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잡지는 ‘조선불교월보’만해 스님의‘유심’은 1918년-‘불교’는 1924년 창간 1912년 창간된 조선불교월보. 사진제공=불교와 문화 시대의 단면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논설을 비롯해 수필, 소설, 시 등 문학작품까지 다양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정기간행물로 발간되는 잡지(雜誌)는 1663년 함부르크의 신학자이자 시인인 요한 리스트가 세계 최초로 『계발 월간 토론』을 발간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각국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해왔고,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 2월 ‘대조선인 일본유학생친목회’가 발행한 『친목회회보(親睦會會報)』와 같은해 11월 30일 발간된 『대죠션독립협회보』가 잡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잡지는 언제 처음
김연일의 제주 법정사 봉기가 불교계 첫 무력항쟁비구니 상근은 자금조달 … 신상완은 日 회담 동행 왼쪽부터 불교계 독립운동의 핵심 만해 스님, 민족대표로 3·1운동 참여한 용성 스님, 한성임시정부 불교대표 한영 스님, 의병활동 후 출가해 독립투신한 운허 스님. “아등은 기(起) 하였노라.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2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절멸(絶滅)에서 구하기 위해 아 7천의 대한 승니(僧尼)는 결속하고 기(起)하였노니 시사보국(矢死報國)의 발원과 중의경생(重義輕生)의 이 의기(義氣)를 뉘 막으며 무엇이 막으리오. 한번 결속하여 분기(奮起)한 아등은 대원(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혈전(血戰)할 뿐인저.”
불교 종단에서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종정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종통을 계승하면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어른으로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종정의 직위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 역사는 정확하지 않다. 종단 성립의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만큼 그 시대부터 종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 종정이라는 직위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신라시대를 비롯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등장하는 적지 않은 수의 종단 역사에서는 종문을 연 종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종정의 직위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한국불교 역사에서 종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첫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賣
현재까지 남아있는 불교출판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복원된 모습. 제자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이 입멸하고 500여 년이 지난 뒤부터 문자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전이 문자화되면서 경전 보급 역시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경전의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경전을 보급하는 공덕을 높이 칭송했다. 때문에 훗날 법보시 문화가 발전되었고, 사경 역시 법보시의 일종으로 널리 확산됐다. 따라서 『금강경』 「지경공덕분」에서는 “무수한 세월동안 물질로 보시한 공덕보다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한 공덕이 수승하다”고 했고,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는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강행에 맞서 불교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개혁회의는 종교문제에 간섭하는 공권력과 대치하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불교는 진리를 놓고 그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소모적인 다툼에 매달려 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1954년 정화운동 이후 한국불교는 무려 40여건의 크고 작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지난 반세기 동안 불교계의 관심은 ‘잿밥’에 치우쳐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불교 종단 또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향할 뿐,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영역에 속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밥 먹고 숨쉬는 일처럼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의천 스님 진영. 의천은 분열된 교단을 통일하고 왕권의 지배이념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문도와 계승자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분열이 일어났다. 법을 둘러싼 논쟁으로서의 법담을 넘어, 서로의 날선 대립각이 정치권력과 얽히면서 생겨난 교단의 분열과 분쟁사례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교파의 정치세력화와 세속화를 동반한 분열과 분쟁은 초기경전인 『법구경』에서 설한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빨리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라는 가르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치열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에서 교단의 분열 역시 불교와 정치권력의 연관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고구려에 처음 전래될 때부터
