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18일, 뉴욕 유엔 본사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여성 불교인을 시상하는 행사가 열렸다. 주인공은 대만 출신 이파 스님. 유엔은 이파 스님이 비구니로써 불교계에서 오랜 기간 동안 훌륭한 모범을 보이며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점을 주목해 왔다. 이점을 높이 사서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이파 스님은 그가 창시한 ‘인도주의적으로 살아가기’ 프로그램으로 특히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교에 관심 갖는 젊은이들이 쉽게 불교
1998년, 일본 교토와 나라 출신 비구니스님들이 미국 뉴욕시 세인트 폴 성당에서 세계 최초 선불교 여성 마스터였던 무가이 뇨다이(Mugai Nyodai)(1223~1298)가 세상을 떠난 지 700주년이 된 것을 추도하는 특별한 의식을 진행했다.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선불교계 시각 전환을 위해 마련된 무가이 뇨다이 추도식은 선불교뿐 아니라 지역과 종파, 불교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그녀는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해나가며 종종 중국 출신 유 쉬에 쯔 유안 스님이 이끄는 사원을 방문했다. 당시는 여성의 사원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스
찬드라 코노키웅(Chandra Konnoky ong)은 1909년 태국 나콘빠톰주에서 농사 짓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서 교육 받는 대신 농사일과 가사를 도우며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자신에게 모진 말도 거침없이 했던 아버지가 12세에 세상을 떠난 후 우울증에 빠졌던 그는 몇 년 후, 톤부리 지역에 명상 교육자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찬드라는 명상을 배우고 다른 이들과 영적 교류를 갖기 위해 방콕으로 떠난다. 돈 한 푼 없이 방콕에 도착한 찬드라는 이모집에 짐을 풀고 생계를 위해 이웃집 가정부 생활을 시작
1978년, 조코 벡은 매주미 로시 스님의 세 번째 제자가 되며 삭발을 거행했다. 삭발식이 끝나자 그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 그의 친구들은 새로운 길을 선택한 그를 축하했다.그 누구보다도 깊은 지적 호기심을 지녔던 조코 벡은 불교의 기본 철학과 율법뿐 아니라 불교의 전통과 역사, 서로 다른 종파들, 또 불교와 관련된 학문을 공부해 나갔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심리학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며 기본 심리학과 불교 심리학의 연관성을 진지하게 연구했다.1983년 가을, 조코 벡은 샌디에이고에 마련된 선불교 센터 주지가
샬롯 조코 벡(Charlotte Joko Beck)이 선불교를 처음 접한 때는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서였다.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결혼해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이혼 후 아이들 양육을 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 음악 교육을 시작했다. 몇 년 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캘리포니아대에서 부교수로 재직한다.1965년 어느 날 저녁, 교회에서 강연을 하는 스님을 만나게 됐다. 조코 벡은 스님이 그곳에 모인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강연이 어느 정
어느 해 겨울에는 1주일 넘게 거센 눈보라가 한시도 멈추지 않고 몰아쳤다. 동굴 안에서 명상을 하던 텐진 팔모는 동굴 안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히말라야 산골 한 동굴 구석에서 수행하다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동굴 구석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순간 마음 한구석에 ‘살아 나가서 이 세상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그는 냄비 뚜껑을 집어 들고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몇 시간에 걸친 고된 작업 후 마침내 하늘을
1943년 런던에서 태어난 다이안 페리(Daian Perry)는 21살 되던 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겨두고 인도로 떠나기로 한다. 그는 티베트 불교 역사에서 두 번째 서양인 출신 비구니가 됐다.어린 시절, TV나 책에서 본 동양권 나라 모습은 당시 그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분야였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 한구석에 앉아 동양 신화나 전설 이야기를 읽곤 했다. 사춘기가 되며 인생의 고통과 죽음 등을 고민하며 더욱더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다이안은 18세 때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존 월터스(John Walters)의 ‘
루스 데니슨(Ruth Denison)은 1922년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 동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시작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러시아의 노동 수용 캠프에 수용됐다. 히틀러의 광기가 절정을 지날 때 목숨을 걸고 가까스로 수용 캠프에서 탈출했다.전쟁이 끝나고 독일 베를린에 있는 캠프로 끌려간 가족들을 찾아갔다가 다시 수용소에 감금됐고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군인들에게 매일 성폭행을 당하며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도 했지만 함께 수용된 여성들과 서로 위로하며 견뎠다. 수용소에는 2000여명이 넘는 여성
프레다는 위빠사나 명상법을 배우며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명상을 배우기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제대로 명상을 하지 못했다. 회의감이 느껴질 때쯤 자연스럽게 마음에 평화가 왔고 불안했던 삶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명상을 하며 그 자신이 예전과 다르게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또 불교 철학에 관한 다양한 세미나에 참석하며 점점 불교에 빠져들었다.42세가 되던 해 그는 완전한 불자가 됐다. 그의 남편 바바 피아레 랄 베디는 당시 수피교에 관심을 가지며 종교적 삶을
1911년 영국 중부 도시인 더비에서 시계 제조공 부모님 슬하에 태어난 프데다 베디(Freda Bedi)는 평범한 영국 여성이었다. 하지만 남편인 바바 피아레 랄 베디(Baba Pyare Lal Bedi)를 만나면서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남편은 인도 라호르시에서 덕망 높은 시크교 가문 출신이다.영국서 인도인 남편과 결혼라호르시서 인도 독립운동옥살이 후 독립신문도 창간이주민들이 많은 영국 사회에서 국제결혼은 매우 흔한 일이지만 1933년 그들의 결혼은 옥스퍼드 매일신문 첫 페이지 전체를 장식할 만큼 큰 뉴스였다. 결혼 후 그
