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불교의 수행법에는 간화선, 위빠싸나, 염불선 거기에 진언 염송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염불선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염불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지 답변하여 주십시오. 결론부터 말 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고 깨달음을 이루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하여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제가 강조 하는 바이지만 수행에 있어 염불이건 화두건 부지런히 노력 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더욱 중요 한 것은 불교 수행이 지니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숙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조건 앞뒤도 모르고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외도들 주문 외우는 것과 무당들 기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수행 하는 사람이 중점을 두어
근래에 들어 불교 안팎으로 수행단체가 생겨나면서 자신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스로 자신이 그렇다고 말 하는데 대해서 제가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나름대로 수행을 하여 어떤 체험이라도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대 망어 죄를 지어 미래세에 남과 자신을 큰 괴로움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능엄경에서 스스로 상인의 법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모두 바른 수행자가 아니니 결코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원각경에서 수행자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는 자취가 있으면 이는 깨달음이 아니라 모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수행을 하다보면 마군이 시험을 한다든가 방해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수행을 철저히 하지 못하여 저의 경험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과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수행하는 중에 경우에 따라 마장이 올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서 성도 하실 때에 파순 이라는 천마로부터 협박과 유혹을 받으셨고 많은 선지식들도 마의 경계와 마의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능엄경에서는 마의 종류와 마에 사로잡힌 수행인들의 모습에 대해 자세하게 설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중생의 구조라 할 수 있는 색 수 상 행 식인 오온에 각각 열 가지씩 모두 오십 가지의 마가 붙는 일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근대의 고승인 용성 선사는 각해일륜
수행을 지도 하시는 선지식들의 법문을 접하다 보면 분별심을 버려라 혹은 차별심을 버려라하는 말을 흔하게 듣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모든 분별이 쉬어 지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치시는 분의 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그런 말은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도 불교 일을 하면서 분별을 하지 말라 차별을 두지 말라 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선악 분별을 끊으라느니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느니 밉고 곱고를 두지 말라느니 하면서 수행인들에게 일체의 생각을 쉴 것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무조건 동의 할 수없습니다. 그 까닭은 이 말들에 중생의 인식구조와 삶의 현실을 무시한 경향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도 말과 생각으로써는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 갈수 없
수행에 있어 흔히 깨어있으라는 말을 듣습니다. 어떤 것이 깨어 있는 상태입니까? 깨어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깨달아 있다는 뜻입니다. 중생의 마음은 늘 무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중생은 하루 종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며 살아가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본성이 무엇인지 모른 채 오직 대상에만 매달립니다. 무지는 탐욕과 진애와 혼침과 공포와 도거 등의 온갖 번뇌를 수반하고 중생을 속박하여 생사의 갈래에 빠지게 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다 깨달아 있다는 상태는 비록 부처님이나 아라한처럼은 못되었어도 늘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 특히 마음의 현상을 투철히 알아채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설혹 마음이 갖가지 번뇌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일어나는 번뇌의 모습들을 알아채고 있다면 그래도 깨어있
영동과 영서를 잇는 불교복지라인이 구축됐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대표이사 지관 스님)은 10월 20일 개최된 양평군종합사회복지관 수탁자선정위원회에서 위탁 운영자로 선정됐다. 조계종복지재단은 11월 3일 양평군청과 2년 동안 양평군사회복지관 위탁 계약을 체결, 이로써 강릉장애인복지관에 이어 홍천장애인복지관과 양평종합복지관을 잇따라 수탁 받아 영동과 영서, 서울을 잇는 불교복지라인을 마련했다. 양평 용문사(주지 의정 스님)가 운영 지원 사찰인 양평복지관은 1,160평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연면적 700여평 규모이다. 양평복지관은 생활체육실, 어린이집, 노인주간보호센터, 휴게라운지 등이 구비돼 어린이와 노인 등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전망이다. 양평복지관은 종사자가 모두 모집되
세월의 무상함에 머리가 세고 소소한 기억을 가진 어르신들의 작품은 어떨까? 광진노인보호센터(소장 대용 스님)는 7일부터 10일까지 7호선 건대입구역에서 ‘세월과 국화꽃 향기 展’을 개최한다. 광진구청의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치매 노인들이 재활 치료를 목적으로 수행해왔던 미술-원예치료, 종이접기, 짚풀공예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 가을 국화가 함께 전시되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치매 예방법 등 유익한 정보들도 역내를 수놓고 있다. 02)458-0350 최호승 기자
전문적인 여성 불자 양성을 위한 교육 기금을 마련하는 바자회가 열린다. 불교여성개발원(원장 김인숙)은 11월 16일 오전 11시 30분부터 18일까지 서울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제1회 불교여성인재양성 기금 마련 바자’를 개최한다. 바자회 판매 수익금은 모두 여성리더십교육을 비롯해 불교여성아카데미, 행복한 가정지킴이 등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기 위해 사용된다. 바자회에서 판매되는 물품은 김해자(중요무형문화재 107호 누비장)의 누비승복 1점을 비롯해 한기늠(조각가)의 조각 1점, 리사 버쉬바우(공예가, 미 대사관 부인)의 브로치 1점 등과 ㈜쌈지의 가죽 소품류 등이 불자들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밖에 연예인 불자들의 소장품들도 선보여진다. 02)722-2101 최호승 기자
