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겨울 숲에 머무는 감흥에 대해 내게 묻습니다. 춥고 시려 서글프지 않느냐? 적막하여 너무 쓸쓸하지는 않느냐? 황량한 겨울 숲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느냐, 또 뭘 느끼면서 살아가느냐? 내려놓는 의미 알아가는 건겨울 숲 머무는 자만의 일미입춘이 지난 지 보름이 가깝지만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사람들은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양지바른 땅의 온도와 그 땅에 뿌리를 둔 풀과 나무들에게서는 이미 미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겨울과 봄의 경계 지점에 대한 새들의 감응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분명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지금의 모습’은 단순히 지금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오직 그가 건너온 긴 시간 위에서, 그리고 주고받은 수많은 관계의 작용 위에서만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내가 건너온 삶의 긴 시간 위에서 나와 마주하고 주고받은 온갖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때 비로소 조금 더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오두막, 백오산방(白烏山房) 마당한 구석에 놓인 돌덩어리며 그 옆에 살고 있는 소나무며 산수유며 앵두나무며 배롱나무 역시 그렇게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혼란한 시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이 뿌리가 되어 빚어낸 세상의 비정상적인 줄기와 잎의 단면이 그것을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방대하고 엄청납니다. 우리 사회 곳곳이 마치 심각한 정신적 불구자들이 합종연횡하여 이룬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은 국면을 요즘 아주 길게 경험하고 있습니다.정신적 불구!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것은 합종연횡 속에 있는 그들만의 사태는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 대부분도 실은 크고 작은 정신적 불구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정신적 불구의 증상은 스트레스 상
대설과 동지(冬至)를 지난 시간인데도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아직 찾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전형이 깨진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해마다 겨울의 뉴스는 이상기후를 한두번씩 다루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들여다보면 이 이상기후 역시 연기(緣起)의 법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적도의 물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북극의 빙하는 계속 무너져왔습니다. 최근에는 무서운 속도로 북극을 뒤덮었던 빙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온도가 바뀌면 바람의 길도 바뀌는 법, 지구 북반구의 겨울을 흐르던 바람도 이
지금 이 나라에서는 염치(廉恥)를 모르는 인간들의 기만적이고 한심한 작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와 국민을 능멸해 온 핵심인물들이 국회 청문회장에 불려 나와 보여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노엽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청문회를 보는 내내 저들이 정녕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 눈에 그들은 ‘법(法)’을 잘 알거나 법 전문가들의 조력을 충실하게 받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미 범죄의 구성요소를 철저히 파악해 죄(罪)와 벌(罰)을 피할
숲은 신비로 가득합니다. 그 신비의 백미는 숲은 가만 두어도 저절로 푸르러지고 깊어지고 향기로워지며 다양성으로 찬란해진다는 점입니다. 개별 생명체들이 그저 주어진 삶을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번영하려는 욕망을 발하는 것뿐인데도 숲이라고 하는 공동체는 서로 부딪히며 어우러져 놀라운 조화를 빚어냅니다. 하지만 숲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주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내게 풀리지 않는 의문을 주는 존재들은 소위 기생식물(寄生植物)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기생식물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다른 식물들에 들러붙어 그들을 착취하며 그들의 삶이
