 벗어나는 데정토문이 가장 빠르다고 확신신분 귀천 가리지 않고 전법어둠이 뒤덮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등불을 밝혀야만 겨우 사방을 분간할 수 있는 깊은 밤이었다. 선도(善導,613-681)가 골목길을 걸어오는 동안 담장너머에서 들리는 염불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낙네의 목소리인가 싶으면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노인의 목소리인가 싶으면 장정의 목소리였다. 뒷집에서 시작된 염불소리는 앞집으로 이어졌
“대사님. 심오한 바다와 같은 화엄세계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화엄의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측천무무 앞서 법문 펼친 법장평생 화엄철학 위해 헌신하며훗날 화엄종 개조로 널리 칭송왕유는 그리는 데 만족할 뿐자신 시서화에 큰 의미 안 둬사람들은 문인화 시조로 숭배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가 법장(法藏, 643∼712)에게 물었다.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측천무후는 법장이 화엄법회를 열자 두 개의 부도에서 오색 빛이 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궁궐에 초청했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던가. 법장은
“그래. 너는 무슨 이유로 시험을 보려하느냐?”13세에 승과시험에 합격해구법여행 발원한 현장법사56개국 통과해 인도 도착날란다대학에서 불경 공부북인도 군대 호위 받으며불경 640질과 함께 귀국길17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와소년은 13세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했다. 그 모습을 본 시험관이 물었다. 며칠 후 낙양(洛陽)에서 승과시험이 있을 예정이었다. 14세 이상부터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소년은 빨리 승려가 되고 싶었다.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먼저 출가한 둘째형인 진소(津素)를 따라 낙양의 정토사
“부디 스님께서 한역된 경전감수를 맡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불교학자로서 율사로서불법홍포에 힘썼던 도선동기창은 남종화로 명성최초로 화파이론을 제시도선 율·동기창 남북종론모두 후대 영향 미쳤지만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현장(玄奘,602~664)의 목소리는 간절하고 곡진했다. 지극하면서도 예의바른 태도에서는 유명인으로서의 권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큰 인물은 달랐다. 현장은 도선(道宣,596~667)보다 6살이 적었지만 그의 명성은 도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17년간의 인도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황
밤낮 없는 수행정진으로법화삼매 일군 천태지의점령군 왕인 양광에게도어떻게 해야 할까. 중생교화를 포기해야 할까. 지의(智顗, 538~597)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나라가 망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법문을 펼칠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이대로 넋 놓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지의가 살고 있던 진(陳)나라가 수(隋, 581~618) 문제(文帝)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589년의 일이었다. 문제는 후에 수양제(隋煬帝)가 되는 둘째 아들 진왕(晉王) 양광(楊廣, 5
‘아무리 왕명이 지엄하다한들 파계는 파계다. 나는 이미 계행을 어겼으니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파계를 강요당하면서도역경 매진했던 구마라집중국의 4대 역경승 평가역모집안서 태어났지만화업에 정진했던 심사정눈부신 그림세계 일궈내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승방을 나왔다. 어찌 인생이 이다지도 힘들까. 구마라집은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사건은 여광(呂光)에 의해서였다. 383년, 전진(前秦)왕 부견(苻堅)은 여광을 보내 구자국(龜玆國)과 오기국(烏耆國)을 정
“저에게만은 훈계나 도움 말씀이 없으시니 사람의 예가 아닌가 두렵습니다.”제자와 심양 여산에 이르러용천정사에 머물게 된 혜원동림사 건립하고 경전 정비귀족·지식인 속속 모여들어 오파를 대표하는 화가 심주빼어난 예술적 경지 일궈내후손들에 예술적 영감 남겨378년 전진 왕 부견이 양양을 침공하자 도안(道安)과 제자들은 각기 길을 나누어 떠나게 되었다. 도안은 제자들과 헤어지기 전에 일일이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혜원(慧遠,334-416)도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혜원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부족한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