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를 대령하는 방법청혼은 윤회관 전제돼불교는 자비종교 입증 49재나 칠칠재를 지낼 때 제일 먼저 하는 의식으로 대령(對靈)이 있다. 영적 존재와 대면하는 의식이다. 원래 이 의식은 해탈문 밖에 영혼을 맞이하는 영혼단(迎魂壇)을 설치하고 진행되지만 요즈음은 재를 지내는 법당 내에서 바로 행해진다. 재를 지내려면 제일 먼저 영가를 대령해야 하는데 그 대령하는 방법으로 창혼과 청혼이 있다. 청혼은 영혼을 청한다는 말이고 창혼은 영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청하는 것이나 부르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창혼(唱魂)은 영적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데, 창혼만 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대번에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재가 열리는 곳에 이를 수
장례 후 처음 올리는 재칠칠재 입재의식에 해당마음의 때 씻는 게 목적 반혼재는 장례를 끝내고 혼령의 영위(위패)를 본래 있던 절로 돌아와 모시며 올리는 재로 49재나 칠칠재의 입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재’라고 한다. 재는 공불재승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스님들께 재(공양)를 올리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별도의 재공작법은 행해지지 않고 관욕을 행하고 사성례를 한 후 상단권공을 하고 영위를 봉안하는 반혼재가 진행된다. 그렇다면 반혼재의 핵심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위를 사찰 안이나 법당 안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목욕을 시켜드리는 관욕의식이 아닐까. 목욕 관욕이라고 하는데, 머리를 감는 것을 목이라 하고, 몸을 씻는 것을 욕이라고 한다. 관욕은 물을 머리서부터 부어 목욕하게 한
죽으면 7일마다 생사 반복망자 위해 공덕 짓는 행위산 사람도 선행 쌓은 계기49일 동안 재를 올리지 못하더라도 돌아가신 날로부터 매 칠일마다 재를 올린다. 이렇게 일재, 이재, 삼재…, 마지막 일곱 번째 49일에 올리는 칠재까지를 칠칠재·칠칠기(七七忌)·누칠재(累七齋)라고 부른다. 49일재, 49재라고 하는 말은 최근에 만들어져 쓰이게 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 왜 칠칠재를 올릴까. 칠칠재의 개념이 등장하는 경전으로는 ‘지장보살본원경’, ‘범망경’, ‘약사경’ 등과 ‘유가사지론’을 들 수 있다. ‘지장보살본원경’의 ‘이익존망품’에는 칠칠일 동안 친척이 망자를 위해 재를 올리는 등 선업 공덕을 지어주어 망자로 하여금 좋은 곳에 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설해져 있고, ‘유가사지론’
49재 기반은 윤회·인과사상고인 해탈 돕는 것이 목적사경·공양 등 정성이 관건 조상신을 모시는 유교에서는 사후에 삼우제, 졸곡제, 소상, 대상을 통해 삼년상을 마친 이후에는 매년 명절과 기일에 조상님께 제사를 올린다. 이에 비해 사후 윤회와 명계사상을 말하는 불교에서는 죽은 이가 좋은 세상에 날 수 있도록 복을 빌어주기 위해 재를 올린다. 사후 49일에 올리므로 49재라고 하지만, 칠일마다 일곱 번 행하므로 칠칠재, 누칠재, 재칠 등으로 불렸다. 49재의 사상적 기반은 윤회사상과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현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 윤회하며, 자신이 지은 업대로 결과가 나타나고 거기에 따라 보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인과응보는 현생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
공양의 공덕·가호력으로윤회 벗어나 해탈 발원유교 제사와 크게 달라 전호에서 재(齋)의 의미를 살리지 않은 채 단지 사찰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불교제사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제사는 사당에 조상님의 신주를 모시고 명절이나 기일에 제수를 올리는 것으로 조상신을 받드는 것이다. 조상신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제사는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도들은 제사를 지낸다. 어찌된 일인가. 생사윤회설을 수용하고 있는 불교에서는 생전에 지은 업보에 따라 사후에서 다음 생의 몸을 받기까지 일정 기간의 중간 상태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상태를 중음(中陰), 중유(中有)라고 한다. 육신이 사라진 중유는 죽었지만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 산 자처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