큰 스님들 법문을 듣다보면 깨달음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 합니다. 심지어는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 보다 더 쉬운 게 깨달음이라는 말씀도 하 십니다. 어떠한 이치로 그와 같은 일이 가능 합니까? 그와 같은 경우는 과거 중국의 선종에서 조사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알다시피 중국 선종의 특징은 불립문자 하고 직지인심 하여 견성성불하게 하는 방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과 깨달음을 물으러 온 사람에게 잡다한 교리나 수행법을 일러 주지 않고 그대로 묻는 사람의 마음을 찔러 들어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하여 부처를 이루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일화가 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의 귀에도 익숙하겠지만 중국선종을 대표하는 인물 중에 마조선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
법사님 말씀대로 하나의 주제에 마음을 항상 집중을 하다 보면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지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평소에 일어나는 마음과 수행하는 마음이 서로 상충 될 것인데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삼매에 들 수 있습니까.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번뇌 망상 아님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수많은 생각과 함께 수많은 감정을 일으켜야만 하는데 이들을 하나의 주제에 몰입 하여 다스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 일 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 앉아 수행만 한다면야 그럴 일이 별반 없겠지만 몸뚱이 끌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얼마간의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대로만 하면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
삼매를 통해서 우선 번뇌를 약화시킨 후에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닦으라고 하셨는데 삼매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 좀더 구체적 설명 하여 주십시오. 삼매는 마음이 하나의 주제에 머물러 움직임이 없는 상태를 말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이 하나의 주제에 머무른다고 하여 아무 주제나 다 해당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주제에 머무르기는 머무르되 주제가 착하지 못하거나 집착을 가져오게 하거나 욕망을 수반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낚시 하고 있는 사람이나 바둑에 몰입 되어 있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를 하루 종일 그리며 짝사랑 하고 있는 사람도 마음이 하나의 주제에 머무르고는 있지만 이를 삼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삼매의 의미를 선심일경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거룩하고 착한 주제로써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에
수행은 번뇌를 끊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는데 번뇌란 무엇이며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중생이 일으키는 모든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뇌를 교리적 측면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거만 의심 악견 분노 원한 질투 들뜸 산란 고뇌 질투 등 중생을 어지럽게 하고 들뜨게 하고 괴롭게 하는 등의 불쾌한 생각이나 감정만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중생들이 쓰는 마음은 다 번뇌 아님이 없습니다. 그게 악한 마음이건 착한 마음이건 감정이 일어나건 안 일어나건 깨어 있건 잠을 자건 중생의 마음은 모조리 번뇌 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생은 번뇌 속에서 살다 번뇌 속에서 죽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알다시피 번뇌는 중생을 중생이게 하는 질료로써 생사윤회를 비롯한 일체의 괴로움을 가져오게 하며 제법의 참모습을 바로
수행자가 견성을 하게 되면 생멸을 벗어나 불생불멸의 경지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생멸하는 현재의 마음 외에 불생불멸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인데, 어찌 법사님은 생멸하는 마음을 보는 것으로 견성을 말하는지요. 질문하신 분께서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찰나 찰나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의 마음과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불생불멸의 마음을 상대적 관점으로 따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을 끝내 버리지 못하면 지금 생멸을 거듭하면서 작용하는 마음을 떠나 불생불멸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고, 그런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면 올바른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잘났건 못났건 망상을 피우건 선정을 닦건 여기에 하나의 마음만 있을 뿐이지 마음 안이건 밖이건 또
참선 수행의 목적이 견성성불에 있다고들 합니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분도 있고, 견성했다고 해서 성불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견성이 성불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우선 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아마 오로지 참선에만 몰두하시는 분들이 들으면 견성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저를 크게 힐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견성의 경지는 말할 수 없어도 견성에 대한 견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우선 견성이라는 용어는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 가운데는 없고 중국에서 파생된 선종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견성이라는 말은 불교 교리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라 선가에서 쓰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성이란 글자 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말입니다.
