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남산에는 사지(寺址) 150개소, 불상 129체, 탑 99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부도 8점 등의 수많은 성보가 산재해 있다. 하여 누군가는 ‘불적의 보고’라 했고, 누군가는 ‘한국 최대 노천 박물관’이라 했다. 경주 남산이 학자들에게는 ‘보고’요 ‘박물관’으로 보이겠지만 불자들에게 경주 남산은 불산(佛山)이다.남산 마을 초입에서 만난 서출지소지왕 목숨 살린 편지 나온 연못불교 전래 과정서 생긴 갈등 단면바위에 일곱 부처님 새긴 칠불암동쪽 향해 선 삼존불 중 본존불은
시어(詩語)의 힘을 말할 때면 스치는 시 한 편이 있다. 윤동주의 ‘눈’이다.눈이 새하얗게 와서눈이 새물새물하오. 조선 인조 때 전소됐던 청암사벽암 각성 명으로 허정이 재건그 인연으로 대강백 회암 탄생쌍계사 중수·수도암 중창한 이도선교에 정통한 선지식 벽암 각성청암사∼수도암 이어지는 ‘수도길’‘인현왕후길’ 표기는 지자체 오만참 짧은 시다. 그리 대단한 시로 보이지 않는데 자꾸 읊조리게 되는 건 눈(雪)과 눈(眼), 새하얗게와 새물새물이 이뤄 낸 운율 때문일 것이다. 새물새물! 사전 의미로는 ‘입술을 한쪽으로 약간 비틀며 소리
청명한 11월의 가을 하늘이다. 오어지 감싸 안은 산도 단풍 들어 가을정취를 자아낸다. 늦가을은 길을 걷는 이로 하여금 쓸쓸함과 숙연함이 섞인 묘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이어서일까? 원효·의상·혜공·자장 네 스님한 공간에서 수행했던 운제산신출귀몰 혜공 원융무애 원효똥 누어 놓고 촌철살인 대결산봉우리 아래 걸터 앉은 자장암절이 내준 풍경만 봐도 무념세계다리 하나 건너야 한다. 가만 보니 원효교다. 원효대사가 이 산에 들어와 초암 짓고 정진한 때가 있었다. 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원효암이 그
10월 단풍을 놓친 나그네들이 11월의 단풍이라도 붙잡으려 찾는 산사가 있다. 가을 단풍을 가장 늦게 보낸다는 전남 장흥의 백암산 백양사. 11월10일 전후면 절 진입로로 향하는 사하촌 삼거리부터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3.5km의 길은 붉게 물든다. 애기손바닥만한 단풍잎 색깔이 고와 여기 사람들은 ‘백양사 단풍’을 일러 ‘백양사 애기단풍’이라 한다. 그렇다고 단풍잎이 여느 산사의 단풍잎보다 작은 건 결코 아니다. 나무가 다소 작아 붙여진 이름이다. 흰 양이 윤회 메시지 전한 후백암사서 백양사로 사명 변경문고리만 잡아도
황새, 장수하늘소, 경산 삽살개, 서울 수송동 백송, 보은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처럼 마시는 물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수 있을까? 설악산이 품은 샘에서 솟는 오색약수는 2013년 천연기념물 529호로 지정됐다.당당히 서 있는 작은 암봉조차힘 절제한 내공 깊은 고수풍모 합장·가부좌 틀던 해동신동유가·도가·묵가 비좁다며 설악산 오색석사로 출가오도 후 만행길에 올라서도병든 사람·독거노인 돌 봐중국서 ‘동방 대보살’로 칭송철분 냄새와 함께 전해져 오는 특유의 지릿한 맛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사람들은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만한 이유가
새벽 5시 50분. 서울 구파발 북한산성 입구 주차장에 서서 동녘의 빛을 기다린다. 일출시간은 6시 32분. 20분 기다렸으니 40분만 더 기다리면 산이 내어 보일 것이다. 태고 때부터 호지해 왔던 부처님을! 원효봉이 솟은 후 나투신 부처님여신이 조성한 치마바위 위 정좌서암사는 1925년 홍수로 매몰 후사라졌다 2006년부터 복원 시작영취봉 밑 상운사서 본 풍경 일품원효대사가 정진했던 원효암 전각진영 속 글없는 경전이 세간 경책원효봉과 만경대, 노적봉은 어둠속에서도 짊어 온 세월의 무게를 전하려는 듯 시커먼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시를 몰라도 시인이 되고야 마는 계절. 전재승 시인의 노래처럼 ‘낡은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잉크 빛 보다 진하게 사랑의 오색 밀어들을 수놓으며 밤마다 너를 위하여 한 잔의 따듯한 커피 같은 시를 밤새도록 쓰고 싶’은 가을이다. 눈앞에 놓인 원고지 칸을 안 메우면 또 어떤가! 길 떠나는 순간 시인이 되는 것을! 원효-의상-윤필 세 성인정진 해 ‘삼성산 삼막사’의상 대사 올라 ‘의상대’양녕-효령 올라 ‘연주대’하늘-바다 닿은 절경 연출붙잡지 못한 인연 있거든바람 속에 흘려 보내시게성인(聖人) 세 사람이 머문다는