재는 심신 가지런히 하는 것재가불자 신행·수행과 직결불공 아닌 수행 취지 살려야 불교 수행자들은 탁발을 통해 불특정 대중을 만났지만 현재는 여러 현실 여건 상 탁발을 통해 대중을 만나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불교 스님들이 불자가 아닌 대중을 만나게 되는 공간으로 사십구재가 있다. 그럼 재란 무엇이고, 대표적인 재라고 할 수 있는 사십구재란 무엇이며, 사십구재를 왜 지내야 하는지 등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하자. 일간지 종교담당 기자들은 신입 기자 시절에 불교의 제사는 재로 써야 된다는 것을 교육받는다고 하는데, 이 논의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불교의 재와 유교식 제사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어느 정도 변별될 것으로 생각한다. 인도말 ‘upaṣadha’의 번역어로 포살이라고 음역
준제행법은 독립된 형태천수주에 포함은 큰 오류이제라도 분리가 바람직 천수다라니를 염송하는 기도집인 ‘현행’천수경에는 천수다라니 염송뿐만 아니라 도량엄정행법, 참회행법, 준제행법, 수계발원행법 등 형태로 합편돼 있다. 천수다라니염송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준제행법은 천수주 염송과는 별 관련이 없는 독립된 행법이다. 그렇다면 준제진언 염송을 위한 염송차서를 담고 있는 이 의식이 어떻게 ‘현행’천수경에 합편되었을까. ‘현행’천수경의 원초적인 형태가 갖춰진 것은 1881년 삼성암에서 발행된 ‘고왕관세음천수다라니경’이다. ‘석문의범(1935)’에는 아침에 ‘사대주’를, 저녁에는 천수주를 염송하고 준제행법부터 이어졌다. 이전의 ‘불가일용작법(1869)’에는 천수다라니를 중심으로 한 진언 염송 이후에 예
한중일, 관음신앙은 같지만천수주 의식은 제각기 달라의례·신행 차이에서 비롯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에서 행해지는 관음신앙의 공통점은 ‘관세음보살보문품’과 ‘신묘장구다라니=천수주’ 염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일본 등지의 천수주 염송의식은 우리와 조금 다르다. 예참의식이 아닌 한, 송주의식에서는 천수주 앞의 계청 10원 6향과 천수주 이후의 사방찬 도량찬 게송이 없이 바로 다른 다라니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천수주 송경의식에만 사방찬이 있을까. 사방찬은 동남서북 네 곳으로 물을 뿌리니(灑水) 도량이 깨끗해지고, 청량해지고, 정토가 되고, 안락의 땅이 되었다는 것을 찬탄한다는 것이다. 사방으로 물을 뿌린다고 하지만 천수주를 염송할 때, 물을 뿌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천수주 염송 이후
화탕은 소멸, 지옥은 고갈 음양이 대비된 한시 미학 의례문 곳곳의 일반 현상 ‘천수경’ 6향 2~3구의 서술어 ‘화탕(火湯)’은 고갈(枯竭)되고 ‘지옥’은 소멸(消滅)돼야 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1970년대 어느 출판사에서, 중국의 경전이 그렇다고 하며 -아마 중국 독체(讀體, 1601~1679)의 ‘천수천안대비심주행법’이나 ‘선문일송’ 등을 보았을 듯하다-이 두 구를 교체한 ‘천수경’을 보급해 오고 있다. 해서 소멸과 고갈의 의미에 대한 상징 조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국내 고본은 어떤가. 가범달마 역 천수다라니경, 불공(不空)의 천수다라니, 지례의 ‘천수안대비심주행법’이나 또 국내의 ‘오대진언집’(1485)에서 ‘석문의범’에 이
소재·길상엔 불교인간관 투영의례 수단이자 목적이고궁극적으로는 성불의 첩경 지난 호에서 천수경의 십원과 육향은 원을 채우고 악업을 소멸하는 것이라 했다. 지혜의 눈이 있어야 일체법을 바로 볼 수 있고, 좋은 방편이 있어야 중생을 건질 수가 있고, 지혜의 배에 올라야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고, 계정혜 삼학이 갖춰진 도라야 원적의 산에 오를 수 있고, 무위의 집에 모일 수 있을 때 법성의 몸과 같아진다고 발원하므로 이는 길상(吉祥, 최상의 행복)의 발원이 된다. 이에 비해 내가 만일 도산으로 향하면 도산이 저절로 꺾이고 화탕으로 향하면 화탕이 저절로 말라버리고 지옥으로 향하면 지옥이 저절로 다해진다. 굶주림으로 향하면 저절로 배가 불러지고 수라로 향하면 악한 마음이 저절로 항복되고 축생으로 향
