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유신론은 1913년 불교서관서 발행순수 출판사 최초는 1921년 설립 삼장역회 1913년 불교서관서 발행한 조선불교유신론. ‘책이나 잡지 등의 인쇄물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인 출판사(出版社)는 종교의 문서포교(선교)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출판사가 1886년에 설립된 가톨릭출판사인 데서 알 수 있듯, 종교계는 근대출판의 선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역사는 1884년 세워진 광인사로부터 시작된다. 광인사는 1884년 일본에서 납활자를 수입해 근대 한국최초의 출판물인 『충효경집주합벽』을 비롯해 『농정신편』, 『농정촬요』등 새로운 문화를 알리는데 필요한 서적들을 출판했다. 광인사에 이어 18
1981년 여익구 편역-민족사 간행…“반정부적”이유저자 중 금서 조치를 당한 첫 번째 인물은 도선국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에 반하는 무리를 가차없이 내쳤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쓴 소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생각을 달리하고 움직임을 달리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는 서적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금서(禁書)다. 일반적으로 정치·안보·규범·사상·신앙·풍속 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법률이나 법률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에서 책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 일반에 유포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금서다. 그 방법 또한 다양해서 책을 불태우는 것을 비롯해 유포 및 판매를 금지하거나, 심지어 열람이나 소유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서양에서는 이미 서기
강릉포교당 병설로 개원…아동 62명 입학1926년 설립 마산 배달유치원과 함께 현존 최초 불교유치원인 금천유치원의 초창기 졸업기념사진. 근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어린이 포교는 정기적인 법회와 함께 유치원 운영으로 확대됐다. 1914년 한국 최초의 유치원이 설립된 이후 1920년대에 ‘교육구국주의’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유치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유치원 역시 이때 불교 포교와 교육구국주의를 염원하며 생겨났다. 1923년 7월 29일 개원한 강릉 금천유치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금천유치원은 현재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1926년 설립된 마산 배달유치원도 1940년 이름을 대자유치원으로 바꿔 현재까지 80년 넘은 전통을 잇고 있다. ‘비단으로 수
1900년대 서울의 일본불교 일련종 호국사에서 주관한 일요학교대회에 참석한 어린이들의 모습. 사진=한국불교 100년 부처님은 어느날 탁발을 위해 제자들과 사밧티 거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개울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개울에서 잡은 고기를 난폭하게 내팽개치기 시작했다. 이에 부처님은 “애들아 너희들도 남에게 그렇게 당하면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타일렀다. 아이들은 그때서야 부처님을 바라보고는 “예, 대덕이시여. 난폭하게 맞는다면 우리들도 싫습니다”하고는 물고기를 개울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본 부처님은 기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말을 들려주었다. 『자설경』「소나장로품」에 나오는 이
법회•강연 등 불법홍포…일요학교도 개설 1912년 만해 주도 임제종 중앙포교당 개소 1927년 제주불교포교당에서 치러진 불교식 결혼식 사진으로, 이 사진은 현재 볼 수 있는 최초의 불교식 결혼 기념사진이다. 사진자료=한국불교 100년 조선시대 들어 숭유억불정책에 따른 핍박으로 저잣거리를 떠나 산중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던 불교는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수세적 입장을 바꿔 인구가 많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포교당을 세우며 적극적으로 불법 전파에 나섰다. 당시 조선불교를 이끄는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던 만해 역시 1913년 조선불교의 개혁을 강조하며 내놓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
‘뉴스·논설을 비롯해 지식·오락·광고 등 여러 정보들을 특정 또는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정기간행물’로서의 신문(新聞) 역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길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10월 30일 창간, 10일에 한번씩 순간으로 발행된 「한성순보」가 최초의 신문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개화기에 선보인 「한성순보」는 수구파들에 의해 1884년 12월 폐간되면서 단명하고 말았다. 「한성순보」로 시작된 신문의 역사는 처음부터 거대한 세력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고,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노리던 제국주의 세력들은 온갖 방법으로 정확한 보도를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때문에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으로 이어지는 신문들은 일제의 언론통제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자비·수선 교훈 … 한용운·권상로 등 배출불교학은 물론 종교학·농업·생물도 교육 명진학교가 문을 연 동대문 밖 원흥사 전경. 현재 창신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한국불교100년 불교교육은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원 교육이 바로 그것이고, 사찰에서의 법문이 또한 재가불자들을 위한 교육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정규교육과정에 해당하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나선 것은 일제강점기를 앞두고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이뤄지게 됐다. 1876년 개항 이후 서구 문명과 문물이 들어오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일본불교 역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특히 일본 정토종은 1898년 경성에 교회소를
