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절 수행 등을 해오면서 겪은 가피는 매우 많다.우선 건강과 관련된 것들이다. 나는 종합병원 수준이었다. 비록 오진으로 판명났지만 간암을 두 번 진단받을 정도로 간장 질환이 심했다. 얼굴은 온통 기미와 흑색의 낯빛으로 간장 질환의 징후를 강하게 표출했다. 끊임없는 치주 질환, 가족력이 있는 위장 장애, 악성 폐렴으로 병원에서 포기하고 있다가 겨우 회생한 과거, 폐결핵 3기 까지 갔던 병력, 매일 지사제 복용, 항문 가려움, 심한 허리 통증, 숯덩이 같은 발톱, 고질적인 이명 현상, 고혈압 등 셀 수 없는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
8년 전, 아내가 느닷없이 “당신, 108배 해보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슬하에 아들을 둘 뒀는데, 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둘째 아들이 입대를 했다. 아들이 병장을 막 달았을 무렵, 군대 사정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휴전선 부근에서 목함 지뢰가 터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전방부대에 있던 아들이 군대 내부에선 전쟁 발발 징후가 감돌고 있다고 알려 왔다. 이미 큰 아들을 잃었는데 작은 아들마저 잃는 게 아닌지 걱정돼 초긴장상태로 며칠을 보냈고, 아내가 이를 눈치 채고 절 수행을 권한 것이다. 그럼
인생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공부한 적은 없다. 경전 공부에 전념하다 ‘내가 부처님의 법을 정말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념적으로, 피상적으로 법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직접 경험을 통해 얻는 앎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법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에 그친다면 닭을 기르는 사람이 달걀을 줍는 대신 닭똥만 줍는 것”이라고 하신 아잔차 스님의 말씀이 아나빠나사띠 수행과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으로 이끌었다. 초보 수행자들이 수행 초기에 겪는 혼란과 어려움들을 경험했지만 실망하지 않고 정진하면서 일어난 의문들에 대해 답을
불교는 나의 모태 종교다. 외증조할머니께서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참선 끝에 온몸에서 빛까지 뿜어낸 ‘깨달은 분’으로 알려졌다고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는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께서 집에 오셔서 증조할머니와 법담을 나누시고, 외할아버지는 도봉산 자현암 건축에 크게 보시했으며, 외할머니는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목욕재계하고 참선수행을 하셨다.어린 시절에 나름대로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부처님의 가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인지 한국 최초의 기독교 여성학당인 이화여자중고등
그런데 문득 지금 하는 일은 내가 정말 원해서 시작했지만, 이 일을 하다가 내일 죽으면 나는 무엇이 남을지 의문이 들었다. “좋은 작품이 나오면 나는 만족스러울까” “유명해지면 나는 그 명성에 만족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해 봐도 내게 떠오르는 답은 “전부 아니다”였다. 늘 기도와 수행 속에서도 영화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해보니 모든 관점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만약 내일 당장 죽는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금강경’ ‘화엄경’을 읽어보고 ‘아미타경’도 읽어봤지만 의문
불교와의 첫 인연은 아홉 살 때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종로구에 있는 ‘관음사’라는 작은 암자에 갔던 기억이다. 어른들이 부처님께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절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108배에 도전했다. 그런데 절을 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절을 잘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어른들이 모두 공양하러 가셨을 때 몰래 법당에서 아무도 모르게 절을 연습했다.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었다.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법당의 기도문 중에서 우연히 보게 된 문