천수경 10원 6향 발원은자리이타 완성 다짐이자관음보살 되겠다는 서원 천수경의 10원과 6향은 16원이라고도 하는데, 한국불교 일반에서는 10원은 자리(自利)와 6향은 이타(利他)로 종종 이해하거나 설명하고 있다. 일찍이 ‘대비심주행법’을 찬하여 우리나라의 ‘현행’천수경 성립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중국 천태종의 사명 지례(960~1028) 스님은 10원을 사성제와 사홍서원으로 해석하며 10개의 원은 서로 호응한다고 하였다. 이 견해에 동의하는 필자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 지혜의 눈, 좋은 방편 등을 얻고 반야선에 올라 고해를 건너고 법성신과 같아지고자 하는 10원은 원을 채우는 만원(滿願)이고, 탐욕 진에 우치로 만들어내는 지옥, 아귀 축생의 업을 소멸하기 위해 내 안의 악업으로 마음을 향하는 6향은
‘從我’는 나 따르라는 뜻 아닌‘내 이름을 칭함을 따라’ 의미‘나무’, 귀의로만 번역은 곤란 ‘천수경계청’ 송주법식에는 여타 다라니의 송주법식과 달리 10원6향이라는 구체적인 발원이 등장한다. 가령 ‘금강경계청’에는 계수문과 발원문에, 경전 독송목적이 왕생극락에 있음이 천명되고 있을 뿐이지만 ‘천수경계청’에는 네 수의 계수문과 10원과 6향이라는 구체적인 발원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원하는 방법이다. 천수경의 원초경전인 천수다라니경에는 관세음보살이 “만약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신묘장구다라니를 지니고 외우고자 하면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심을 일으키고 먼저 나를 따라(從我) 이와 같이 원을 발해야 한다”며 10원을 발할 때 먼저 ‘나(관세음보살)를 따라(종아)’ 발원
천룡중성은 14부문 천신들관음보살 명령 받은 신들이신묘장구다라니 수지자 보호 송주법식은 당해 다라니가 설해진 원초경전에 의거해 송주하는 법식으로, 천수경의 경우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에 의거해 송주하는 것을 말한다. 당연한데에다 지면을 할애할 수밖에 없는 연유는 우리가 늘 송주하는 ‘현행 천수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행 천수경’에는 여러 진언이 있지만 송주법식에 의한 주(主) 다라니는 천수경의 ‘신묘장구다라니’와 준제행법의 ‘칠구지불모준제대명다라니’이다. 여타 진언은 두 다라니를 송주하는 보조 진언이다. 두 다라니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과 ‘불설칠구지불모준제대명다라니경’에 출현하며, 두 경전의 가르침과 송주법식의 영향으로 현재의 송주법식이 생
‘천수경’ 자의적 해석 많아경전은 부처님 만나는 도량정확한 고증·검토 따라야 경전이나 다라니를 청하기 위해 성현을 청하고 나면 의당 인사를 올린다. 그런데 천수경에서는 좀 특이한 이해들이 있어왔다.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主) 원력홍심상호신(願力洪深相好身): 원력이 크고 상호가 훌륭하신 관음보살 대비주께 멀리 숙여 절합니다.” 이 7언 2구와 이하 6구 도합 8구를 천수경의 ‘계수문’이라고 한다. 계수문 8구의 전체 서술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첫 구의 ‘계수’이다. 그런데 1구 관음대비‘주’의 ‘주(主)’가 ‘석문의범’(1935)에 ‘주(呪)’로 표기돼 유통되면서 적지 않은 본들이 이를 따라왔다. 대비주(主)가 대비주(呪)로 와전되어 대비주를 ‘신묘장구다라니’로 인식하고 다라니에 절한다
경전이나 다라니 청하는 의식원래는 상황 따라 형태 달라현재 한국불교는 ‘차이’ 무화 계청(啓請)은 청함을 연다는 뜻으로, 경전이나 다라니를 청하는 의식이다. ‘천수경’의 경우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계청’, 금강경은 ‘금강경계청’이 그것이다. 그런데 ‘현행 천수경’에는 이 제목 앞에 정구업진언, 안위제신진언, 개경게, 개법장진언 등이 부가돼 제목을 본문으로 인식하거나 제목으로는 인식하지만 두 개의 제목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계청’에 대해 ‘경을 열면서 청하옵니다’ ‘다라니를 청합니다’라고 본문으로 인식하거나, ‘~ 자비의 다라니를 청함’이라고 하여 제목으로 인식하거나 또는 ‘모심’이라고 하여 이하 계수와 발원의 본문 제목으로 인식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현행 천수경