근현대 들어 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석남사 조사전. 우리사회에 근대화 바람이 불며 이른바 지붕개량사업이 한창 펼쳐지던 시절, 대부분의 서민주택은 초가집이거나 겨우 양철 또는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정도였으나 이 때도 사찰의 지붕만은 기와로 덮여 고풍스런 멋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찰의 지붕은 언제부터 기와로 덮기 시작했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 유적 중 산성을 중심으로 한 건물지와 사찰 터에서 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됨으로써 이미 삼국시대 사찰에서도 지붕에 기와를 얹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기와의 역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기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 시기는 122년.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6대왕인 지마왕 11년(122
86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참가자들이 10·27 법난 해명과 불교악법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89년 10월 27일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등 7개 단체 500여 명이 동국대에서 10·27 법난 진상규명을 위한 실천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민족사 간 한국불교 100년 사찰-불상-경전 불태우고 승려 강제 환속도승법 폐지로 불교존립 법적 근거 폐기도 삼국시대 고구려와 이후 고려에서 벌어진 법난은 조선시대에서 벌어질 최악의 법난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조선 500년은 법난과 박해로 점철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에 자행된 교단 통폐합을 시작으로 성종, 연산군, 중종 시기의 불교 말살 정책까지 가히 폐불 시대라
고려시대 몽고군 침략으로 인해 사찰이 소실되는 법난을 당한 황룡사 터 기나긴 역사 속에서 불교를 핍박하거나 나아가 불교 자체에 대한 말살을 시도한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사찰을 훼손하거나 철폐시키는 것은 물론 사찰재산의 몰수, 탑과 불상 및 경전의 파손, 불법을 펴는 법회의 금지, 승려의 환속, 출가금지에서 학살까지 법난(法難)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러한 사건들은 불교를 태동시킨 인도에서부터 우리나라까지 불교가 전래된 많은 나라에서 발생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불교를 태동시킨 인도에서는 6세기 초 북인도를 침입한 훈족이 자행한 법난과 8세기 이후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비롯된 법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호전적 기질을 갖춘
백제에서 간 스님들과 기술자들이 지은 현존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인 일본 법륭사 금당 “백제 성왕이 사신을 보내 금동석가불 1구, 번과 천개 약간, 경론 약간 권을 보냈다.”『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 13년 조에 전하는 이 내용이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한 첫 기록이다. 이때 백제의 제26대 왕이었던 성왕은 “이 법은 모든 법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깨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주공·공자도 오히려 능히 알지 못하였도다. 복덕과보를 낳고 곧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 그리고 이것은 천축으로부터 이곳 삼한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의해서 받들어 모시고 존경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왜에 전해주는 것”이라며 불상과 경전을 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서기』에 나타
우리나라 복장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영태 2년명 납석제사리호와 사리호를 넣었던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부처의 심장을 상징하는 복장물(腹藏物)을 불상 안에 넣음으로써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을 한 시기는 언제부터였을까. 복장의 연원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는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조성된 불상 내부에 인간의 오장육부 형상을 넣는 것이 유행했고, 일본의 헤이안시대(8세기 말~12세기 말) 불상에서도 그 같은 복장물이 발견되고 있어 대략 8세기 이전에 복장을 넣는 의식이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복장을 넣는 의식이 언제부터 행해졌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경남 산청 내원사에 봉안돼 있는
설총 낳고 무애행 보였던 원효.(맨왼쪽)길위의 큰 스님으로 불렸던 경허 스님. (가운데) 탈춤놀이에서 연기자들이 쓰는 파계승탈의 한 모습.(오른쪽) 승려 출신 소설가 김성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만다라』를 극화한 드라마에서는 한 스님이 거나하게 술이 취한 채 손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월백설백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선술집의 작부는 이 생경한 스님의 모습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세간에서 고기 먹고 술 마시는 스님을 일러 말하는 파계승(破戒僧)의 대표적 모습이 이러할 것이다. 파계승은 말 그대로 불법의 계율을 깨트린 스님을 말한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어육을 마다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여색을
진언과 다라니는 밀교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 수행을 하고 있는 진각종에는 불상 대신 육자진언을 새겨놓고 있다. 지난 2000년 텔레비전 드라마 한편이 세간의 관심 속에 방영되면서 불교계 밀교 종단이 때아닌 홍역을 치러야 했다. KBS가 시청률 높은 주말에 편성한 ‘왕건’이 바로 문제의 드라마였다. 당시 드라마에서는 왕건에 앞서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의 활약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장면은 궁예가 혹세무민하는 장면마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외웠고, 때문에 ‘옴마니반메훔’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일반 시청자들이 이 진언을 마치 사이비 종교의 주문쯤으로 오해 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옴마니반메훔’ 육자대