평상심이 도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평상심이 곧 도임을 알 수 있습니까. 그 말은 중국의 마조선사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어느날 마조선사가 대중들에게 훈시하기를 “여러 도반들이여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그대들은 단번에 도를 이루고 싶은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 지금 이렇게 걷다가는 멈추기도 하고 다시 앉아 있다가는 편안하게 눕기도 하는 일체의 움직임이 바로 도가 아님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도는 이렇게 저렇게 수행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고 가고 먹고 잠자는 일체의 행위가 그대로 도 임을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수행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
본래 선은 언어와 문자로 나타내거나 가르칠 수 없고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써만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법사님은 왜 말로 설명 하려 하십니까? 그렇게 저를 향해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불교, 그 가운데에서도 선가에서는 선에 대해 입을 열어 설명 하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선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행위라고 여겨 왔습니다. 선은 불립문자며 언어도단이며 교외별전이기 때문에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고 다만 묵묵히 참구하여 마음의 본성을 밝히는데 힘써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선에 대해 정작 저와 같은 입장을 취하시지 않았다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선가에서 내려온 선이 같은 불교 속에서도 그 해석이 다르다는 사실에 한번쯤은
경에 일체유심조 또는 삼계유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방금 질문하신 내용은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에서 보실 때 자아와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그려진 허상에 불과합니다. 일체유심조 또는 삼계유심이라고 할 때, 일체와 삼계는 마음에 비춰진 대상으로서의 온갖 모습들을 말하는데 이것들은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나타난 현상일 뿐 결코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심이라는 말 중에 ‘심’은 참되고 한결같은 깨달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고 변화하는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는데 있습니다. 중생들은 마음과 객관세계는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마음 밖에 세계가
대한불교산악인연합회(총재 양춘동, 이하 산악인연합)는 8월 25일 인천 수미정사에서 인천광역본부 현판식을 가졌다. 이날 현판식에는 양춘동 총재를 비롯해 임대식 사무총장, 김성진 인천광역본부장 등 사부대중 50여명이 동참했다. 산악인연합은 이날 현판식을 통해 인천광역본부의 출범을 알리고 정기적인 산행을 통해 인천지역 불자산악인들의 신행활동에 앞장서게 된다. 한편, 산악인연합은 오늘 9월 문화관광부에 사단법인 서류를 신청할 예정이며, 11월경 사단법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을 방침이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지관 수행에 있어서 지는 사마타를 닦아 얻어진 경지를 말하고 관은 위빠사나를 닦아 법의 본성을 보는 경지를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사마타를 닦아 지를 얻게 되면 어떤 경지를 체험하게 됩니까. 지(止)는 번뇌가 그친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타의 경지는 깨달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혜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가 그쳤다 할지라도 완전한 경지가 되지 못합니다. 번뇌가 그치기는 그쳤는데 모두 그친 것이 아니라 굵고 거친 번뇌만 그친 것입니다. 중생들의 나고 죽음의 뿌리가 되는 근본 번뇌로서의 무명은 파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타는 미세한 근본 번뇌인 무명을 제거하기 전에 닦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을 정화시켜 청정하게 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관쌍수 즉, 지와 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와 관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함께 갖추어져야만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관쌍수를 다른 말로 정혜쌍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지’는 번뇌와 망상을 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칠 지(止)’로 표현한 것이고, ‘관’은 몸과 마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에서 ‘볼 관(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수행체계는 크게 나누어서 번뇌망상을 그치게 하는 수행과 실상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둘을 먼저 닦든지 나중에 닦든지 결국에는 함께 완성되어야만 바르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와 관을 정과 혜로 다르게 말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