왼쪽부터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꾀한 이회광, 황도불교 건설 찬양한 이종욱, 명고축출 당했던 강대련, 친일서적 ‘임전의 조선불교’ 발간 권상로. 역사가 단절되고 민족의 정통성마저 뿌리째 뽑혀버린 일제시대 삶의 모습은 친일과 항일, 그리고 침묵이었다. 불교계 역시 대부분이 침묵으로 굴종의 시기를 버텨낸 가운데 만해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맞섰던 항일인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일제에 빌붙어 친일행각을 일삼으며 개인의 영달을 도모했던 인물 또한 적지 않았다. 불교계 친일행각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과 동시에 시작됐다. 한일합방 이후 온 나라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있을 때 이회광을 비롯한 최취허, 이보담, 이회명, 김용태 등은 자진해서 친일에 나섰다. 이들 중 한
실물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잡지는 ‘조선불교월보’만해 스님의‘유심’은 1918년-‘불교’는 1924년 창간 1912년 창간된 조선불교월보. 사진제공=불교와 문화 시대의 단면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논설을 비롯해 수필, 소설, 시 등 문학작품까지 다양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정기간행물로 발간되는 잡지(雜誌)는 1663년 함부르크의 신학자이자 시인인 요한 리스트가 세계 최초로 『계발 월간 토론』을 발간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각국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해왔고,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 2월 ‘대조선인 일본유학생친목회’가 발행한 『친목회회보(親睦會會報)』와 같은해 11월 30일 발간된 『대죠션독립협회보』가 잡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잡지는 언제 처음
김연일의 제주 법정사 봉기가 불교계 첫 무력항쟁비구니 상근은 자금조달 … 신상완은 日 회담 동행 왼쪽부터 불교계 독립운동의 핵심 만해 스님, 민족대표로 3·1운동 참여한 용성 스님, 한성임시정부 불교대표 한영 스님, 의병활동 후 출가해 독립투신한 운허 스님. “아등은 기(起) 하였노라.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2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절멸(絶滅)에서 구하기 위해 아 7천의 대한 승니(僧尼)는 결속하고 기(起)하였노니 시사보국(矢死報國)의 발원과 중의경생(重義輕生)의 이 의기(義氣)를 뉘 막으며 무엇이 막으리오. 한번 결속하여 분기(奮起)한 아등은 대원(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혈전(血戰)할 뿐인저.”
불교 종단에서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종정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종통을 계승하면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어른으로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종정의 직위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 역사는 정확하지 않다. 종단 성립의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만큼 그 시대부터 종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 종정이라는 직위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신라시대를 비롯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등장하는 적지 않은 수의 종단 역사에서는 종문을 연 종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종정의 직위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한국불교 역사에서 종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첫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賣
현재까지 남아있는 불교출판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복원된 모습. 제자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이 입멸하고 500여 년이 지난 뒤부터 문자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전이 문자화되면서 경전 보급 역시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경전의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경전을 보급하는 공덕을 높이 칭송했다. 때문에 훗날 법보시 문화가 발전되었고, 사경 역시 법보시의 일종으로 널리 확산됐다. 따라서 『금강경』 「지경공덕분」에서는 “무수한 세월동안 물질로 보시한 공덕보다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한 공덕이 수승하다”고 했고,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는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