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공방 끝정부에 의해통합종단 출범 대법원 앞에 운집해 결의문을 낭독하는 비구승과 신도들 모습. 1960년 11월 대처측이 승소하자 비구측은 대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청사로 진입하였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승려가 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진제공=민족사 ‘정화운동’은 1955년 8월 4일 ‘왜색승려는 물러가라’는 이승만의 제7차 담화 발표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비구승들은 8월 12일 조계사에서 문교·내무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헌을 개정하고, 설석우를 종정으로 추대한다. 당시 종정은 송만암이었으나 비구측에서 대처측과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서 보조종조설을 주장하자 이러한 처사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비난하면서 사퇴했다. 그러자 비구측은 종정마
“대처승은 모두 친일파” 일방적 매도로 토론 통한 합리적 해결 무산1955년 승려대회 기점 비구승 종권 장악…지리한 법정 공방 이어져 1954년 9월 27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회. 이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지향하는 종헌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 사진제공=민족사 ‘정화운동’은 그 성패 여부를 떠나서 일제시대 정법을 수호하고 계율을 지키고자 하였던 비구승들이 해방 이후 한국 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비구승들은 해방 이후 자체적으로 정법을 수호하고 정통성을 천명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고불총림 결성과 봉암사를 거점으로 한 봉암사결사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정화운동’의 발발은 역설적이게도 독실한 감리교 신자
조계종총무원 발간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에 실린 6.25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봉선사 해탈문.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인명의 살상이 따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무수한 전쟁이 있어왔다. 우리 민족이 가장 최근에 경험한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이다. 불교계는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를 소실 당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피살되거나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사찰은 대부분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여 사찰을 습격하였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군과 경찰은 정도에 지나치는 사전조치를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빨치산과 남한의 군경
불교계 대책위원회 결성…이승만 담화로 45% 농지 회수농지 대신 사업체 불하…경험미숙과 분규로 대부분 상실 1965년 「대한불교」에 게재된 농지개혁 후 불교계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전하는 보도 기사 사진제공=민족사 어떤 종교 단체든지 교단을 유지하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물적기반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은 농지에 있었다. 일제시대에 사찰의 재산은 사찰령에 재산을 매각할 때는 사전에 관청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어서 매매가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찰은 많은 농지를 보유하는 대지주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 농지개혁이 진행될 때 좌우익의 갈등으로 우선적으로 귀속농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북한의 경우 1946년 3월 농지개혁의
고불총림이 결성되었던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사의 전경. 대한불교 조계종의 연원은 1941년에 성립된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실질적인 출발은 해방 이후 1954년 이승만의 담화로 시작된 이른바 정화불사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일제시대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해방 직후에는 전체 승려 가운데 90%가 넘는 승려들이 대처승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정화불사는 대처 승단으로부터 비구 승단이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폭력과 법정 소송으로 얼룩져있으며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다운 면모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해결이 아닌 불법에 의지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은 없었을까.
봉암사 결사의 역사적 장소인 문경 봉암사의 현재 모습.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불교계 사정 또한 비슷하였지만 그 양상은 조금 달랐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대처승과 비구승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비구승 중심의 승단 건립이 중요한 과제였지만 당시 비구승의 비율은 전체 승려 가운데 5%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전국의 주요 사찰은 모두 대처승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면한 최대 과제는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
軍牧 기독교 독점…“그리스도 정신으로 건국”망언일제잔재 사찰령 유지…기독교에만 각종 혜택 부여 1945년 11월 이승만이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미군정 점령군 사령관 하지에게 소개하는 장면. 『이승만의 삶과 꿈』(1996. 유영익)에 사진수록. 우리나라는 해방과 더불어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지 못하고 3년이라는 미군정 시기를 거치게 된다.1945년 9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인천을 통하여 상륙하였고, 시민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미군이 진주한 시점부터 제1공화국이 탄생하는 시점까지를 해방공간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에서 건너 온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이다. 이 기간 동안에 기독교 우선 정책이 시행되었
사찰령 등 악법 철폐 실패로 불교청년단 등 혁신 세력 등장급진적 개혁으로 우익과 대립 불교청년당 인사들이 통도사 무풍교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불교청년당 선전부장을 지냈던 통도사 출신 임정달로 법명은 화산이다. 사진제공=민족사 우리나라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의해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수용 여부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처음에는 좌익과 우익이 모두 반대를 주장하였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익계열은 곧 찬성 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찬성하는
조계종 종명 폐기 …‘조선불교’사용이종욱 등 친일파에게 형식적인 징계권상로·허영호 등 친일승 대거 기용 해방 이후 구성된 불교 교단 기구표 및 간부 명단. 교정 박한영, 중앙총무원장 김법린, 중앙감찰원장 박영희의 이름이 보인다. 사진제공=민족사.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의 만 35년 간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의 감격이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힘으로 맞이한 해방이 아니었다는데 있었다. 우리 민족이 해방이 되는데 참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외세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한반도는 허리가 잘리어 미국과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이 무렵 남북으로 분
총본사 5만3000원 일제 헌납해인사 등 군용기 1대씩 상납국방헌금 모금에 31본산 동원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에서 헌납한 5대의 전투기 가운데 한 대인 ‘조선불교호’.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기습 폭격을 가함으로써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시작한 이래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남방으로 필리핀과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을 점령하고, 미얀마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도발의 명분을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방어한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수호라는 데서 찾았다. 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서 일본은 인력부족과 물자부족이라는 위기 상황에 봉착하였다. 그 대안으로 도출된 것이 ‘국민총력체제’이고, 후방의 지원을 강화하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건립 공사 광경. 사진제공=민족사. 본사 주지 회의서 선교양종, 조계종으로 개칭 38년 총본사 태고사 건립…현 조계사로 남아 종정 추대 불구…총독부가 주지 임명권 행사 일제시대 총독부는 사찰령 체제 아래서 불교계를 31개 본사로 나누어 통제하였다. 총독부가 불교계를 31본사로 분할한 것은 단일한 지도체제 아래서 통일된 목소리를 낼 경우 그것이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면 대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일제는 분할통치 방식을 도입, 서로간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여 효율적인 지배를 꾀하였다. 불교계 내부에서는 분열된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통일기관 설립의 필
31본사 주지 빠짐없이 개명…불교잡지 등 언론 통해 절차·방법 자세히 소개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히로다 쇼히쿠’…불교계 절반 이상이 개명 참여 창시개명 서류를 법원에 제출할 것을 촉구하는 전단. 우리 민족에게 성과 이름은 생명의 근본 줄기로 인식되어 자신이 어느 혈통 집단에 속하느냐는 정체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긍심의 상징이다. 우리 가족제도에는 불변의 법칙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사람의 성은 일생동안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외국과는 구별된다. 둘째, 동성불혼이다. 혈통이 같은 사람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셋째, 성이 다른 사람은 양자로 들이지 않는다.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