월정사와 상원사 적멸보궁에 다녀온 이튿날 새벽, 잠을 자다가 갑자기 눈이 떠졌는데 누운 채로 하나의 분명한 이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에 대한 이해였다. 좋아하는 것은 나도 미처 모르는, 본능적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상대방의 어떤 점에 이끌리는 마음. 사랑하는 것은 어느 존재가 그 존재 자체로 건강한 모습으로 있거나 더 풍성해지는 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마음. 이것이 바로 불교의 자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선 여러 준비물과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무
7월29일 동산반야회 제6차 전국염불만일회 26차년도 정진대회 1일차 밤이다. 달빛 아래 크게 자리 잡은 김천 직지사 만덕전에 100여 불자들이 좌복 위에 앉아 염불삼매에 빠져있다. 의식법사들의 정근목탁소리, 북소리, 요령소리와 불자들의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가 황악산을 울렸다. 문득 즐기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BTS·블랭핑크 공연장에 가서 떼창을 한다면, 오늘 나는 여기서 다른 불자들과 함께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며 즐기기로 했다. 동산반야회 법주 법산 스님이 외친다. “더욱 힘차게, 신나게, 멋있게 염불합시다.” 리듬에 절로
매일 연습했음에도 다리, 허리, 손목, 뱃속 장기들까지 아팠다. 또래 불자와 노보살님들이 아니었으면 몇 번을 그만뒀을 것이다. 삼천배를 하고 난 뒤 며칠은 힘들었지만, 마음 속에는 수행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아비라기도’를 알고 나서는 두 달 뒤 오직 아비라기도를 위해 매일 절을 했다. 한 곳에 모여 앉아 4일 동안 기도하려고 회사 휴가까지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수행에 심취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음이 맞는 도반들과 함께했기에 더욱 힘이 되고 즐거웠던 기억이다.‘108배 예불대참회문’과
항상 쉴 틈 없이 일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경력을 좇아 새로 이직했던 회사에서도 아낌없이 열정을 쏟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병원까지 다니게 될 정도로 매일 출근하는 것이 너무 힘겨웠을 때, 문득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어 혼자 낙산사를 찾았다. 모태불교였기에 절에서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홍련암으로 새벽 예불을 하러 갈 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가 마치 천둥번개가 치는 것처럼 크고 무섭게 들려 주춤거리게 했다. 하지만 진짜 천둥번개도 아닐뿐더러 나
불교에서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수없이 강조한다. 나에게는 선무도가 그렇다. 한창 쑥쑥 자라나는 아들이 어떤 운동을 해야 건강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자랄지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태권도, 합기도, 유도, 검도, 특공무술 등 무술이란 무술은 다 할 수 있는 전직 청와대 경호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그는 “어린이가 하기에 다른 운동은 많이 다치지만, 선무도는 다칠 위험이 적을뿐더러 마음을 함께 수련할 수 있어 좋다”며 선무도를 강력 추천했다. 그렇게 아들이 먼저 선무도와 인연을 맺었다. 집에서 도장까지 모자가 즐겁게 다니
‘잘 보인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불교와 인연을 맺으려고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나 보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면 어머니는 항상 “부처님께 눈 밝게 해달라고 부탁드려라” 하셨다. 아들의 눈이 낫길 바라며 향로나 범종, 촛대를 시주하셨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부처님은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영험한 신’이라고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의 간절한 원이 이뤄졌는지 불법과 인연을 맺고 살고 있다.6살 무렵 어머니는 앞을 더듬는 나를 데리고 경남 함양에서 서울 대학병원까지 찾아다녔지만 “아드님은 곧 실명할 것”이라
“현재에 늘 깨어있고 매순간 알아차림을 하라”는 혜연 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수행지침서가 되어 준다. 당시 한 달에 700명, 1년에 8000명 이상의 참가자들에게 명상을 지도하고 봉사자들과 함께 봉은사 영어 홈페이지 제작과 영문 책자를 만들며 무한한 보람을 가졌다.또 헝가리 부통령과 리투아니아 국회 의장단, 인도 상공부장관 등 외국 인사들이 찾아온 국제 템플라이프 행사를 진행하면서 이들이 한국 사찰에서 평화를 체험하고 좋은 인상과 감정으로 국가적 일정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불심으로 봉사에 나서는 많은 사찰 봉사자들