신라 8대 아달라왕은 재위 3년인 156년 길을 열었다. 문헌상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길이다. 1860년의 역사를 간직한 그 길은 지금도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잇고 있다. 하늘재다. 미륵 품에서 관음세계 향한 여정나그네와 말들의 쉼터인 역원의관리를 맡았던 미륵 세계사에는인공석굴에 미륵불 모셔져 있어망국의 한 담은 마의태자가 조성미륵리 나서 관음리로 길 잡으면하늘과 맞닿았다는 하늘재 만나문헌상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길뛰어난 풍광보다 역사 깊은 고개하늘재 이전에는 계립령(鷄立嶺),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렸다. 계립령(鷄立嶺)은 신라
“암석 사이로부터 좁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가시덤불을 헤치고 덩굴을 부여잡으며 돌고 돌아 규봉암에 이르니 이것이 세칭 광석대이다. 넓은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수백 사람은 앉을 수 있다. 많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푸른빛으로 빽빽하게 서 있어 병풍 휘장을 두른 듯하였다.”(김순영 선생 역)송광사 산문 나온 금명 “무등산은 천년 절”의천의 펄떡이는 활구“산과 바다는 고르다”규봉암에 뜬 달경 읽는 선재 비추리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에 기록된 ‘규봉암 가는 길’이다. 그렇다. 장불재에서 동쪽
호남의 진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등산(無等山)은 명산이다. 빛고을 사람들이라면 ‘한 해 다섯 번은 오른다’는 산. 그렇다고 광주 사람들만의 산은 아니다. 산은 광주, 화순, 담양 세 지역에 걸쳐 있다. 빛고을 무등산은 ‘차별 없는 산’상서로운 돌들이 꼿꼿하게 줄선서석대는 한국 주상절리의 대표서석대서 이어진 돌길 장불재는서석대·입석대·승천암까지 지나거침없이 쭉 내려서는 고개마루평평한 돌에 움푹 파인 돌구멍옛 암자 떠받친 기둥 있던 흔적‘삼국사기’에서 무등산은 ‘무진악(武珍岳)’으로 등장한다. 신라의 신문왕은 백제를 평정한 직후(68
‘연들이 여린 귀를 내놓는다/ 그 푸른 귀들을 보고/ 고요한 수면에/ 송사리 떼처럼 소리가 몰려든다/ 물 속에 가부좌를 틀고/ 연들은 부처님같이 귀를 넓히며/ 한 사발 맛있는 설법을/ 준비중이다/ 수면처럼 평평한 귀를 달아야/ 나도 그 밥 한 사발/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길상호 시 ‘蓮의 귀’ 전문)도교의 이상세계 담은 궁남지그 연못을 가득 메운 건 연꽃백제 성왕의 불심 엿볼 정림사절터에 우뚝 선 오층석탑만이그 옛날의 영광을 대변할 뿐사지복원으로 부여인 그렸던정토 세상 이 땅에 펼쳐지길어찌 들었을까? 송사리 떼 물결 가르는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 한없음을 담은 산이요 무한을 안은 절이다. 그 무엇을 품고 있기에 셀 수도 없단 말인가? 중국 수(隋)나라의 길장 스님은 ‘묘법연화경’을 삼론종 입장서 풀어 쓴 ‘법화의소(法華義疏)’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기쁨, 사랑과 증오의 분별로는 잴 수 없으므로 무량이요, 과거, 현재, 미래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무량이다.” 무진암엔 김시습 부도탑 섰고무량사엔 그의 자화상 안치돼마조 제자 보철에게 인가 받은무염 스님 별칭은 ‘동방대보살’귀국 후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성주산문 열어 40
6월 녹음 한껏 오른 울창한 산림에 들어서니 크고 작은 바위틈으로 새어 나오는 청아한 물소리가 발길을 이끈다. 금원산이 자랑하는 유안청 계곡! 금원산에는 폭포가 유독 많다. 산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마주하는 미폭포(米瀑布)부터 산 정상 아래의 작은 폭포까지 이어진 2.5㎞ 구간에는 큰 폭포만도 6개가 자리하고 있다. 유안청폭포가 갖는 원래 이름가섭존자의 이름 딴 가섭동폭가섭사라는 옛 절 있었음 시사원숭이 가둔 산 뜻한 금원산 속국내 단일 최대 바위 ‘문바위’는가섭사 일주문 대신했던 가섭암돌계단 올라 마주한 세 불보살천의 한 자락까지
28번의 웅혼한 범종 소리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들기 시작한다. 한 선사가 빈 하늘을 응시하듯, 수령 4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가 대웅전을 마주한 채 묵묵히 서 있다. 한 거사가 작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미륵전으로 걸어가고 있다. 세조가 기도해 지병을 치유했다는 입소문 깃든 미륵불이다. 고려후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니 어언 800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온 부처님이시다. 이 절 영화사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지켜보았다.의상이 해돋이 명소에 지은 절화양사에 뿌리 둔 곳이 영화사범굴사 명맥 이은 절이 대성암고구려·백제·