경전을 염송하는 행위는내가 앉은 이곳에서 바로부처님 뵙고 법문 듣는 것 불교의 제반 의례의식은 세월과 지역을 건너오면서 같은 내용이라도 새롭게 해석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졌다. 금강경계청의 개경게 이전과 이후의 변화도 그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선문출판사, 1988)에는 ‘금강경언해’(1464)와 유사한 계청법이 실려 있는데‘보공양진언’과 ‘운하범’이라는 축원이 없고, 개법장진언이 추가돼 있다. 보공양진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선행 안위제신진언의 공능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전회에서 언급하였듯이 ‘여러 신을 편안하게 위로’하거나 ‘다라니 소리를 듣고 놀라 달아날까봐 위로해주는 진언’으로 염송하게 되면 공양의 필요성은 애초에
안위제신진언은 신들을위로하려는 것 아니라도량수호 당부하려는 것 지난 호에서 안위제신진언은 성현을 청해 모시는 진언이라고 했다. 성현을 모셨으면 이제 예경을 해야 할 차례다. 그렇지만 현행 송주의식의 차례에는 개경게송이 자리하고 있다. 현 차례로 볼 때, 경전을 열기 전에 경이나 다라니를 듣고 놀라 달아날 존재가 있을까봐 미리 오방내외의 여러 귀신들을 편안히 위로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안위제신진언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안위제신진언은 ‘안토지진언’이었다고 이미 언급했다. ‘안토지진언’과 ‘안위제신진언’은 진언음가는 같지만 공능은 다르다. 무슨 이야기인가. 안토지진언은 말한 대로 보좌(寶座)가 아닌, 맨 땅 토지에 편히 앉는 진언인데 앉는 객체의 성현이 표현되지 않았다.
정구업진언은 사전 수행아상을 떠나겠다는 다짐경은 읽는 것 아닌 ‘수지’ 일과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이제 경전이나 다라니를 염송하는 차례 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근래 출판되는 독송경전들의 앞에는 ‘송경의식’이 배치돼 경전이나 다라니를 읽기 전에 먼저 읽도록 인도하고 있다.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오방내외 안위제신(安慰諸神)진언, 개경게(開經偈), 개법장(開法藏)진언이 그것이다. 첫째 ‘정구업진언’은 구업을 맑히는 진언이라고 했으니 거짓말, 이간질, 험한 말 등 알게 모르게 말로 지은 죄업을 청정하게 맑히겠다는 진언이라고 할 수 있다. 더럽혀진 입으로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구업진언은 경전과 다라니를 읽는 본 수행에 앞서 행하는 의미 있는 사전 수행이
예불 전후 꼭 이뤄지던 송주근래엔 소임 스님 일과 격하수행 등한시하는 풍토 반영 한국불교의 수행일과는 어떤 모습일까. 제방의 수행일과표를 통해 일별할 수 있다. 17세기 중국 선문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선문일송’에는 ‘조시과송(朝時課誦)’과 ‘모시과송(暮時)’으로 나누어 주로 외우는 다라니나 경전과 예불발원이 보인다. 아침에는 능엄주 천수다라니 여의륜다라니 등의 제진언과 예불발원으로 이산선사발원문을 염송하고 자삼귀의를 하고 법보화, 삼신불, 칭명으로 끝난다. 저녁에는 불설아미타경 독송을 시작으로 예불참회문, 몽산시식의 정토문, 서방발원문을 하고 자삼귀의를 한 후 아미타불 칭명으로 끝난다. 이러한 송주 형태는 현대 대만의 불광산사나 승천선사의 조석 송주일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불교의
신중단 반야심경 염송은호법신 격을 낮추는 일3정례 예경 환원 바람직 오늘날 봉행되는 법회의식은 그 기원이 ‘석문의범’의 ‘강연의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이는데, 반야심경은 법회 때 삼귀의 찬불가에 이어 독송되고 있다. 강연의식 목차를 보면 삼귀의, 반야심경 이후 찬불게(가), 입정 강화(설법), 사홍서원, 산회가의 순서가 제시되었다. 현재 법회와 다른 점은 찬불가와 반야심경의 순서가 바뀐 정도이다. 현 법회에서 반야심경이 염송되는 위치를 일반적 의궤로 비춰볼 때 신묘장구다라니 정도를 염송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석문의범’의 ‘설교의식’에는 삼정례, 찬불게, 송주(誦呪)가 이어지는데, 이때 주(呪)가 신묘장구다라니이다. 곧 천수다라니 염송할 곳에 반야심경을 읽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