조선시대 제작된 흥국사 사자형 법고대 “법고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일었던 잡상(雜想)을 잠재울 수 있다” 『법화경』「화성비유품」“번뇌와 망상과 오욕의 마군(魔群)들을 쳐부수고자 설법의 대군을 몰고 나갈 때 진군을 독려하기 위해서 북을 친다” 『법화경』「서품」법고(法鼓)는 이처럼 번뇌 망상을 떨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롯이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법고를 일러 ‘법을 전하는 북’이라고 하기도 한다. 즉, 북소리를 빌어 부처님이 깨친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해주려는 뜻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행정진을 독려하는 의미가 함께 깃들어 있다. 법고는 또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축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만끽한다고 믿어왔기 때
불교의식을 행할 때 몸동작을 통해 공양하는 스님들의 춤을 승무라고 한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시인 조지훈이 비구니 스님들이 추는 춤사위의 고운 선율과 동작 하나 하나를 지켜보고 난 후 그 감동을 풀어낸 시(詩) ‘승무(僧舞)’의 앞부분이다. 조지훈의 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듣고 보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승무의 단면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익히 보아서 알고 있는 승무는 불교무용으로서의 승무가 아니라 민속무용으로서의 승무가 대부분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승무를 정의하자면 ‘불교의식을 진행할 때 부처님 진리의 말씀
1946년 설립된 최초의 총림인 ‘가야총림’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해체됐고,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됐다. 사진은 해인사 전경.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승가를 중국말로는 중(衆)이라 한다.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서 화합하는 것을 승가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많은 나무가 모인(叢) 것을 숲(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은 많은 스님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 마치 많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 것과 같다는데서 총림(叢林)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말뜻에 비춰볼 때 총림이라는 개념은 인도에서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총림은 중국에 와서 비로소 성립되었고 총림의 규율인 청규가 성립된 것도 중국이다. 총림이라는 표현이
(왼쪽부터) 법성종 창종 원효 조사. 화엄종 창종 의상 조사. 천태종 창종 대각국사 의천. 9산선문을 조계종으로 통합 한 태고보우. 삼국시대 불교 역사를 알 수 있는 문헌은 대부분 중국 유학파들의 귀국 후 활동에 집중되면서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단체를 중심으로 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고, 종단(宗團) 또한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떠한 종단을 설립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스님들의 중국 유학시절 및 귀국 후의 활동상을 통해 그의 사상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종단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종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진 왼쪽 부터 서왕가 목판본, 서왕가 필사본, 해인사판 보권염불문본 서왕가 목판본, 회심가 필사본. 나도비록 이럴망정 이세상의 인재인데무상함을 생각하니 모두가다 거짓일세부모님이 끼친얼굴 죽은후에 속절없다다시깊이 생각하야 세간사를 뿌리치고 부모님께 하직하고 바랑하나 짊어지고청려장을 비껴들고 도량명산 찾아들어선지식을 친견하고 천경만논 탐구하여한마음을 밝힌뒤에 여섯도적 잡으리라.(중략)청학백학 앵무공작 금봉이며 청봉들은하는것이 염불이고 맑은바람 건듯부니염불소리 요요해라 슬프도다 우리들도인간세상 나왔으니 염불말고 무얼하리. 고려시대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이 지은 가사(歌辭) 서왕가(西往歌)의 시작과 끝 부분이다. 가사라고 하면 보통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
현존하는 기록상 한국불교 최초의 우바이인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의 능.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 파사석탑은 현재 허황옥 능 한쪽에 설치한 보호각 안에 보존돼 있다. 16살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서기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배를 타고 장장 2만 5000리 길에 달하는 긴긴 항해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도착했다. 그녀는 가락국 수로왕의 명을 받아 나룻목에서 대기 중이던 가락국 대신들의 영접을 받으며 낯선 땅에 발을 디딘 후 가장 먼저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장유사 고개를 넘어
신라는 점차 중국에서 계율을 공부하고 연구한 유학승들의 귀국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운 바를 근거로 독자적 교단을 형성해 갔다. 비구니 교단 역시도 이러한 신라불교 전반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라의 비구니 관련 기록 가운데 특이할 만한 내용은 바로 비구니 승직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국통(國統)은 1인인데,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혜량(惠亮) 법사(法師)로써 삼았다. 도유나랑(都維那娘) 1인인데, 아니(阿尼)로 삼았다. 대도유나(大都維那) 1인인데, 진흥왕이 보량(寶良) 법사(法師)로써 처음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도유나랑’이 바로 비구니의 승직이고, ‘아니’라는 비구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신라시대에 비구니 스님들을 총 관리하는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