봄 숲은 눈부시고 여름 숲은 치열하며 가을 숲은 찬란합니다. 그리고 헐거워지다가 간결해지는 것으로 숲의 한 시즌은 억겁의 한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겨울 숲은 비움과 간결함의 시간입니다. 지금의 숲은 단풍이라는 찬란한 제 빛깔의 향연이 절정을 통과하는 지점입니다. 연이어 비움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비움의 지혜를 발휘하는 모든 낙엽수들은 바야흐로 속절없이 제 잎을 떨궈내기 시작했습니다. 숲의 바닥이 그 미련을 거둬낸 나뭇잎들의 색으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있습니다.비워내는 것들은 잎만이 아닙니다. 나뭇가지들도 너부
상강(霜降)이 지나자 많이 서늘해졌습니다. 두툼한 옷과 이불을 꺼내 쓰기 시작했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구들방을 따끈하게 데운 뒤에야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곳 괴산의 ‘여우숲’도 본격적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붉나무와 화살나무, 산벚나무와 층층나무들이 제일 먼저 빨강이거나 노랑의 단풍으로 제 잎 색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맑은 이슬이었던 새벽 수분이 금방이라도 희뿌연 서리로 바뀌어 내릴 기세입니다.산중에 사는 나나, 숲에 사는 생명들에게 서리는 준엄한 명령서입니다. 가을 끝자락에 내리는 서리는 자연에 사는 모든 존재에게 겨울
생명들은 종류별로 모두 그들이 사는 동안 저마다 누리거나 감당해야 할 선물과 형벌을 부여받고 있지 않나 합니다. 먼저 식물에게 내려진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그곳이 아무리 척박한 땅이어도, 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쏟아지거나 가뭄이 찾아와도, 엄혹한 추위가 엄습해 와도, 지진이나 산사태가 온다 해도 식물들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부여받은 자리에서 살아내고 피워내고 이뤄내며 살다가 그 공간에서 스러져야 합니다. 하지만 형벌만 있을까요? 선물도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 밥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즉 광합성입니
강원도 평창의 숲과 지리산 주변을 오가고 있습니다. 길을 오가며 주마간산 격으로 먼발치에서 숲을 바라보면 그 전체는 아직 녹색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이미 숲의 어느 부분들은 벌써 붉어지거나 노래지고 있었습니다. 평창의 숲에서는 벌써 ‘붉나무’가 제 이름만큼이나 붉게 숲의 가장자리 한구석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높다랗게 커서 빛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산벚나무’들도 제 잎들을 노르스름한 빛깔을 머금은 듯 비추며 붉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붉나무나 산벚나무가 그렇듯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며 풀들에게는 이
서해안에 와 있습니다. 대천 근처 작은 섬, 서해안을 바라보는 자리에 아주 특별한 한국식 정원을 꾸며놓은 어느 한옥 공간, 이곳에서 강연을 했기 때문입니다. 강연을 마치고 연못 정원에 앉아 서해와 맞닿아 있는 저 아름다운 풍광을 누리며 이 글을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충북 괴산, 오달지게 내륙인 땅에서 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내게 늘 창연한 그리움의 공간, 바다가 보이는 아름답고 특별한 정원에 앉아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어찌 호사이지 않겠습니까?멀리 뵈는 수평선의 빛깔은 모호합니다. 흰빛 같기도 하고 회녹색 같기도 합니다.
처서가 지났지만 더위는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낮은 여전히 폭염으로 뒤덮이고 사람이 머무는 장소마다 에어컨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습니다. 한밤의 더위 역시 기세가 등등합니다. 냉방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가정에서는 자연스레 전기료 폭탄을 염려하는 상황입니다. 가정에 과도하게 부과하고 있는 누진 전기요금제의 비합리성과 부당성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더위가 계속되는 것을 제대로 예보하지 못한다며 애먼 기상청으로 노여움이 번지기도 합니다.폭염을 비롯한 기상이변은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넘나들며 인류에게 자각과 자성을 요구
지난 두 주 동안 어떠셨는지요? 잠은 잘 이루셨는지요? 저는 도시와 숲을 오가며 여기저기 강의를 했는데, 머무는 곳이 어디든 잠을 설치는 밤들이 많았습니다. 한낮은 물론이고 밤까지도 너무나 무더워 뒤척여야 했던 밤이 많았습니다. 도심 속의 숙소는 말할 것도 없고 산방에까지 열대야가 찾아온 날이 몇 날 있을 만큼 이번 여름의 무더위는 맹렬했습니다. 십여년 전 내가 숲으로 처음 들어온 그 시절, 나는 선풍기 한 대 없이 3년의 여름을 거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문을 열어놓고 자노라면 삼복의 더위에도 새벽에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거센 장맛비가 숲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이 숲에 쏟아진 이번 비는 비교적 집중적이었고 세찼습니다. 덕분에 이곳 여우숲으로 올라오는 길 여러 곳이 험하게 망가졌습니다. 숲길을 뒤덮은 나뭇가지로 세차게 쏟아진 비는 가지 끝을 따라 떨어진 빗방울을 따라 길 한 복판에 새로운 도랑을 만들었고, 흙이 무너지면서 길 가장자리 배수로가 막힌 지점은 길로 물이 넘쳐 그 길의 허리가 끊기기도 했습니다. 휴가철 여우숲으로 찾아올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 길을 다시 복구하고 배수로를 내야하니 쏟아야 할 비용과 노동이 막막합니다.이번 비가 던지고 간 고난이