호엔회 스님은 1996년 한 TV프로그램에 활동이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88세 스님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본 싱가포르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프로그램이 큰 반응을 보이자 싱가포르 정부는 그가 복지시설을 만들 수 있도록 대지 5000m²(약 1512평)를 기부하기도 했다. 호엔회 스님은 건축 비용을 모으기 위해 채식요리책을 출판,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인세가 10만 달러에 달했다.정부로부터 대지 기부 받아235명 입소 가능 시설 세워입적 전까지 독거노인 돌봐 2001년 8월 개원한
호엔회(Ho Yuen Hoe) 스님의 인생은 놀랍기 그지없다.악몽 같은 유년시절 극복해사업가로 성공 후 불교 귀의중국이민자 위한 센터 설립노인 돌보며 자선사업 펼쳐그는 중국 광저우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 홍콩의 한 노부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2년 후 노부인이 세상을 뜨자 다시 자녀가 없는 부부에게 입양돼 하녀처럼 살았다. 양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부유한 대지주 아들의 첩으로 팔려갔다. 그 집안의 부가 아편 밀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그는 악몽 같은 유년 시절을 겪은
일본 역사 속 황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존경 받는 인물은 고묘 황후(光明皇后, 701~760)다. 그의 배우자는 후지와라 혈통이 세운 왕국의 황제 쇼무(聖武天皇, 701~756)로 724년 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남편 쇼무 황제 되며 황후 올라불교 부흥 염원하며 기반 다져도다이지 불상 등 불교유적 남겨빈민 위한 일본 첫 병원도 설립당시 일본 황실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국에 불교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쇼무 황제는 불심이 매우 깊었다. 그는 743년 도다이사에 16m 높이의 비로자나불상을 세우도록 했고,
바르카 마단(Barkha Madan)은 1994년 미스인도 대회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인물이다. 같은 해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미인대회에서는 준우승 왕관을 썼다.미인대회 준우승해 연예계 진출큰 성공 얻었지만 행복 못 느껴타지역 출신 최초 티베트비구니봉사활동·명상 수행 지도자 활동그 후 그는 연예계에 진출해 영화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던 그는 2012년 어느 날 연예계를 은퇴하고 불교에 귀의한다고 선언한다.영화배우로서 바르카 마단의 마지막 작품은 국제적으로도 큰 호평을 받았던 ‘수
바바라 로드는 선불교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그의 본성과 성격, 사는 방식 모두가 선불교 이론들과 맞아 떨어졌고 잘 어우러져 있었다. 간호사로서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집안일까지 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 명상 수행을 하는 것이 그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바쁜 날에도 센터에 가서 명상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수행이 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매일 되새겼다. 숭산 스님이 그녀에게 자주 했던 말 중 하나는 돌 하나에 떨어진 물방울에 관한 이야기다. 바쁜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컴벌랜드(Cumberland)시에 있는 프로비던스 선센터(Providence Zen Center)는 한국 선불교에서 덕망 높은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받는 미국 학생들이 불교 공부와 수행을 하는 곳이다.간호대 학생으로 겉돌던 때선불교 책 읽고 불교 매료취업 후에도 명상 이어가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수행원으로, 그곳에는 다수의 수행자가 다 함께 명상하고 설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크고 여유로운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 건물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는 다이아몬드 힐(Diamond Hill)에는 약 30여명의 스
안니라마 셰랍상모는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여성이었다. 창양 기얌쵸 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불교에 귀의한 그는 불교만을 위해 일생을 살았다. 그는 교육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엄격하고 철저했다.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과 불교 기본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며 새로운 교육 방법들을 만들어 갔다. 제자 비구니들과 교육장을 벗어나 사적으로 대화할 때는 마치 어머니 같았다. 따스한 모성애로 그들을 다독이고 감싸 안았다. 힘든 상황이 벌어지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행할 때면 놀랄만한 지혜와 아이디어로 융통성 있게 상황을 헤
티베트 동부에 있는 낭첸(Nangchen) 고산지대는 사람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이다. 하지만 이 작은 오지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이곳 낭첸에 티베트의 가장 크고 명성 높은 비구니사원이 설립됐기 때문이다. ‘겝착(Gebchak)사원’이라고 불리는 이 사원에는 700여명의 비구니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 불자들에게는 명상 센터로도 유명하다.세상 떠나기 직전까지 명상겝착 사원 최장기간 머물며비구니에 조화로운 삶 강조불교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수행에 전념
예술가이자 사업가인 오스카 프리드굿(Oscar Freedgood)을 만나 결혼을 한 모린 스튜어트 로시는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콘서트를 열며 음악가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맨해튼에 위치한 학교에 세 아이를 등교시키고 웨스트 엔드 에비뉴(West End Avenue)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즐기며 걸어 내려오던 그는 ‘선불교연구협회(Zen Study Society)’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건물과 우연히 마주쳤다. 순간 이것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온 불교수행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열네 명의 여성들이 한방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작은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여성들은 모두 눈을 감고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성들 사이에 모린 스튜어트 로시(Morin Stuart Roshi)라는 여성이 있었다.파리서 불교서적 접하고 매료이론만큼이나 실천 중요 강조미국서 불교협회 회장도 역임모린 스튜어트는 일본 선불교 임제종에서 로시(Roshi)라는 직책을 얻고 미 대륙에서 최초로 선불교 교육에 앞장선 인물이다. 케임브리지대학 내 불교협회장을 역임했다. 1982년, 그의 스승이었던 센 나카가와(Soen Nak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