지금도 엄마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2년 전 갑작스럽게 엄마가 돌아가시자 온통 좌절감에 휩싸였다. 갱년기 우울증도 더해져 힘든 나날이었다. 그동안 자식 공부 뒷바라지 한다는 핑계로 신경 쓰지 못했기에 죄책감이 컸다. 취업에 성공한 자식들이 스스로 앞가림하기 시작하자 당시 당뇨병으로 힘들어하던 엄마를 위해 사찰음식을 배우고 있었다.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 꽂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죽음에 대한 고찰을 계속했다. 며칠 전까지도 같이
한 친구는 이렇게 표현했다. ‘무해한 사람들’. 그 표현에 동의한다. 청년명상힐링캠프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여정을 마친 뒤에도 인연을 이어갔다. 배움과 성장의 여정을 함께하며 지지해 주는 벗은 의지를 발휘하게 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지, 나 역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지.도반들과 선무도선요가강남센터를 찾아 채희걸 법사의 지도로 수련을 시작했다. 세계명상마을에서의 수업이 새로운 경험이었다면, 센터에서의 수련은 동작 하나하나의 의미와 느낌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과정이었다. 온라인으로 명상 모임을 이어가기도
목표는 오로지 합격이었다. 교육부에서 아이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펼치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며 세상은 편협한 이분법으로 분별되기 시작했다. ‘합격한 나’와 ‘그렇지 못한 불완전한 나’. 지옥에 사는 불완전한 존재가 행복할 리 없었다. 우울과 불안은 어느새 감정의 표면을 넘어 심연까지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사람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뜻밖의 친구는 책이었다. 작가의 문장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지만 결코 나를 함부로 평가하
평소에 걷거나 앉고 설 때 허리와 다리 통증이 상당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2020년 봄, 결국 길에 주저앉고 말았다. 초기에 치료받지 않은 게 결국 곪아 터진 것이다. 선천적 일자허리로 인한 디스크 증상과 더불어 ‘무릎 힘줄염’진단을 받았다. 도저히 다리를 땅에 딛을 수 없었고, “당장 입원치료를 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간곡한 권고에 2달간 병상에 눕게 됐다.입원을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하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에 빠졌다. 수술이라도 하게될까봐 무서웠다. 혹시나 잘못하면 ‘다시는 걷지 못 할 수도
살아가며 부처님과 단 한순간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고, 어린이법회와 중고등학생회, 현재는 청년회를 다니고 있다. 당연한 듯 매일 염불을 외우고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기에, 이름이 생겼을 때부터 부처님 제자이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어린이법회를 다니며 매달 108배를 했던 것이 수행의 첫 기억이다. 스님, 선생님, 친구들과 하는 절이 재미있었다. 절을 마치면 스님께서 소원도 들어줬다. 항상 흐뭇하게 응원해주는 스님과 선생님들 덕에 무슨 일이든 1등을 할 수 있을
40대에서 50대까지는 마음공부에 매진하며 매년 하안거, 동안거기간에 재가자도 참가할 수 있는 집중수행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템플스테이를 참가한 대중에게 명상을 안내하고 청소년캠프에서 아이들이 자연과 부처님 도량에서 마음 편히 지내다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느낀 건 요즘 아이들에게 불교의 신앙 부분이 잘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감정의 기복에서 헤맬 때 부처님 가르침과 참선·명상 수행으로 벗어날 수 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고 싶었다.현시대에 맞춰
부처님이 좋아 지금까지 열심히 법에 의지해 살아왔다. 나로 인해 용기를 갖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발원하고 있다.신심 깊은 불자였던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절에 다니는 것이 익숙했다. 아이의 시선으로는 초파일에 등을 달러 가거나 기도하기 위해서만 절에 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어떤 교리를 가르치는지, 어떤 수행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소원을 빌러 다녔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 입시기도에 정성을 다하듯, 친정 어머니도 다섯 자식들을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대학교 4학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