진달래가 떨군 꽃잎 서너 장이 가야천 물길 따라 내려오고 있다. 저 꽃잎 흘러 온 길 따라 오르면 가을 단풍을 그대로 담고 흘러 물마저 붉게 변한다는 홍류동 계곡이다. 가야천과 홍류동 계곡이 이어져 생성된 길, 마을과 산사의 인연이 닿은 길 ‘소리길’이다. 우주 만물이 소통하고, 자연이 교감하며 내는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는 길이다.가야천·홍류동 계곡 이어지고마을과 산사 인연 닿은 소리길만물 소통·생명의 소리 들려줘치인리는 최치원 이름 딴 지명그의 책에 해인사 창건기 전해일주문 지나 사천왕문 향한 길망상·탐욕 한조각 허용 않는 곳이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794년 7월30일. 신라서 구화산으로 건너가 중국 땅에 지장신앙의 뿌리를 내린 김지장(696~794) 스님은 “열반한 뒤 육신을 다비하지 말고 3년이 지난 뒤 열어보아 썩지 않았으면 그대로 개금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부좌 한 채 열반에 들었다. 그날, 구화산이 울었다. 산천이 진동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고, 범종을 쳤지만 종은 제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범상치 않은 시적(示寂)임을 무정(無情)도 직감했음이라!신라 권력투쟁 지켜본 왕자 수충스스로 지장
수줍게 피었을 선운사 ‘봄 동백’과의 만남은 잠시 미뤄둔 채, 지난 밤 내내 달빛 머금은 오솔길 걷는다. 선운사 유명세 따라 선운산이 됐지만 이 불산의 원래 이름은 도솔산(兜率山)이었다. 미륵보살이 상주하는 내원(內院)과 천인들이 노니는 외원(外院)으로 짜여진 도솔천이니, 내원궁으로 향하는 이 산길 홀로 걷고 있으나 실은 천인들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리라.도솔암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여명의 빛살을 받으며 황금색으로 나투고 있다. 새침해 보이는 미륵불이신데 어찌 보면 퉁명스러워 보여 달래주고 싶다. 정감 넘치는 마애불이었으니 이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 편액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최명희 소설 ‘혼불’을 접한 독자라면 천왕문이 설레게 다가올 것이다. 작품 속 도환이 이 절의 천왕문을 우리나라 최고의 천왕문으로 묘사했지 않은가.팔도도총섭 맡아서 승군 지휘임란·병란 후 후학양성 매진한벽암각성 문도 중창한 송광사절 연못 길 따라서 가면 종남산그 산을 넘으면 서방정토로 가는 이정표 ‘서방산’ 있고, 산 아래가진묵대사 출가한 사찰 봉서사“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
1919년 3월 1일. 그날, 거룩한 함성이 일었다.“대한독립 만세!” 2016년 3월 1일. 진관사가 자리한 서울 은평구 중심 도로엔 현재의 태극기와 다른 형태의 빛바랜 태극기가 함께 내걸렸다. 3·1운동 당시 한반도 땅을 뒤덮었던 그 태극기다. 97년 전 그 날의 함성에 더 귀 기울여 보라는 듯 하늘은 눈을 내려 이 땅을 설원으로 바꿔 놓았다.젊은이들에게 독립 필요성 설파정재 모아 상해임시정부 지원한초월 스님 주석했던 서울 진관사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하면서3·1운동때 사용했던 태극기 발견원효대사 창건한 사찰 삼천사도서울과
신라 헌강왕(신라 49대. 875년 즉위) 재위 당시 신라는 번영의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얹어진 태평가가 밤낮으로 흐르는 경주 땅을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이렇게 적었다. ‘경주서 인근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맞닿아 있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 소리도 도로서 끊이지 않았다.’신라 헌강왕이 용 위해 지은 망해사어부 무사귀환 기원 아낙 마음 대변영취산과 문수산 가는 이정표 역할청량산 자락 영취산에는 1400년 전초암 짓고 살던 낭지스님 기록 전해자장 창건한 문수사는 문수산서 기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