숲을 깊게 마주하면서부터 나는 다른 생명 안에 있는 고난과 상처를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내가 숲을 깊게 마주한다고 표현하는 것의 의미는 숲에 사는 풀과 나무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자원으로 인식하는 인간중심의 눈을 벗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그것이 식용이나 약용할 수 있는 대상인지, 혹은 해로운 대상인지 등의 용도중심적인 시선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숲을 이루는 생명 하나하나가 태어나고 자라고 결실을 맺고 소멸해 가는 삶의 전 과정을 내 삶의 그것과 대비하며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 생명의 삶과 내 삶이 크게
이곳 ‘여우숲’에는 지금 반딧불이 불빛들이 밤 숲의 허공에 아주 긴 시를 쓰고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귀해진, 그러나 이곳에서는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밤 숲을 채우는 풍경입니다. 소쩍새 노랫소리 밤새 일어서고 또 흩어진 지도 오래입니다. 한편 낮 동안의 숲은 매미들의 합창으로 소란하고 숲의 먼 자리에서는 ‘부우욱 구우욱-’ 멧비둘기 노래 얌전하게 들려오거나 이따금 ‘꿩- 꿩’ 꿩의 노래 단말마처럼 들려옵니다. 집 근처 휴경지에는 개망초들이 그 하얀꽃을 피우고 뒤덮어 저기가 혹시 메밀꽃밭이 아닌가 생각하게도 하는 풍경을 만들고
부산, 포항에 이르는 강연 길에 인천에 사는 제자 하나가 따라붙었습니다. 나와 제자는 이런저런 질문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대화중에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도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욕정이 일어서는 때가 있나요?”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 동아시아의 옛사람들은 그것을 리(理)라고 불렀다. 여기 직각 삼각형이 있다. 직각 지점에 닿아 있는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그 합을 내면 반드시 나머지 한 변을 이루는 길이의 제곱과 같다. 오래전 피타고라스가
세종특별자치시에는 새로 생긴 학교가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정부부처의 이전으로 도시가 새로 생겼고 이주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학교 또한 새롭게 생겨난 탓입니다. 얼마 전 그곳의 고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강의초대를 받았습니다. 교사연수를 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한 사찰에서 하는데, 산사로 찾아와 선생님들과 만나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몇 년 전 광주 상무지구에 있는 사찰에서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나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특별하고 좋았던 느낌과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범인으로서는 흔하지 않은 그 경험을 다시 해본다는 기쁨에 나
나무에 붙어 먹이를 구할 때 딱따구리는 일반적으로 동선(動線)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 즉 나무의 아래쪽인 밑동에서 나무의 위쪽인 줄기 끝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먹이를 구하는 것이다. 반면 동고비는 딱따구리의 동선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먹이를 구한다고 한다. 즉 줄기의 위쪽에서 나무의 아래쪽으로 움직여가며 먹이를 구하는 생태적 특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두 종의 새가 먼저 훑고 지나간 종의 궤적을 회피함으로써 한정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살아야하는 두 종의 새가 각각 먹이활동의 가난을 피하는 전략으로 소개되는 이야기다. 산까치라 부르
숲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 더러 ‘당신이 소유한 숲과 농토가 몇 평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찾기가 어려워 곤란한 마음이 되곤 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나는 저 숲과 농토를 나의 소유라고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저 잠시 내게 허락된 시간만큼만 이 공간에 머물다 떠나게 될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진정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등기부등본에 기록된 면적의 수치로 소유를 말하지만 기실 진정한 소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긴 역사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